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게 말하면 대선 끝나고 한동안 82에 오지 않았어요.
마음이... 힘들어서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도 힘들었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
뿐인가요.
거리에 남은 현수막도, 아침마다 오던 신문도, 가끔이나마 보는 TV도...
모두 보기 힘들었어요.
웃고 떠드는 사람도 보기 싫었고, 네탓 남탓 하며 속상하다고 소리 높이는 사람도 싫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심한 사람도 싫었고,
저 역시도 그랬으면서 넋놓고 무기력하게 멘붕인 거 티 나는 사람도 신경질났어요.
그 와중에도 자식 새끼 밥 해먹이고 남편 와이셔츠 챙겨야 하는 비루한 일상도,
그렇다고 깊이 있는 책을 읽거나 좋은 음악을 듣는 것도 다 싫고 짜증나고 힘만 들었습니다.
뭔가 막 말을 하고 싶다가도
누굴 욕하고 싶다가도
함께 아파하는 이웃을 보며 힘내자 어깨를 두들기려다가도
오랜만에 취하도록 술을 먹다가도
울컥 울컥 신경질인지 화인지 분노인지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붙들려 며칠을 보냈습니다.
그러다 오랜만에 82에 와보니 당장 내일 힐링파티가 있다는 소식,
이미 12시가 넘은 시각이었으니 그 날 저녁이었군요.
스케줄이나 내 형편이나 준비할 것 같은 건 생각지도 않고
늦게 들어온 남편에게 선언하듯 말했습니다.
"나 내일 애들 데리고 벙커1 갈 거야. 늦을지도 몰라."
왜 그리 갑자기 꼭 가야겠다 생각했는지, 그렇게 가고 싶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준비도 없고 계획도 없이
그냥 마음이 달음질쳤습니다.
(네, 저는 늘 이런 식이에요. ^^;)
2살, 4살.
기저귀, 물티슈, 애들 컵, 여벌 옷, 혹시 몰라 간단한 장난감, 놀 데 없을까봐 캠핑매트, 유모차, 손수건,
모자, 장갑, 빨대, 과자 한 봉, 말린 사과 두 봉지, 휴지...기본적으로 애 둘 데리고 다니면서 필요한 많은 것들.
급하게 조린 닭봉 요리, 생협에서 산 식혜와 수정과. 그 날의 준비물.
트렁크에 싣고보니 여행 준비 수준.
시간이 다가올수록
가지 말까, 왜 가려하지? 함께 가는 이도 없이 나만? 이 애들이 도와줄까? 애들 없으면 민폐일텐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그쪽으로 몸이 움직이더란 것.
하지만 역시나
길은 헤매 벙커1 앞 골목을 몇 바퀴 돌고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없어 애 둘에, 짐에, 유모차... (유모차 지하로 내려주신 어떤 님, 감사합니다)
안면 있는 푸아님과 잠깐 인사 나누고 음식 좀 먹으니
애들은 낯설어 에미 품만 파고들고
작은 애는 그 와중에 똥을 두 번이나 싸주고
더이상 아는 이도 없어 멀뚱멀뚱
어찌어찌 두 시간 정도 지나 가야겠다 하는 그 순간. 뙇!
지갑에 현금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죠.
간신히 차를 대놓은 인근 유료주차장에선 분명 현금을 달라할텐데...
이를 어쩌나.
모자란 주변머리론 곁에 있던 이웃들한테 돈 좀 빌려달란 소리도 못하고
시간은 자꾸 지나 점점 시내가 막힐 시간이 다가오고
6시에 온다던 친구는... 남편이 늦게 퇴근했다며 더 늦는다 하고
용기 내어 다른 애기 엄마한테 돈 좀 빌리려 했는데
그 엄마도 현금이 없어 서로 민망. ㅠㅠ
왜 왔을까,
무얼 보자고 왔을까,
애 둘 딸린 처지에 무슨 힐링을 해보겠다고 이렇게 무리를 했을까,
모르는 사람하고 살갑게 얘기도 못 나누는 모지리가 왜 이런 모험을 했을까,
정치가 뭐고 선거가 뭐길래 미친년처럼 이렇게 무모하게 움직였을까...
점점 후회는 밀려오는데 애들은 이제 몸이 좀 풀리고 주변 아이들과 섞여 노니 가잔 소리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이러다 계획에 없이 봉도사까지 만나겠네.
아, 보고싶지 않은데...
보기가 힘든데...
그러다 친구가 늦게 도착해서 나를 찾아 왔는데
온라인상에서 사귄 그 친구.
만나는 순간, 둘이 말도 없이 와락!!!!
안는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되는 것 같은 이상한 경험.
비질비질 눈물이 나오는 것과 동시에 비실비실 웃음도 나오대요.
그래.
네 마음이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네 것과 다르지 않구나.
함께 아파하며 이 시간들을 견디고 있구나.
무언가를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아프지만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엄청난 힘을 줍디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 한 번의 격한 포옹이 많은 것을 풀어주더라구요.
가슴 속 단단히 뭉쳐 있던 무언가를
돌이 되어 남에게 막 던지며 지랄하고 싶었던 못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내지 못해 얹혀 있던 그 덩어리들이
스르르 물렁거려지더라구요.
