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대표단 회의를 끝으로 통합진보당의 대표직을 사퇴하셨으니 이제 대표님 대신 어떤 호칭을 불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한 달 반쯤 전, TV토론을 어떻게 잘할 수 있는지 여쭤봤던 저를 따로 부르셔서 이런저런 것을 가르쳐주시던 그 때, ‘김재연 동지’라고 불러주시던 것을 기억합니다. 후보라는 평범한 호칭을 대신한 ‘동지’라는 표현에 청년 후대를 아끼시는 진심이 담겨있는 듯 하여 참으로 감사했었지요. 아직도 저를 동지로 생각하실지, 그렇게 불러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 글을 드립니다.
제가 당의 비례대표로 선출되고 얼마 후 <100분 토론>에 출연했을 때, 청년비례대표 선출 과정에서의 조작의혹에 대한 질문을 받았던 것을 거론하시며, 그런 질문에는 이렇게 대처해야 한다면 친절하게 노하우를 알려주셨지요. 그 때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김재연 동지는 공직자입니다. 우리 당의 비례 3번이면 이미 당선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선출과정에 대해 일부 의혹을 제기하는 얘기들이 있더라도 이제 김재연 동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공직자답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국민적 신망을 한 몸에 받고 계시는 당 대표님의 이 말이 저에게는 보증수표처럼 여겨져서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기됐던 조작의혹을 해명하기 위해 꾸려졌던 청년비례 선출 진상조사단은 한 달이 지나도록 결과를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오프라인 투표 부정의혹에 대해 조사하던 전체 비례대표선거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와 함께 발표할 테니 기다리라는 답만 들려왔습니다. 누구보다 결과발표를 기다렸던 것은 비례대표 당선자 신분으로 개원준비를 하고 있던 저였을 것입니다. 모든 의혹을 말끔히 털고, 수많은 이들의 기대가 모아졌던 청년의 국회 입성을 당당하게 준비하고 싶었지만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4월 말 쯤 들려오는 소문은 너무도 흉흉하여 제 귀를 의심케 했습니다. 당 비례대표선거 진상조사결과를 발표한 후 공방이 오갔던 1번 윤금순 당선인이 사퇴하더라도 9번 오옥만 후보가 비례대표 승계가 되지 않으므로, 3번까지 사퇴를 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청년비례선출 진상조사결과를 미루어 전체 비례선거 진상조사결과와 함께 발표할 계획일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 소문을 조금도 믿지 않았습니다. 청년비례대표를 사퇴시킬만한 온라인 투표 조작의혹이 밝혀진 바가 없기도 했지만, 상식적으로 우리 당에서 이런 무시무시한 정치적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청년비례대표가 사퇴해야한다면 그동안 청년정치를 주목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을 것이고, 우리 당 내에서 그런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청년비례대표를 사퇴시키는 해당 행위가 용납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청호 씨의 조중동 언론플레이가 시작되고, 학생위원회에서 조준호 진상조사위원장에게 청년비례 진상조사결과를 빨리 발표해달라는 공식 요청을 해보았지만 싸늘한 반응이 돌아왔을 때 즈음에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총체적 부정, 부실’이라는 딱지를 붙인 진상조사결과가 보고서도 없이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을 때, 제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었는지 명백히 깨달았습니다. 청년비례대표 선출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단 한마디의 설명도 없이 ‘1,2,3번 사퇴’라는 결론만 선명히 나와 있었습니다.
