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승만 평전
'12.8.22 6:30 PM
(121.162.xxx.111)
여기서는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를 전부 취급할 수는 없고, 지금까지 비교적 덜 알려진 친일행적과 독립운동으로 분칠된 내용을, 그리고 비민주적인 행적을 요약해서 정리하고자 한다.
반민족ㆍ비민주행적 사례
(1) 1899년 1월 독립협회를 이끌면서 반정부투쟁을 벌이다 구속돼 서소문감옥에 갇힌 이승만은 탈옥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기형으로 감형돼 1904년 8월 9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지원으로 5년 7개월 만에 출감했다. 이 기간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고, 많은 독서를 하면서 등을 저술하고 80여 편의 논설을 썼다.
(2) 출감하여 상동교회 부설 청년상동학원의 교장(3주)을 지냈다. 미국 미네소타주의 미니에폴리스에서 열리는 기독교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그의 출국을 주선한 사람은 친일파로 소문난 미국인 감리교 감독 헤리스였다. 총독부가 발급해준 여권으로 고국을 떠났다. 이때 민영환ㆍ한규설이 미국정부에 보내는 밀지를 지참했다.
(3) 워싱턴에서 존 헤이 국무장관을 만나 민영환ㆍ한규설의 밀서를 전하고 한ㆍ미수호조약의 이행을 촉구한데 이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면담했으나, 루스벨트의 특사 테프트와 일본수상 가쓰라 비밀협정체결로 한국독립 보장의 성과 얻지 못했다.
그러나 루스벨트 면담, 독립청원 등 미국 신문 보도가 국내에 전해지면서 ‘청년지사’로 알려졌다. 당시 ‘일진회 대변인’이었다는 기사가 (1905.8.4)에 게재됐다.
(4) 미국에 눌러앉아, 미 기독교계 인사들의 주선으로 조지 워싱턴대학에 입학했다. 인문분야는 우수했으나 수학ㆍ경제학은 불량했다. 이어서 하버드대 입학, 미 선교사들은 한국 선교 목적으로 그가 종교지도자가 되길 원해 적극 지원했다.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으로 박사학위, 1776년부터 1872년까지 미국이 국제법에 규정되어 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던 전시중립을 다룬 내용.
(5) 하버드 재학중 1908년 스티븐슨을 처단한 장인환 의사의 통역 의뢰를 받고 “예수인 신분으로 살인재판을 통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 교민들의 분노와 반이승만 여론이 확산되었다. 이후에도 이봉창ㆍ윤봉길의사 등 의열투쟁을 비판.
(6) 주한 미국 선교사들의 요청으로 1910년 10월 5년만에 귀국, 한국은 이해 8월 29일 일제에 병탄. 1912년 초까지 YMCA 학생부ㆍ종교부의 간사로 근무, 한국 체류 5년 동안 민족문제, 독립운동 관련은 외면, 오히려 “반일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유학을 통해 많은 지식을 갖게 되었다.”고 발언하는 등 반일보다 해외유학을 권려했다.
(7) 총독부가 1912년 데라우찌총독 암살사건을 조작, 신민회간부와 기독교 지도자 등 900 여명을 구속하고 이 중 105명을 기소하는 등 ‘105인사건’의 와중에 미국인 친일 목사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 이때 많은 애국지사들이 혹독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되고, 해외 망명을 택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옥중에서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도움으로 네브라스카주 체스팅스의 소년병학교를 방문했다. 이 무렵 회견에서 “(병탄이후) 불과 3년이 지나기도 전에 한국은 낡은 인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떠들썩한 산업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모했다.”고 일제의 식민통치 정책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1912년 후반까지 뉴저지주 YMCA에서 있다가 박용만의 주선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에 정착했다.
(8) 당시 하와이에는 8천여 명의 교민이 살고 있었다. 교민들은 ‘105인사건’은 피해왔다고 불만. 이승만은 를 발행하고, 잡지와 선전책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무력항쟁과 의열투쟁을 비판하여 교민들의 항의를 받았다. 교민사회가 분열되고, 대한인국민회의 주도권 싸움으로 대조선국민군병단의 박용만 축출, 이때부터 무장투쟁론과 외교론이 대결하게 되었다. 트러블 메이커로 알려졌다.
(9) 1919년 초 제1차 대전 전승국들의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시도했으나 좌절, 스승인 윌슨 대통령의 면담도 좌절, 강화회의에는 상해 한국독립당의 김규식이 참석했다.
(10) 정한경과 1919년 2월 25일 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 “연합국 열강이 현 일본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국제 연맹의 위임통치에 두는 조처를 해달라”는 내용. 측근 정한경은 국내의 3ㆍ1운동 뒤에도 미국 신문에 쓴 (뉴욕타임즈)에서 일본 대신 미국의 통치를 요청했다.