그제서야 서로 말도 못 섞던 주변 분들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무대 위에서 천방지축 뛰어노는 웬수같던 애들도 이뻐보이고
점점 늘어가는 사람들도 남 같지가 않고
그렇게 마음이 풀려가더라고요.
제 첫번째 와락은 그렇게 짧은 찰나에 많은 것을 풀어 주었어요.
아프지만 병 들지는 않을 것 같은 기분을 그 때 느꼈어요.
참 신기했어요.
하지만 그래도 봉도사는 보고 싶지 않았어요.
볼 수가 없을 것 같았어요.
아이들 재워야하는 시간이라 시간도 늦었지만
정말 그 분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친구와 짧은 만남 후에 아이들을 태우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피곤한 애들은 카시트에서 잠이 들고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생각들이 스쳤습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에 남아있던 것은
김용민 교수가 말한 봉도사 근황 중 '와락 센터를 찾아갔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출소하고 거기부터 갔다던가, 아님 여기 오기 전에 거길 들렀다던가... 확실치 않지만
어쨌든 출소하고 인사다닐 곳도, 만나고 싶은 사람도, 해야할 일도 많을텐데
짧은 시간 안에 거기를 먼저 챙겼다는 소리가 무언가 묵직하게 화두처럼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어요.
힘들다고 아프다고 징징대던 제게 차가운 죽비처럼 내려치는 그의 행동.
그에게 너무 미안해서, 면목없어서
얼굴 보는 것조차도 힘들어하는 이 나약한 사람에게
그가 보여준 행동은
더 힘들고 절박한 사람들을 챙기는 일정들.
그러고보니 누구보다 힘들고 복잡할 문후보님도, 죽음으로 내몰렸던 노동자 빈소를 찾아갔다는 소식도 함께 떠올랐어요.
무언가 마음 속이 환히 밝혀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혼란스럽고 복잡하고 무겁고 애매하게 짓눌렸던 고통들을 헤쳐나갈 길이 보이는 듯 했어요.
억울함. 답답함. 결과가 주는 혼란.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그 덩어리들을 몰아내는 찬 물 한 줄기였어요.
정신차리라고.
누구의 탓도 아니고 무엇의 부족도 아니고
이렇게 천천히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이 과정을 보라고.
그저 우리는 그 과정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니
누구 때문에 졌다거나 무엇 때문에 실패했다 하지 말고
더 진보적으로 내 삶을 꾸려가면 된다고.
그럼 겨자씨만큼 세상은 또 진보한다고.
그러면 어느 날인가, 이겼다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그러고 보게 된 봉도사의 동영상,
내가 차마 볼 수 없었던, 그래서 피했던 그 자리에서 그가 했던 말.
그거 보고 빙그레 웃음을 떠올렸습니다.
그래, 우린 이렇게 멋있는 사람들이었어. ^^
오랜만에 묵직함을 내려놓고 잠을 잘 잤어요.
아침에 방바닥을 걸레질하면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문재인을 닮고 싶다'
정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정치에 관심은 좀 있는 녀자였는데 ^^;
한 번도 정치인 누구를 닮고 싶다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지지하거나 존경한 적은 있어도 그 사람을 닮고 싶다 생각하진 않았어요.
문재인 비슷하게 살려고 노력하자.
쉽게 들뜨고 쉽게 실망하지 않으며
산을 옮기는 우공처럼 담대하고 당당하게 소박해도 끈질기게.
그게 그를 알게 되고 지지하고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었던, 나의 진심에 대한 최소한의 자존심이며
앞으로도 이 나라에서 내 아이들과 살아가야할 나의 작은 다짐이 되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너 때문이라고 비난이라도 해야 풀릴 것 같은 억울함,
누구에게라도 휘두르고 싶었던 칼날,
그럴리 없다고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
선거 과정에서 너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열심히 참가했다는 같잖은 우월감,
그래서 나는 선이고 너는 무식이며 악이라는 아집,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게 문재인을 알고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 가짐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해버렸네요.
선거 기간 동안 우리 곁에 왔던, 하지만 언제나 늘 함께해왔던 걸 모르고 지냈던
많은 슈퍼스타들. (마지막 정점은 표교수. ㅎㅎ)
그들이 내 편이라고 그냥 기분 좋고 반갑고 으쓱댈 것이 아니라
그 분들과 조금이라도 닮아보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도 잠깐 했고요.
발바닥 만큼 밖에 못 쫓아가겠지만요. ^^
패배의 원인을 살펴보고 표를 분석하고 앞날의 계획과 비젼을 세우고...
그런 건 많이 배운 분들이 다양하게 하시니까 ^^;
오늘 하루 내 삶에서 좀더 깨어있고 좀더 진보적으로 살(지는 못해도)려 노력하자.
그게 작지만 위대한 나의 몫이라 착각하렵니다.
* 주차비 내준 친구, 으스러지도록 꽉 껴안아주어 정말 고마웠어.
그 순간부터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 많은 것들이 풀리고 많은 것들이 밝아졌어.
백 마디 말보다 그 '와락'이 중요했다는 걸 몰라서
며칠을 고생했네.
나도 자기 꽉 안아주었으니
이제 그만 아파하고 뚜벅뚜벅 힘차게 살자. 응?
어제 말한대로 날 풀려 꽃이 피면 웬수같은 애들 데리고 도시락 싸서 봄빛을 만끽하자.
고마웠고, 또 고마웠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