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루한 글일 것 같습니다.
나이 마흔이면 살아온 인생이 길고 지루한 스토리 한 권쯤 나오죠.
이글을 시누가 봤으면 합니다.
다소 일방적으로 수위 높을 제 격앙된 목소리를 너그럽게 이해 부탁합니다.
이하는 제가 처음으로 제 시누에게 도발하고 선포하는 글이니 정말로 피를 토하는 제 심정을
지루하지만 양해 바래요.
결혼하고 두달만에 부도가 났을 때, 당신 오빠가 내게 도망가라 등떠밀었을 때...
그때 내가 도망가야 했었다.
그랬으면 오늘날 내가 이꼴을 안봤을 테니 말이다.
여지껏 한사코 당신 오빠가 자신을 봐서라도 참아달라 재삼 재사 당부하길래,
내가 참았다. 그게 내 신랑이라서.
결혼하고 두 달만에 부도가 났고,
나는 그 다음달에 직장을 잡았지.
경력이 부족하다는 의구심에 미칠듯이 괴로웠다만
당신이 알다시피 나는 결혼 전 직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비슷한 분야로 이직을 했었다.
왜? 내 직장사람들에게 당신 오빠 얼굴 팔기 싫고, 내 상황에 위로받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
조금 생소한 분위기의 직장에서 적응하느라 힘에 부쳤지만,
그리고 바로 당신 오빠의 월급에 차압이 들어와서 한참을 내 월급으로 꾸리고 살았지만
나 진심으로 단 한번도 당신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다.
넌 그때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고 공황장애라니 우울증이라니 하면서 백수 였다만,
난 우울증을 앓는 신랑과 시모를 챙기며 필사적으로 호구지책에 매달렸었지.
그때에 온 집안에 돈 버는 사람은 당신 오빠와 나, 둘 뿐이었다.
나보다 나이 많고, 나보다 아랫사람인 니가 용돈을 달라 옷을 달라 할 때,
나 그때도 널 원망해본적이 없어.
묵묵히 나눠주고 같이 쓰면서도 말이다.
어느 날이었다.
철저하게 피임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덜컥 덜컥 잘도 임신을 하더군.
그 때 당신 오빠 월급이 차압 빼고 실수령액 백십만원일 때.
내 월급이 실수령액 삼백이 넘어서던 그 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삼일을 고민하다가 두번 째 아이를 지웠다.
서러워도 내색없이 수술 후 한 달이나 휴무도 없이 입이 부르터서 근무하던 날에 니가 왔다. 내 집에.
그리고 니가 내 동생의 옷을 가져갔지.
그동안도 내 집에 와서 니가 올리브유 한 병, 세제 하나, 입에 담기 민망하게 소소한 생활용품들을
말없이 가져갔지만 나 그 때는 못참겠더라.
딸자식 시집가서 두달 만에 그 사단이 났다고 노한 친정을 잠재우느라 애쓰고,
두번씩이나 중절수술을 하면서도 아이를 꿈꾸지 못하고,
사채빚 때문에 혼인신고를 꿈꾸지도 못하는 내게 미래는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수 밖에...
그런데 니가 그리 혼란스러운 틈바구니에서 기어이 어깃장을 놓았어.
하도 야속해서 그래, 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게 그리 잘 못이라서 사흘을 전화를 안받더라며 감히 시댁을 어찌 보는 거냐고 전화로 사정없이 쏘아붙이더구나.
그래도 나는 세번을 참았다.
"전화 끊어욧!" 니가 말했어.
삼 세번을.
내 하도 네 하는 짓이 기가 막혀서 아무말 없이 전화가 끊길 때까지 기다렸지.
알고 있나?
그 날이 네 두번째 조카가 세상 빛도 못보고 임신 5주만에 가버린지 일주일이 안지났던 때다.
그들이 컸으면 각각 열 두 살, 열 살쯤 되었을 게다. 그들의 생일은 11월이야.
전갈자리쯤 될게다...