(11) 국내의 3ㆍ1운동 소식 듣고 3월 14일~16일까지 서재필ㆍ윤병구 등과 필라델피아에서 독립기념관까지 가두시위, 등을 채택.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추대되었다. 한성정부는 실체적 조직보다 ‘지상정부’의 성격이었다. 소수인들이 모여 구성. 언론보도로 과대포장되었다. 여기서 그는 집정관총재에 추대되었다. 이 때문에 한성정부를 정통정부로 인식했다. 이후 집정관총재직을 대통령으로 행세한다.
(12)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선출, 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투쟁론자들이 ‘위임통치론’을 들어 반대했다. 그는 미국에서 여전히 대통령으로 행세, 임정에서 시정을 촉구했으나 듣지 않았다. 1919년 8월 상해임시정부가 한성정부, 블라디보스톡의 국민의회정부와 통합하면서 개헌을 통해 대통령직제로 개편할 때까지 미국에서 프레지던트로 불리며 행세했다.
(13) 1년반 만에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 정부운영 방안ㆍ항일투쟁 방책없어 임정 내분이 격화되었다. 이동휘ㆍ안창호ㆍ김규식ㆍ신채호ㆍ박용만 등 임정과 결별. 이때 만주에서는 청산리전투와 봉오동전투 등 무장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현실성이 없는 외교론만 주장했다.
(14) 1921년 5월 29일 1년반 만에 다시 임시정부를 떠나 미국행, 워싱턴 D. 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했던 김규식이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5) 1922년 2월 하와이로 귀환하여 이듬해 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 남녀학생 20명으로 을 구성하고, 일본 총영사관과 교섭 끝에 일본여권으로 한국을 방문케했다. 명색이 임정 대통령신분으로 한 일이다. 이때 하와이의 한 강연에서는 청ㆍ일 전쟁 당시 일본군이 모범적이라 찬양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비반일, 친일적 발언의 사례를 찾아본다.
△ 1915년 신문에 “자신은 한국은 물론 하와이에서도 혁명운동을 꿈꾼 적이 없다”고 언급.
△ 1915년 에 “우리는 어떤 반일적 내용도 가르치지 않는다. 정반대로 우리는 전 인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나는 우리 백성들이 어떠한 반일감정도 일으키지 않길 바란다”고 기고.
△ 1919년 일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한국에 자유를 준다면 일본에 감사하고 우정을 느낄 것이고, 거절한다면 일본은 정복자로서 불신과 멸시를 받을 것이다.”라고 언급.
△ 1922년 9월 하와이 귀환 회견에서 “대일전은 불가능하며 새로운 총독이 개혁을 단행해 한국인들의 성원을 얻고 있다”고 언명.
(16) 임시정부의정원은 1922년 6월 17일 1주일간의 토론 끝에 재적 3분의 2의 찬성으로 이승만 불신임안 결의, 정부수립 6년여 만에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었다. 다음은 ‘불신임’ 이유 5개항이다.
① 임시 대통령 피선 6년에 인민의 불신임이 현저하여 각지에서 반대가 날마다 증가되며 그 영향이 임시정부에 미치는데 민중을 융화하지 못하고 감정으로만 민중여론을 배척하는 까닭에 분규와 파쟁이 조장되고 독립운동이 침체상태에 빠져 있다.
② 임시 대통령 이승만이 대미 외교사업을 빙자하며 미주에서 동포들이 상납하는 재정을 수합하여 임의 사용하였고, 정부 재정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국제연맹과 열강회의를 대상으로 하던 구미위원부 외교사무가 중단됨에도 불구하고, 헛된 선전으로 동포를 유혹하여 외교용 모집을 계속하여 그 재정으로 자기의 동조자를 매수하고 있다.
③ 국무위원이 총사직을 제출하였으나 임시대통령이 그 사직청원서를 처리하지 못하고 몽매한 처사로 여러 번 국무총리를 임명하였는데 당사자가 알지 못하게 단독적 행사를 하여 혼란을 계속할 뿐이고 아직도 정부를 정돈하지 못하고 있다.
④ 국무위원은 총사직을 발표한 다음 아직도 거취를 작정하지 못하고, 다만 임시대통령의 처사를 기다린다고 하여 곤란한 시국에 대책 없이 앉아서 감정적 행동으로 정부위신을 타락시키고 있다.
⑤ 이상의 사실이 임시대통령과 국무원 불신임안 제출의 이유다.
(17) 1923년 이봉창ㆍ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크게 비난하면서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에 따르면 이승만은 ‘비밀사절’을 상해 임정에 파견하여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토록 설득했다. 이봉창ㆍ윤봉길의거가 한국독립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고,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 밖에 주는 것이 없다는 주장.