당의 공식 의결체계에서 문제제기를 해보자며 5/3일 대표단 회의와 4~5일 전국운영위를 거쳤지만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상황만 이어졌습니다. 한 달 넘게 기다린 청년비례선출 진상조사결과는 결국 발표하지도 않았고, 청년비례 진상조사단장의 ‘온라인 투표에서 의혹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구두 답변만을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전국운영위의 결정사항인 ‘순위경쟁명부 전원사퇴’에 순위경쟁명부가 아닌 청년비례대표는 거기에 왜 포함되는 것인지는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의 외부에서 선출위원회를 구성해서 5만 명에 가까운 선거인단을 모으고 오디션 형식으로 떠들썩하게 후보를 선출해놓고, 이렇게 하루아침에 사퇴를 촉구하는 상황에서 당의 책임 있는 그 누구도 납득할만한 이유를 설명해주거나 수만 명의 청년선거인단에게 최소한의 사과를 표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론은 마치 1위로 선출된 저와 저의 지지자들이 부정을 저지른 것 마냥 들끓었고, 사퇴하지 않으면 금배지에 환장한 쓰레기로 매도되는 분위기였습니다. 당의 도덕적 권위가 무너지고 진보정당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는데 청년정치가 무슨 소용이고 개인의 결백함이 뭐가 중요하냐는 이야기도 쏟아졌습니다. 어떻게든 사퇴 의사를 표명하지 않으면 젊은 것이 벌써부터 권력욕에 눈이 멀어 뻔뻔해졌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냥 사퇴하겠다는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이 정리되고 당신은 명예롭게 차세대 정치주자로 다시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도 숱하게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퇴 요구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통합진보당을 하루아침에 쓰레기 당으로 만들고, 당원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은 근거가 되었던 조준호 위원장의 진상조사보고서가 품고 있는 허위를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청년선거인단들이 직접 선출한 청년비례대표가 왜 사퇴해야하는지 단 한 줄의 내용도 담지 못하는 보고서만으로 사퇴를 받아들이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오로지 진실과 정의만을 바라보며 많은 희생을 감내하며 살아왔던 진보정당의 당원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전국운영위 결의사항인 사퇴 권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발표한 다음 날, 대표단-당선자 간담회에서 제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진보정치의 미래인 청년을 아끼는 우리 당의 진심을 유시민 대표님을 통해 확인했다고 믿어왔는데, 이러한 청년들의 믿음을 납득할 수 없는 ‘정치 논리’로 짓밟은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실 것이냐고 여쭈었습니다.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라고 짧게 답하셨지요. 허탈했습니다. 진실에 기초하지도 않은 정치적 상황 속에 청년정치의 꿈과 기대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정치판이란 결국 이런 것인가 하는 현실 인식이 무섭게 다가왔습니다.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요. 이래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라고, 비정하고 영악한 이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쟁터라고 하는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제가 사퇴를 선언하면 당이 쇄신을 위한 일련의 공정으로 연착륙할 수 있을것이라고 많은 분들이 얘기합니다. 사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진보정치가 공멸할 것이라는 더욱 극단적인 상황이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자신을 위해서도 좋고, 청년 정치의 후일을 장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도 얘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도 저는 진실과 원칙에 기초하지 않은 ‘정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쉬운 길보다 옳은 길을 선택해왔고, 빛나는 길보다는 남들이 가기 힘들어가는 길을 걸어왔던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청년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청년들의 꿈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아서는 당의 쇄신도 도약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국회의원이 되면 절실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시며, 그런 것이 있느냐고 제게 물어보셨었지요. 그때 저는 주저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답을 말씀드렸습니다.
“온갖 고난을 묵묵히 견뎌내며 이 길을 걸어온 동지들을 지키고 싶습니다.” 기대하시는 답변은 아니었을 것이라 생각됐지만 다른 답을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 가슴이 전하는 답이었으니까요.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결국은 정파적 이익을 지키겠다는 소리냐, 국민이 먼저여야지 당원이나 정파조직이 먼저일수 있느냐는 반박이 이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당선자들과의 첫 상견례 자리에서 대표로서 하셨던 발언 ‘조직보다 당원을, 당원보다 국민의 뜻을 따라 달라’는 말씀과도 어긋나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민중의 뜻에 따라 민중의 이익을 위한 한 길을 걸어온 것이 우리 당원들이고, 그렇게 같은 마음으로 치열하게 싸워왔던 당원들을 동지로 믿고 있습니다. 제 머릿속에서는 이 개념들이 떨어져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갈라서 보고 우선순위를 따지기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정파적 관점, 대의에서 벗어난 입장에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의 이러한 생각이 국민의 뜻을 따라야한다는 대표님의 생각과 결국 맞닿아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저는 참여당과의 통합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줄곧 주장해왔습니다. 당원과 동지를 지켜낼 수 있는 강한 정당만이 도탄에 빠진 민중의 이익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많은 당원들과 지지자들께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청년들의 실망감이 얼마나 클지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습니다. 저의 선택과 행동이 진보정당운동의 역사를 지키고, 그것을 만들어왔던 당원동지들을 지키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끝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그 길에 유시민 대표님과 다시 ‘동지’로 설 수 있게 되기를 한 번 더 기대해봅니다. 청년들의 꿈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일련의 상황들이 당장 종결될 수 있도록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2012년 5월 16일
청년비례대표 당선자 김재연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