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에 어느 어머니가 쓰신 엄마로서의 상처 치유에 관한 글 읽고...
갑자기 제 어린시절이 생각나서 글을 씁니다.
댓글로 쓸까 했는데 그러면 글 내용상 웬지 원글과 맞지 않을 것도 같고 해서
그냥 따로 글을 내어 써요. 그냥 옛 기억 더듬고 싶어 두런두런 써봅니다.
제게서 도벽이 시작된 건 초등학교 2~3학년 무렵이었어요.
처음에 무엇부터 훔치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저는 아파트에 살았었는데, 아파트 단지 앞에 수퍼마켓을 비롯 여러 상점이 모인 상가가 있었어요.
거기가 주 무대였죠.
주로 제가 훔친 것은 먹을 것이었어요.
특히 수퍼마켓에서 낱개로 풀어 파는 과자들이 주로 제 목표물이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빅파이 낱개 봉지...
그때 기억으로 끽해야 빅파이 낱개 1봉지가 50원이었으니
충분히 돈 주고 사먹을 만한 값이었는데
굳이 훔치곤 했어요.
저희 집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1층과 지하에 수퍼마켓이 각각 하나씩 있었는데
번갈아 드나들며 훔쳤어요
신기할 정도로 들키지 않았죠.
제가 정말 갖고 싶었던 것들은 사실 1층의 문구점과,그에 맞붙어 있는 장난감 가게의 물건들이었어요.
인형 손톱에 매니큐어를 바를 수 있는 키트와, 부동액이 채워져 있는 모형 수중 도시가 붙은
지갑이 가지고 싶었어요.
그 새파란 부동액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저희 부모님이 다른 것에 비해서는 장난감을 잘 사주시지 않는 편이긴 했지만,
꼭 그런 부모님께 불만이 있어 장난감을 탐냈던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점점 도둑질이 손에 익어가던 저에게도 문구점과 장난감 가게는 철옹성과 같았죠.
주인 아주머니가 유난히 눈이 밝으셨고, 가게도 좁았거든요.
결국 제가 목표한 물건들은 훔치지 못하고, 애먼 과자들만 훔치곤 했어요.
점점 뭔가를 돈 주고 살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될 지경에 이르렀죠.
제가 생각해도, 제가 과자를 훔치는 기술은 나날이 발전했고, 한번도 들킨 적이 없으니
이대로 필요한 과자들은 제돈 주고 살 필요없이 훔쳐 먹으면 되겠다..하는 생각까지 들 무렵이었어요.
어느 날, 엄마가 새로 사다주신 예쁜 보라색 스키점퍼를 입고
1층 수퍼마켓에 갔어요.
이제는 꼭 식욕 때문이 아니라도, 심심풀이 비슷하게 과자를 훔쳤다가
드디어, 수퍼마켓 아저씨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죠.
아줌마한테 먼저 잡혔다가, 아저씨에게 넘겨졌는지도 모르겠어요. 기억이 불분명해요.
아저씨는 저에게 절대 욕설 섞인 말도 하지 않으셨고, 동네 떠나가라 혼을 내지도 않으셨지만,
분명 저를 '도둑'으로 지칭하면서 협박조로 야단을 치셨어요.뭔가 구체적으로 협박을 하신 건 없고,
말투가 그와 비슷했다는 뜻이에요.
저는 아저씨 손에 잡혀 흔들리며 야단을 듣다가, 아저씨 손을 뿌리치고 도망갔어요.
그로부터 1주일은 제게 지옥과도 같았죠.
상가 1층 수퍼마켓을 피해다니기만 하면 아무 일 없는데 ,
마음이 지옥이었어요.
그날 입었던 보라색 스키점퍼는 혹시 누가 알아볼까봐 다신 입지 못했어요.
엄마가 일부러 여동생과 자매답게 맞춰 입으라고 저는 보라색,동생은 분홍색으로 사주신 건데 말이에요.
그러다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는데, 1주일쯤 후에 저는 결국 못 견디고 엄마에게 자백을 했어요.
저희 엄마는 뜻밖에도 크게 소리치거나 야단법석을 떨면서 저를 혼내지 않으셨어요.
다만 제가 한 짓인지 얼마나 나쁜 일인지를 이야기하고,일단 아빠에게도 잘못을 고백한 후
수퍼마켓 아저씨 아줌마에게 사죄드리러 가자고 하셨어요.
아빠에게 쭈볏쭈볏 제가 잘못한 일을 고백하니, 아빠도 중학교 때 문방구점에서 문구를 훔친 적이 있다며
다신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셨어요.
저희 부모님은 소위 '말로 조근조근, 그러면 안돼요 이러면 안돼요-' 이러시는 분들이 아니에요.
특히 저희 엄마는 소리높여 저를 혼내키실 때도 많았고, 잔소리도 많은 분이셨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런 대처방법이 참 의외고, 또 감사학도 해요.
그리고는 엄마와 수퍼마켓에 갔어요.
아줌마에게 먼저 가서 잘못했다고, 다신 그러지 않겠다고 빌었어요.
아저씨께도 제가 잘못했다고, 다신 도둑질하지 않겠다고 고개 숙여 사과드렸구요.
아주머니는 선선히 받아들여 주셨고,
아저씨도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네가 본래 이쁜 아이 같아서 이번 한 번만 하고 봐주는 거야,
다시 그러면 안 된다' 라고 웃으며 용서해주셨어요.
(저 이쁜 아이란 말
아직도 기억이 나요. 저런 상황에서도 저런 류의 칭찬만큼은 잘도 기억하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이쁘다는 말에 집착하는 못난 면이 드러나네요 ;;)
그 후로 다시 1층 수퍼마켓을 드나들게 되었고,
지하 수퍼마켓에서도 물론 물건을 훔치지 않게 되었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린 저의 도둑질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손놀림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이후로는 다시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다는 게 신기해요.
도둑질을 그만둔 이후 종종 수퍼마켓의 과자들을 보면서 '사실 내가 마음먹자면 저 정도 금방 훔쳐낼 수
있는데...'하면서도, 결코 손을 대지 않았어요.
20여 년이 흐른 지금요? 아마 손도 신경도 다 둔해져서 반드시 들키고 말걸요. 이제는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것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지만.
그렇게 수퍼마켓 아저씨 아줌마께 용서받고 난 다음에도
이상하게 보라색 스키점퍼는 즐겨 입을 수가 없게 되었어요
그 사건 이후 가족과 함께 눈썰매장에 갔을 때나 한번 입은 정도.
그때 찍은, 역시 분홍색 스키점퍼를 맞춰 입은 동생과 눈썰매 위에서 찍은 사진을
그후로도 가끔 보는데, 그 때마다 눈썰매장에서의 즐거운 기억보다
보라색 스키점퍼를 입을 수 없었던 제 어린 마음이 먼저 떠올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