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3월이 왔습니다.
봄이 오는 3월에 저는 죽고싶다는 마음과 그러면 안된다는 마음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작년3월...학부모가 되었다는 설렘과 기쁨도 잠시...
남편이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아니 제가 떠나게 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10년 동안 연인으로, 친구로 지내다가 결혼을 했고 또 10년을 살았습니다.
늘 제 곁에 있었던 사람이라 이렇게 떠날줄은 몰랐습니다.
1년이 지나고 있는데 꿈만 같습니다.
남편은 술을 좋아했습니다.
술때문에 시부모님 만나기로 한 약속을 못 지켰고, 그 뒤 시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셔서 저는 장례식 영정사진으로 아버님을 뵈어야 했습니다.
아버님도 술로 인한 간경화로 돌아가셨습니다.
결혼식날도 새벽까지 술 마신 남편이 결혼식에도 오지 못할 뻔 했습니다.
남편은 늘 술을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술 마시기전에 전화 한통 해달라고 10년을 싸웠습니다.
전화가 안되면 문자만이라도 달라고...이 마저도 항상 지켜지지 않아 저는 남편이 돌아오는 새벽까지 늘 기다리고 마음을 졸여야했습니다.
늘 술 때문에 싸웠습니다.
아마도 일주일에 한 번은 싸운 것 같습니다.
술 마시고 안 들어온 날 지갑에 여자전화번호가 남겨진 날도 있었고 핸드폰에 여자전화번호가 버젓이 찍혀있는 날도 부지기수....
그래도 딴짓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전화하는거 원래 잘 안하는 사람이니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돈이 없어서라도 그런 짓은 못할거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월급통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기에 믿었었습니다.
그러나 사고가 난 후에 남편은 월급을 받아서 일정 금액을 떼고 저에게 이체를 시켜주었다는 것을...
배신감보다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돈이라도 잘 썼겠구나 싶어서...
사고나기 몇 달 전 부터 남편이 이상했습니다.
내가 20년동안 보아왔던 사람같지 않았습니다.
매일 늦었고... 직감으로 회사 일 때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주말에도 하루는 회사, 하루는 등산을 갔습니다.
아이와 저는 늘 외로웠습니다.
그래도 회사일이니까, 건강해야 되니까 생각하며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회사에 전화해도 늘 통화가 되지 않고, 일부러 영상통화해도 받지도 않았고 등산을 다녀왔다는데 흔적도 없고
이상했습니다.
공휴일 남편 회사 근처에 갔다가 회사에 들렀습니다.
역시 남편은 없었습니다.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옥상에 있었다고 둘러댔습니다.
둘러대는 줄 알았지만 싸우기가 힘들어 넘어갔습니다.
아이가 아빠와 외식하고 집에 같이 가고 싶다고 울면서 졸라댔습니다.
남편은 하는 일 마저 다 해야한다고 안된다고 했습니다.
우는 아이를 찐빵3000원어치 사주면 달래서 데려왔습니다.
사고가 나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날도 남편은 게임하느라 20만원을 썼다는 것을...
그렇게 남편은 게임에 빠져있었습니다.
가끔 PC방에 가서 새벽에 들어온적은 있었지만 심각하게 중독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게임때문에 보험이란 보험에는 다 대출이 되어있더군요.
몇 백만원을 게임에 쏟아붓고 평일 점심시간에 퇴근후에 또 주말에도 게임을 했었습니다.
경마, 주식, 게임 순으로 남편은 중독이 되었었고 술은 매일 마셨습니다.
저의 퇴직금으로 또 암수술 후 보험금으로 펑크난 돈을 메웠습니다.
술 마시면 연락두절은 늘상 있었던 일이지만 술 마시지도 않고 연락도 안 되고 늦게 들어오던 날들의 계속...
저는 남편에게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고...
그랬더니 갑자기 칼을 들고 와서 같이 죽자고 하더군요. 자기는 혼자서는 살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무서웠습니다.
7살밖에 안된 아이가 무서워하는 저를 막으며 아빠 왜 이러냐고, 아빠 정말 나쁜 사람이라며 막았습니다.
남편은 칼을 던졌고 마루바닥에 그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일이 있었던 뒷 날에도 늦기에 혹시나 싶어 밤 12시에 주차장으로 내려갔더니 차 문을 잠그고 저에게 문자 쓰고 있으니 집에 올라가서 읽으라고 하면서 먼저 가라고 했습니다.
유서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내고 또 사라졌습니다.
무서워서 새벽2시에 경찰과 소방서에 신고해서 남편을 찾았습니다.
