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안달으셔도 됩니다 . 이미 많은 훈훈한 댓글들을 받고 위로를 받았으며, 달아주신 댓글 들은 제 컴에 소중하게 저장하였습니다.
또 한번 아래 글 을 올리고, 삭제를 안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회원님들의 위로의 댓글을 받고, 아직은 한국은 인정이 메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하였으며, 감사한 마음 평생 간직하려고 합니다. 또한 82 쿡을 알게 해준 친구에게도 고마운 마음 전달하고 싶습니다.
잔인한 수녀님때문에 아침마다 공포에 떨며 깨어나야 했던 우리들
어렸을 적 저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버릇이 있었는데 , 지금까지 숨겨두었다가 이제야 84 쿡에 지난 창피한 과거를 털 어봅니다.
고아라면 그 사람의 인간성을 보기전에 우선 고아라는 자체로 사람 취급안하고 ,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한국사회 임으로 이 글을 쓰면서 올릴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저는 밤마다 침대에 오줌싸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 밤이 두려워 잠을 안잘려고 아무리 눈을
비비고 꼬집어도 어느 순간에 잠에 빠져 버리고 , 깜짝 놀라서 일어나서 보면 메트레스에 큰 지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 이른 새벽에 깨어나 젖은 메트레스와 이불을 말리려고 갖은 노력을 해도 특히 겨울철에는 말려지지가 않더군요 .
어렸을적 부모를 여의고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 그당시 갓 서원받은 아주 젊은 수녀님이 초등아동 책임자였는데 , 아침마다 굵은 회초리를 손에 들고 다니시며 , 저를 비롯해 오줌 싼 원생들을 마구 패곤했습니다 . 수녀님은 , 매를 피할려고 침대에 숨어들간 저희들을 밖으로 끌어내려고 회초리를 치면서 침대를 요리조리 끌어당기고 , 저희는 끌어 나기지 않을려고 안간힘을 다해 침대다리를 붙잡고 있어도 , 연약하고 어린 저희들은 수녀님의 엄청난 힘에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끌려 나오게 됩니다 . 그러면 끌려 나온 저희들에게 씩씩 거리며 아무데나 매질을 하는데 , 그 모습은 수도자인 수녀님의 모습이 아닌 발악하는 정신병자 였습니다 . 저는 그런 수녀님이 너무 너무 무서워 매일 숨어다녔습니다 . 저희 원생들은 울면서 수녀님 다리를 붙잡고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
수녀님의 하루의 일과 시작은 회초리로 매를 가하는 것이었고 , 그것도 부족해 다양한 방식으로 또 다른 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
- 아침 식사때 남들은 밥을 먹고 있을 때 , 오줌싼 원생들은 식당 한 가운데서 토끼뜀 뛰기를 몇번
돌게 하고 , 엎드려 뻗히기 및 두손을 한 시간정도 올리게 합니다 .
- 밥공기에 큰 수저로 굵은 소금을 넣은 밥을 반찬없이 꾸역꾸역 먹게 합니다 – 어느 날은 배가
고파 한 밤중에 몰래 일어나 식당에 내려가면 , 남은 것이란 김치 몇 조각이었습니다 . 그것을
허겁지겁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 또 한번은 학교가다 너무 배가 허기져 구멍가게 안에 들어가
사과 하나를 훔쳐 먹었습니다
- 하루종일 물마시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 키를 씌워 큰 마당에 몇바퀴 돌게 합니다
- 학교가서 굴욕당하라고 팬츠없이 치마만 입히고 학교에 보내는데 , 계단 오를적마다 초등학생
들에게 놀림을 당하여야 했습니다 .
- 오줌싼 원생들을 목욕탕에 집합시키고 호수물로 저희들에게 마구 뿌려댑니다 .
-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주 작은 공간인 어둑 컴컴한 지하실 창고에 오줌싼 원생들을 반나절
가둬 넣습니다 .
- 추운 겨울에 지도를 그린 이불들을 빨아 마당 빨래줄에 널게한 후 , 밤에는 딱딱하게
얼은 이불을 덥고자게 합니다 .
저는 다행히도 공부를 잘해 벌을 덜 받았는데 , 저와 같은 또래 아이는 야뇨증 환자로 매일같이 오줌싸고 공부도 지지리도 못해 아침에는 오줌쌌다고 얻어맞고 , 낮에는 공부못한다고 얻어맞고 , 거기에 원생들에게 항상 놀림당하고 따돌림까지 받았습니다 . 저는 하루종일 두려움에 벌벌떨며 사는 동료 원생이 너무 가여워 매번 감싸 주었는데 , 결국은 수분 부족으로 용산 미군부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 죽는 날 어느 수녀님께서 병문안을 갔는데 , 수녀님을 보고 공포에 소리지르다 죽었답니다 . 죽은 원생 의 나이가 11 살이였습니다 . 동료 원생의 죽은 소식을 듣고 난 저는, 수녀님들에게 " 당신들이 내 동료를 살인했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 저는 그 때의 일을 상기하면 아직까지 가슴이 찟어지듯이 아풉 니다 .
유럽에서는, 보육원에서 그런 잔인한 일들이 벌어졌다면 아동학대와 살인죄로 그 수녀님은 법적으로 엄한 형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 잔인한 수녀님의 행패는 용서를 할려고 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되며 , 가끔은 그를 상대로 국제 사법재판소에 소송을 걸고 싶습니다 . 그 당시 갓 서원받고 우리 보육원으로 오셨으니 , 지금쯤이면 살아계시다면 70 세 정도됐을 것입니다 .
한번은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마치고 보육원으로 돌아가는데 반대 방향에서 그 무서운 수녀님이 걸어오시더라구요 . 수녀님 보는 순간 제 심장이 팔딱팔딱 뛰고 , 발에 못이 박혔듯이 발걸음이 떼어지지가 않아 우뚝 서 있었습니다 . 그런 저를 보고 반가워하시는 수녀님께 인사도 없이 뒤를 돌아 도망가버렸습니다 .
비인간적인 수녀님으로 인해 당한 정신적 트라우마로 사춘기 때에는 반항기가 심하여 일요일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미사에도 자주 빠지고 , 토요일마다 해야하는 고해성사도 안하여 일요일이면 창고에서 하루종일 굶은체 지내는 날이 허다했습니다 . 이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원만한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나날을 보내야 했으며 , 한동안 많이 방황하기도 하였습니다 .
세월이 지난 지금도 수녀님들 보면 심장이 막 뛰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 성당에 가서 기도할려고 해도 머리가 산만해 기도가 안나오고 , 마음이 편안하지가 못합니다 . 이제는 냉담자가 되어 성당과 발을 끊은지도 오래되었습니다 .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어두웠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 사랑은 못받았어도 물질적으로 풍요 롭게 살았고 , 원하는 악기들을 맘껏 다룰 수 있었고 , 교육도 원하는 만큼 시켜주고 , 성년이 될 때까지 키워준 보육원에서의 생활은 결코 후회를 해본적이 없으며 ,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
지금은 자식은 없지만 저를 이해해주고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 경제적으로 남 부럽지 않게 풍족한 삶을 누리며 ,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 남편과 저는 가끔 제 어릴적 일을 상기하면서 , 인간성이란 눈꼽만큼도 없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수녀가 되었으며 , 젊은 수녀가 군대식 벌을 어디서 배웠을까 하고 자주 질문해 봅니다.
다음에는 어쩔 수없이 해외로 나온 경위와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사진으로 올려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