게다가 그 날은 네 아버지의 일을 처리하느라 사채업자에게 차를 넘겨주고 둘이서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던 날이다.
내가 되바라졌다고?
니가 그 꼴을 당해봐라.
사람 안미치고 배기나.
내가 안미치고 살아남은 이유는, 네 오빠 무너지는 게 가슴이 아파서 이 악물고 버텼다.
그런 네 오빠가 결혼 육년차에 바람이 났더구나.
느이 집안의 그 완벽한 장남이 말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해방이 되니 자기가 잠시 미쳤었나보다고 하더구나.
사람 미치고 환장할, 그야말로 애간장이 타는 그 상황에서 나 석고대죄하라는 말 들었다.
네가 나를 그리 짓고 까불 때 나 돈 버느라 시모 신경 못썻더니
오빠와 여동생이 저리 된 것이 내 탓이라고 하더구나.
그 난리통에 오밤중에 카드값 삼백만원 갚아달라고 울고 불고 소리치던 너를,
내가 오빠에게 일러바쳐서 이간질을 시켰다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찌보면 내가 참 운이 좋은 것인지...
네가 그간 내게 테러를 저지를 때마다 느이 오빠가 옆에서 죄다 지켜봤단다.
그런 느이 오빠가 널 멀리하는 게 내 탓이라고?
천만다행으로 그래, 우리 결혼 십이년 차에 니 눈이 휘둥그레지게 부자가 되었다.
그 안에 나는 중절 수술 두번, 암 비슷한 수술 두번을 했지.
자살 미수 세번.
우울증 치료 2년 간 세번.
이런 내게 니가 착한 척 쇼하지 말라고?
내가 착한 척 하면서 시댁 식구들을 이간질해서 자리를 잡고 있다고?
웃기지 마.
나, 시작도 안했어.
니가 약이 빠짝 올랐나보다만,
내가 널 봐준 이유는 이상적인 가정을 꿈꾸었던 내 욕심이라는 것을 알아라.
이제부터는 적극적으로 해명을 할게다.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포섭을 할거고,
진흙탕 싸움도 마다 안할거다.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서슴 없이 망설임 없이 널 탓할 거다.
왜 여지껏 참았느냐고?
내 신랑이 불쌍해서 그랬다.
아버지때문에 십자가를 진 그 삶이 너무 안스러워서 묵묵히 같이 버텼다.
대체 니가 누구 탓에 시집을 간게냐.
난 시집올 때 내 어미에게 단돈 십만원의 원조 없이 왔어.
네가 가져간 그 삼천 백만원,
네가 시집간다고 인사올 때 네가 메고 온 루이** 신상 백.
대체 누가 해줬다고 생각하는 게냐.
내 스스로 착하다 말하지 않겠다.
다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넌 늘 어깃장을 놓고 떼를 쓰고 네 것만 챙겼다만 난 그렇지 못했다.
적어도 나는, 최선을 다했어.
숨이 안쉬어질 만큼 힘든 시간이었고,
이제 나이 마흔에 자식없이 참 허허로운 삶이다만.
내가 여직 널 참고 인내했던 것은, 네 오빠 때문이었다.
이제는 나도 살아볼라고.
각오해라.
니가 지금은 빠짝 약이 올랐다만,
난 아직 시작도 안했어.
올 추석에서야 마음이 정해져서 제대로 너와 붙어 보려구.
십이년을 한결같이 좋은 마음을 품었던 그 간의 내 모습에 감복한 네 오빠를 이용해서 말이다.
꽤... 힘든 싸움이 될게다.
갈팡질팡 고민하던 그 순간엔 죽고 싶었다만,
이제 나도 살려구.
내가 폭로하기 전에 니가 자복해라.
내가 싸울 줄 모르는 순둥이라면 이만큼 올라왔겠어?!
더더군다나 나는 시작도 안했는데 말이다.
자승자박, 결자해지라 했다.
네가 묶은 매듭, 느이 오빠를 위해서 풀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