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면 편파성과 편애의 세계에도 놀라운 의미와 윤리적 책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령 나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가족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긍정적이면서도 불공정한 상황에 있을 경우, 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가족은 내가 아무리 실수를 해도 나를 사랑한다(또 그래야 한다). 사랑은 늘 공정에 앞선다.--- p.6
그토록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한 예수에게도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가 누군지 확실치는 않지만(대다수가 요한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한 명 있었고 측근도 세 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심 없는 자비심과 모든 생명을 똑같이 대하는 태도로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또 다른 성자는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부처다. 부처는 인도 카스트제도의 벽을 넘어서서 철저하게 공정한 사회철학, 나아가 완벽하게 공정한 형이상학에 이르렀다. 당시로서는 놀랍게도 그는 여성이나 불가촉천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을 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했다. 이처럼 철학적으로 공명정대한 부처에게도 가장...인생은 공정하지 않다.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면 편파성과 편애의 세계에도 놀라운 의미와 윤리적 책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령 나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없음에도 가족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긍정적이면서도 불공정한 상황에 있을 경우, 나는 그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가족은 내가 아무리 실수를 해도 나를 사랑한다(또 그래야 한다). 사랑은 늘 공정에 앞선다.--- p.6
그토록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한 예수에게도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다. 그 제자가 누군지 확실치는 않지만(대다수가 요한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한 명 있었고 측근도 세 명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심 없는 자비심과 모든 생명을 똑같이 대하는 태도로 많은 이의 존경을 받는 또 다른 성자는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부처다. 부처는 인도 카스트제도의 벽을 넘어서서 철저하게 공정한 사회철학, 나아가 완벽하게 공정한 형이상학에 이르렀다. 당시로서는 놀랍게도 그는 여성이나 불가촉천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했을 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깨달음의 세계로 안내했다. 이처럼 철학적으로 공명정대한 부처에게도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모신 아난다라는 제자가 있었다. 부처의 주변인들 중 아난다만큼 부처와 절친한 인물은 없었다. 궁극적인 진리를 깨달은 존재에게도 오른팔이 있었던 셈이다.--- p.19
왜 보편적인 사랑과 공평성을 설파한 위대한 성자에게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일까? 왜 모든 사람은 똑같이 소중하다고 한 성자들조차 결국 차별을 한 것일까? 굳이 대답을 하자면 성자들도 달리 어쩔 수 없었던 탓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편애를 하게 마련이다. 나는 이 책에서 그 이유를 논할 것이다. 사랑은 차별적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경전들에 따르면 신들도 편애를 한다. 예를 들어 일신교의 하나님은 질투심이 많고 밥 먹듯이 편애를 하며 ‘민족’까지 선택했다.--- p.23
편애를 기꺼이 인정하는 유교 윤리는 잘 알려진 서구의 위선, 즉 성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척하면서 하는 짓은 내내 한갓 인간에 불과한 그런 위선을 모른다. 아마 공자는 예수가 말하는 보편적 사랑, 다시 말해 뺨을 때리는 못된 짓을 하라고 다른 쪽 뺨도 내미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자도 동시대를 살았던 노장 철학자
들 덕분에 보편적 사랑이 뭔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말이 안 된다고 여겼다. 당시 노장 철학자들은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했다. 이 경건한 처세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선은 무엇으로 갚아야 한다는 건가?”
유교 사상가에게 고결함은 공정하거나 공평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가족 간의 사랑과 헌신은 다른 모든 책임과 의무에 앞선다. 유교 문화는 자신의 친족을 맨 위에 놓는 자연스러운 가치의 위계질서를 부정하지 않고 소중히 여긴다.--- p.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