아파트 후문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남편이 놀라더군요.
집에 와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이가 없었지만 죽지 않았기게 감사했습니다.
그냥 안아줄까 말없이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근데 안아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 때 안아줄걸...나 당신 사랑한다고, 당신 없으면 안된다고 말할걸 그랬습니다.
아이가 입학을 하고 이제 자기가 정신차리겠다고 했습니다.
달라지겠다고, 담배도 피지 않겠다고해서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기뻤습니다.
사고나기 전날 아이가 불안해하는 것 같다고 이제 우리 싸우지 말자고 했더니 자기만큼 잘 하는 아빠가 어디에 있냐고 하더군요. 그 뒷날 접대가 있는데 가지말까 하길래 가지말라고 했습니다.
건강하지도 않은 당신한테 왜 자꾸 접대를 맡기냐고 하면서...
네...남편이 접대라고 했던 술자리가 단 한번도 접대가 아니었다는 것도 사고가 나고서야 알았습니다.
그날도 밤 12시에야 통화가 됐습니다.
이미 만취상태였고 전화기를 친구에게 넘기더군요.
친구에게 새벽1시인데 내일 출근도 해야 하니 남편을 집에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 몸이 안 좋다고 하면서...근데 자꾸 딴소리를 하더군요.
남편에게 어디냐고 했더니 장소를 가르쳐주길래 딴 짓은 안하는구나 싶었는데 전화기를 끄지 않아서 술을 계속 마시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집에서도 가까운 거리이기에 남편을 데리러 갔습니다.
자고 있는 아이때문에 망설이기는 했지만 한 번 잠들면 깨지 않는 아이이기에 망설이다 남편을 데리러 갔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술집에 데리러 갔던 날입니다.
남편은 저와 같이 가겠다고 했는데 친구가 배웅해준다며 두 사람 어깨동무를 하고 나오길래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계단에서 남편이 친구를 껴안으면 고맙다,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어이가 없었습니다.
남편을 껴안고 있던 친구의 손이 풀리면서 중심을 잃은 남편은 계단 10개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제가 안 갔더라면 남편은 돌아왔을텐데...근태가 좋지 않아 승진에서도 밀려난 남편이 걱정스러워 지각할까봐 데리러 갔는데...제가 가지 않았더라면 돌아왔을 사람인데...저 때문입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구급차에 실려 가는 순간에도 혈압, 맥박 정상이었던 남편이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수술하면서 죽을수도 있다고, 수술하고 식물인간이 될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살려달라고만 했는데...수술을 마친 남편은 2주일 동안 버티다가 영영 우리곁을 떠났습니다.
수술하는 그 시간 제 아이는 혼자 있었고, 시댁 작은아버지는 한달음에 달려왔었고, 가까이에 있는 시누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전화를 받지 않고 계속 껐습니다.
어머니께서 그러더군요.
또 싸우나 싶어 전화 일부러 받지 않았다고...
우리 시어머니...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십니다.
장례식 내내 조문객들이 친엄마 맞냐고 할 정도로 경우도 없으십니다.
아빠 잃고 신종플루에 걸려 힘들어 하는 손자에게 괜찮냐는 말씀 한 번 없으셨던....제가 일자리 찾기까지 어머니 연금 일부분 주겠다고 하셔놓고 어느날은 그것마지 아까우신지 어머니댁으로 들어오라고 하셨던 분...유골함 보고 화장의 의미를 알까봐, 그리고 남편이 좋아하던 산 실컷 보게 해주려고 아버님 계신 공원묘지에 안장하겠다고 했더니 비싸다고 하셨던 분...
불행한 유년기를 보낸 우리 남편은 저에게서 어머니한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10년동안 깨워줘야 겨우 일어났고, 10년 동안 아무리 늦게 와도 밥 달라면 밥 챙겨주고, 바지를 살때도 입던 바지 들고 가서 수선까지 다 해서 가져왔었고, 빈 속으로 회사에 보낸 적 없었습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저는 남편의 엄마로 살았지 아내로서 살지 않았다고...
헤어지려고도 수십번을 생각했지만 남편이 불쌍했습니다.
저 아니면 죽을거라는 남편, 사고나던 그 날 아침에도 아이와 저를 껴안으며 우리 세 사람 살 만한 작은 공간에서 살 부대끼면 살고 싶다고...시골에 내려가자던 남편..
자주 시골에 가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맘과 몸이 병든 줄 알았더라면 내려갈 걸...정말 한이 됩니다.