(18) 상해 임시정부는 1925년 4월 10일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이에 불복하여 윤치영 등을 시켜 명맥을 유지하면서 임시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하는 성명 발표했다. 하와이 체류 중에 한인사회단체를 자기중심체제로 바꿔 교민사회 분열, 대한인동지회를 개편하여 자신이 ‘종신총재’에 추대되었다.
(19) 중ㆍ일전쟁의 발발로 국제정서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1939년 10월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구미위원부의 인정을 요구, 임시정부는 미ㆍ일 전쟁이 임박해지자 1941년 6월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임정의 주워싱턴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20) 미ㆍ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활동을 개시했다. 이승만과 한미협회는 1943년 3월 미정부에 임시정부의 인정을 요구했으나 미 정부는 거부했다. 한인연합회 하와이지부 등 한인 사회는 임정에 이승만의 소환을 요청했다. 이유는 교민 사회의 불화ㆍ분열을 주동한다는 것. 미 정부의 한국 임정 승인 거부에는 미주 한인사회의 분열과 이승만에 대한 불신도 작용했다.
(21) 일제의 패망이 내다보이고 미국 한인사회에서 이반된 자신의 조직을 복원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미주한족연합회가 중경임시정부에 자신의 해임을 요구하는 시점인 1944년 6월 4일 주미외교위원부 산하에 내무ㆍ경제ㆍ교육ㆍ정치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별도의 임시정부를 설치하려다 교포들의 반발로 무산.
(22) 임정 승인문제로 이승만과 부딪히고 있었던 미국무부는 이승만이 참신한 계획이나 대안 없이 일방적인 요구만을 되풀이하는데 거부반응을 갖고 있다. 군사적 지원문제로 이승만과 접촉하고 있던 정보전략국은 그가 제시하는 계획의 신빙성과 실행 능력에 대하여 회의적이다. 이승만에 대한 재미한인 사회의 비판적 평가가 편지검열과 면담을 통해 속속 입수되었다. 예컨대 북미국민회가 임정에 보내는 긴급 전문이 국무부 극동국에 입수되었는데, 내용은 이승만의 ‘이기적 야심’과 ‘무책임한 선동’ 그리고 ‘외교적 무능력에 대한 비판이다.
(23) ‘일본의 진주만 폭격’을 여러 차례 경고하는 등 미국 사회에서 매스컴의 총아가 된 재미한족연합회의 한길수를 공산주의자, 이중 첨자라고 매도하며 축출하는 등 한인사회의 분열상을 내보였다. 이는 미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24) 재미 교포사회의 유능한 실업자 한순교, 국무부와의 접촉에서 “이승만이 전반적으로 상황판단의 능력이 부족하고 상황판단이 좁기 때문에 그의 주위에는 최상급의 능력있는 한인들이 모이지 않는다. 이승만이 국무부로부터 냉대를 받게 된 배경에는 한인사회의 비판적 분위기 때문이다.”(미국무부 자료)
(25) 1945년 7월 말 태평양전쟁을 이끌고 있는 맥아더에게 전문으로 강력한 반소ㆍ반공입장을 전달, 맥아더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으로 귀국 서둘렀다. 중경의 김구보다 먼저 귀국을 위해 맥아더 접촉에 성공했다. 그의 주선으로 9월 16일 군용기를 타고 일본을 거쳐 하지와 함께 귀국. 도쿄에서 맥아더ㆍ하지와 한국문제에 대해 요담. 미군장교복장으로 귀국(윤치영 증언).
(26) 1945년 10월~11월 ‘선구회’라는 단체 여론조사, ‘가장 뛰어난 지도자’의 설문에 여운형 33%, 이승만 21%, 김구 18%, 박헌영 16%, 이관술 12%, 김일성 9%, 퇴현배 7%, 김규식 5%, 서재필 5%, 홍남표 5%의 순위.
대통령적합 인물에는 이승만 431명, 김구 293명, 여운형 78명, 기권 176명이고, 최고혁명가 여론조사에는 여운형 195명, 이승만 176명, 박헌영 168명, 김구 156명, 허헌 78명, 김일성 72명의 순위였다.
이승만의 선호가 높은 배경은 1941~42년 사이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OWL가 방송한 방송과 미정보조정국의 요청으로 행한 한국어 단파방송의 영향 그리고 미군정체제에서 ‘미국이 지원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27) 귀국 뒤 공산주의 우호발언, “나는 공산당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습니다.”(매일신문. 45. 10. 26), 미군정의 공산당 불법조치로 극렬 반공주의자로 다시 선회했다.
(28) 1946년 6월 3일 ‘정읍발언’으로 단정수립을 처음으로 주장하고, 김구ㆍ김규식 등의 남북협상 방안에 반대했다. 46년 말 미군이 제공한 군용기로 미국에 건너가 6개항을 제시하고, 미국의 반소 정책을 촉구하는 등 대미활동.
