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 내 마음의 책임면제철
2012.5.23
스스로에게 아픈 질문 하나를 던진다. 내게는 <책임면제철>이 없는가? 이번 총선의 패배에 대한 나의 책임면제철은 ‘나는 지도부가 아니었다’ 라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당 대표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내 책임에 대해서는 눈을 감은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 역시 책임면제철을 사용한 적이 꽤 있었다. ‘내 탓이오’가 아닌 ‘네 탓이오’ 라고 미루고 책임을 회피한 순간들이 떠오른다.
나는 민자당 소속으로 국회에 들어가서 당명이 바뀌는 데 따라 신한국당, 한나라당에 있다가, 지난 2007년에 탈당하여 잠시 “선평연”을 조직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만들다가 지금의 민주당에 합류했다. 한나라당 전력이 지금에 와서는 ‘주홍글씨’가 되어 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그 ‘주홍글씨’가 자주 나를 아프게 만들었다.
유신체제가 끝날 때까지 나의 삶은 온통 박정희 독재와 정면으로 맞서 싸운 고난의 길이었다. 감옥 가고, 고문당하고, 수배 생활 속에 위궤양에다, 허리, 목 디스크까지 얻고…… 정보부와 시경, 치안국 분실, 동대문 경찰서를 옆집처럼 드나들었다. 20대와 30대의 모든 청춘을 오직 민주주의에 바쳤는데 어쩌다 ‘한나라당’이라고 하는 원죄에 갇혀 꼼짝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지나온 삶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는다. 후회한다고 해서 지나온 시간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직선적이고 성찰은 곡선적이다. 아무리 성찰을 통해 과거를 돌아본다고 해도 이미 흘러간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짚고 지나가기는 해야 한다.
서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1993년 봄, 광명에서 보궐선거가 있었다. 광명시는 과거 경기도 시흥군 서면으로, 내가 태어난 동면의 옆 동네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서면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셔서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직후. 당선 직후부터 안가 철폐다, 청와대 앞길을 개방한다, 인왕산을 개방한다, 하나회 척결이다, 부패 정치인 구속이다, 토사구팽이다 등등 개혁의 열풍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였다. 뒤이어 시행된 금융실명제도 이미 예견되고 있던 때였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90%를 넘기고 있었다. 내 마음은 설렜다. 나도 정치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꿈틀댔다. ‘개혁’이라는 명분이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망을 자극한 것이었다.
주저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김영삼 정부가 아무리 최초의 ‘문민’정부이고, YS가 DJ와 함께 민주화의 양대 산맥이라고는 하지만, YS정부는 군사독재의 산물인 노태우의 민정당, 김종필의 민주공화당과의 3당합당으로 태어난 민자당 정권이 아닌가? 더구나 개인적으로는 서강대 재직 당시 김대중 후보를 강의에 초청해 통일에 관한 특강을 청해 들은 일까지 있었다. 김대중 총재는 대선 패배 후 나를 동교동 자택으로 초청하여 조찬을 나누며 강의 초청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했고, 나는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총재에게 그동안 닦아온 뜻과 경륜을 펴지 못하게 된데 대해 아쉬움을 표해 경의를 다했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고 선택은 빨랐다. 그동안 내가 고민하고 투쟁해 온 뜻을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고 싶었다. 당시 운동권 선후배들이 13대, 14대 국회에 이미 진출해 있었지만, 솔직히 내가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청춘의 날들을 오직 투쟁의 시간으로 채웠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민주주의는 왔으니 더 넓은 세계를 보겠다고 영국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왔으니 이제 그 포부를 펼쳐 보이고도 싶었다.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정치적 욕망이 보궐선거를 계기로, 개혁을 명분으로, 분출한 것이었다. 김대중 총재의 정계은퇴 선언이 민자당으로 가는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스스로 덜어내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욕망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하여, 욕망을 악의 영역으로만 분류해버린다면 세상에는 마하트마 간디 같은 성인만 존재해야 마땅하다. 나를 포함한 보통의 사람들은 욕망을 가진 존재들이다. 욕망에는 선악이 존재하지 않고, 욕망의 내용과 목표가 선한가 선하지 않은가만 있을 뿐이다. 물론 그 당시의 내 욕망이 선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국회의원이 되고 싶었던 욕망이 있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게는 또 하나의 욕망이 있다. 이제는 제발 그 ‘주홍글씨’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 말이다. YS 정권 초기의 개혁 열풍 속에서 민자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문민대통령으로서 지난 정권과 분명한 차별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차별성은 희석되었다. 특히 YS가 힘이 빠지고 구 민정계 세력이 당의 중심이 되면서 개혁은 퇴색하고,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수구적, 권위주의적 행태가 되살아나면서, “개혁 위해 나섰다”는 나의 선거 구호는 빛바랜 휴지 조각이 되었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도 한참 건넌 뒤였다. 나는 이미 진영논리에 깊이 빠져들어 있었고, 그 진영 내에서 생존하고 성장하기에 급급했다. 한나라당의 모든 것은 선이었고 대선 출마를 다시 선언한 DJ는 악이었다. 정치는 여야 대결구도라는 논리 속에, 내가 처한 상황에 충실한 것이 나의 정치적 언행의 유일한 기준이 되고 있었다. 대변인으로서의 손학규는 김대중과 야당을 갖은 논리로 공격하는데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 보였다. 상황논리 속에서 나 자신의 합리화에 급급할 뿐 만 아니라, 스스로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상황을 만들어 나갔다.
진영논리나 상황논리는 성찰을 가로막고 책임을 변명으로 돌리기에 가장 쉬운 논리적 근거로 작용한다. 진영과 상황에 갇혀 있으면 다른 게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최면술에 홀린 것처럼 자기정당성만 강조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보면 분명히 부당한데 본인은 자기정당성의 논리 안에 갇혀 책임을 면제받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스스로를 보수 안의 진보라고 규정하고, 한두 가지 진보적, 개혁적 언행을 방패로 내 안에 자기정당성을 구축하려 했던 것이었다. 한나라당에 있으면서도 제왕적 총재에 반대해 당내민주화를 앞서 주장하여 당의 주류로부터는 왕따를 당했고 지도부로부터는 핍박을 받았으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경기도지사의 위치에 있으면서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찬성하고, ‘햇볕정책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만으로 나는 내 마음 속에 책임면제철을 쓰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는 2007년, 내가 걸어왔고 걸으려했던 본래의 나의 길을 가기 위해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지금의 민주당에 합류했다. 그것으로 그때까지, 아니, 지금까지 써 온 책임면제철이 깨끗이 지워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나는 책임면제철과 상관없이 내가 걸어온 길을 성찰하며 앞으로 걸어갈 길을 무겁게 응시해본다. 그리고 다짐한다. 내가 걸어왔던 길을 지금의 상황논리에 묶여 억지로 부정하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또 다른 책임면제철을 쓰는 위선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책임면제철이라는 내면의 자기옹호를 버리겠지만 과거의 선택을 모조리 부정하는 위선자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에는 자기희생과 헌신의 구간이 분명이 존재한다. 그 구간은 내 청춘의 전부에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또 나는 앞을 본다. 내가 가야할 길이 비록 가시밭길을 맨발로 가야만 하는 길이더라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다. 아직 가지 않은 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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