남편을 사랑했지만 남편이 저에게 했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어렵게 임신하고 조산끼가 있어서 병가를 내고 지방 친정에 갔던 저에게 제가 전화하지 않으면 전화 한 번 없던 남편.. 32주가 되던 날 서울의 산부인과 선생님께서 제가 아이 낳을 때 위험할 수 있다고 서울 큰 병원에 와서 아이를 분만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남편 곁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던터라 좋아하며 그 얘기를 해주었더니 반응이 없었어요.
그러고는 지방 산부인과 선생님께 우리 마누라 여기서 애 낳아도 되냐고, 당신 자신 있냐고 직설적으로 묻더군요.
의사선생님께서 당신이 아이를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하시면서 기분나빠하셨습니다.
남편은 됐다면서, 그냥 여기서 분만하하고 하더군요.
저 분만하면서 죽을 뻔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간신히 죽음만 면하고...수혈을 많이 받았던 저에게 우리 어머니께서 에이즈 안걸리냐고 하시더군요.
옆에 있던 저의 오랜 친구가 그 말 듣고 얼마나 울었던지...
늘 밝고 자신만만하던 제가 너무 불쌍하다고 하면서 피 묻은 제 몸을 닦아주며 울더군요.
조산끼 때문에 겨우 인간인큐베이터가 되어 버티던 날 남편은 술집에서 여자 불러놓고 술 마시고...
저는 아이 낳을때도 혼자 짐 꾸려 갔었고, 암에 걸린 제가 수술하러 입원하러 갈 때도 혼자 지하철 타고 갔습니다.
암수술 전날에도 남편은 노래방에 갔었고, 친정엄마께서 사경을 헤맬때에도 남편은 병원에 달려와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동생이랑 경마장에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아이가 아파서 입원을 해도 전화 한 통 없고,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아이를 보고 출근을 해도 전화 한 통 없던 남편을 용서가 안됐습니다.
암 수술 후 매 년 정기검진 갈 때마다 어떻냐고 한 번 물어봐주기를 바랬는데 이 또한 제 욕심이었고, 뭔가 기대를 하면 제 마음만 다친다는 것을 늘 깨닫게 되었지요.
아무리 술마셔도 끄떡 없을 것 같은 남편도 쓰러지더군요.
매일 술에 야근에...발작을 하며 쓰러졌던 남편이 다시 살아나면 어쩔 수 없이 바뀔거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우리 남편 술 끊을 수 있게 해줘서...
그러나 술 못 끊더군요.
녹내장 진단도 받았습니다. 알콜성이라고 하더군요.
실명이 될 수도 있다고...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돈도 내가 벌면 되고, 남편의 눈도 내가 되어주면 된다고...간암이나 폐암 걸리지 않은게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녹내장에 걸려 안압조절을 해야 했던 남편이 술이 떡이 되어 집에 와서 안약 넣어달라고 해을 때 넣어주기 싫었습니다.
미웠습니다. 정말 미웠습니다.
남편이 떠나고 남겨놓은 안약병을 보고 그 때 안약 잘 넣어줄껄 후회했습니다.
미웠지만...
남편은 늘 저에게 사랑한다고 했기에 믿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제 옆에 있을 때 너무 행복했습니다.
어쩌다가 별 일 없는데도 전화 한통 해줄때 행복했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늦으면 늦는다고 말 한마디 해주기를 바랬습니다.
몇 달에 한 번 만이라도 평일 날 저녁을 같이 먹고 싶었습니다.
제 욕심은 그것 밖에 없었는데 그런 제가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죽고싶어요.
이 모든것을 끝내고 싶어요.
근데...아빠가 보고싶어도 엄마 울까봐 말도 못하는 아들때문에 몇 번을 죽으려다 마음을 돌리고 이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드라마에서 중환자실이 나오니까 아이가 눈과 귀를 가리더군요.
무섭다고...아빠가 생각나냐고 물으면서 둘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우리 아들...아빠를 사랑했지만 늘 멀리있던 아빠이기에 줄곧 아빠에게 존댓말을 하던 불쌍한 우리 아들...
아들때문에 죽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편이 너무 보고싶습니다.
나 당신 사랑했다고 너무 사랑해서 같이 있고 싶었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손톱, 발톱 깎아주고 귀지까지 청소해주어야 했던 아이 같은 내 남편, 내 친구가 너무 그립습니다,
떠난지 1년이 되어가는데도....
아들과 친정엄마만 아니라면 이 세상 정말 미련없는데...
모처럼 펑펑 울면서 쏟아내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