(29) 1948년 5·10총선에서 동대문 갑구에 출마, 독립운동가 최능진의 입후보를 봉쇄하고, 6ㆍ25전쟁기에 내란음모 혐의로 총살형, 정치보복 제1호 희생자, 철학부재ㆍ정책부재의 비판을 피하고자 ‘일민주의’를 내걸고 국민을 일원체제로 묶고자 시도.
(30) 제헌헌법 내각제 시안을 대통령제로 바꾸게 하고 초대 대통령 당선, 반민특위 해체하고, 김구 암살 배후 의혹. 국회프락치사건도 의혹투성이, 정치보복자행.
(31) 제주 4ㆍ3사건 발발하자 계엄법률제정 이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무회의에서 “강력히 처벌하라”고 지시하여, 2만 5천~3만 명의 희생자 발생. 제주 4ㆍ3사건, 여순사건 등 빌미로 국가보안법 제정, 정적 제거와 언론 탄압에 활용했다.
(32) 측근 신성모 국방장관의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타령만 믿고 안보 소홀, 6월 24일 저녁 군 수뇌부는 육군장교클럽 개관식 파티, 전 장병에 외출, 외박 휴가 실시, 6ㆍ25 전면 남침 6시간 뒤 경회루에서 낚시 도중에 보고 받고, 긴급국무회의는 전쟁 발발 10시간 뒤에야 열려. “국군 서울방어” 라디오 녹음 틀어놓고 6월 27일 국회가 수도사수를 결의한 지 1시간도 안 되는 새벽 2시 국회와 육본에 통보 않고 피난. 한강철교 폭파, 4천명 이상 현장에서 희생, 서울시민 피난길 막히고 3개 사단 병력을 적수중에 남겼다. 피난길에 김구 암살범 안두희 석방.
(33) 6ㆍ25 직전 정부는 북한군 남침정보 갖고도 방치한 의혹이 많다. 북한에 첩보원 보내 정보 입수, 육본정보국산하 작전정보실 보고서, 측근 임영신의 개인적 첩보원보고서 등, 적 남침예상을 방치.
6ㆍ25전쟁 직전 이승만은 정치적 궁지에 몰렸다. 제2대 총선 결과 위기 국면, 전쟁 발발하지 않았다면 1952년 제2대 대통령당선 불가능. “전쟁을 정치적 기회”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서.
(34)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 한강철교 폭파해놓고 잔류 서울시민들에게 ‘부역혐의’로 탄압, 보도연맹원 수십만 명의 학살 등 6ㆍ25 전후 100만 명의 민간인 학살에 정치적 책임.
(35) 1950년 7월 15일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을 보내 한국군의 지휘권을 미군에게 이양, 시효도 명시하지 않아 62년이 되는 현재까지 ‘전작권’을 미군에 넘겨줘.
(36) 3.8선을 경계로 휴전이 성립되면, 정치적 추궁이 무거워 회피용으로 맹목적인 휴전반대운동 전개,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으므로써 주권문제 훼손, 향후 평화협정체결 과정에서도 한국이 배제될 위기.
(37) 피난수도 부산에서 야당의원을 감금한 채 대통령직선제 개헌감행하여 장기집권 획책, 이후 발췌개헌. 사사오입개헌. 보안법파동, 라이벌 조봉암 사법살인, 장면 암살 미수, 3ㆍ15 부정선거 등 영구집권을 위해 헌법유린, 민주주의 파괴.
(38) 1954년 7월 28일 미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제3차 대전을 촉구하는 초강경 연설, 북한은 물론 중국과의 결전, 소련과의 전쟁 벌일 것을 촉구하면서, 한국군 20개 사단 제공 용의 밝혀, 는 “불행한 연설”이라 비난, 이승만 “일생일대의 가장 큰 잘못”이라 올리버에게 서신.
(39) 경제정책의 실패, 미군기의 폭격으로 전국토가 초토화된 북한보다 경제적 낙후, 반공체제 유지를 통해 독재채제를 강화하고 냉전의식 고취, 평화통일론 탄압, 그의 북진통일론은 ‘통일의 외피를 쓴 반통일론’이란 평가. 경향신문 폐간 등 언론탄압.
(40) 3ㆍ15 마산의거를 ‘공산당의 조종’ 담화. 4ㆍ19시위를 ‘난동’이라 담화. 매카나기 주 한미대사에게 “장면의 조종으로 학생시위”라고 왜곡하는 등 시민혁명을 모독. 3ㆍ15에서 4ㆍ19혁명까지 200여 명의 사망과 수천 명의 부상, 정치적 책임.
(41) 대국민 사과 없이 망명,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 박정희는 국민장 추도사에서 “조국근은 대화의 상징적 존재”라고 극찬. 박정희의 남로당 사건 당시 사형을 무기로 감형, 6ㆍ25전쟁 발발하자 군에 복귀시켜 주는 등 시혜를 베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