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뜬눈으로 밤을 새고 글을 올려요.
주위에 좋은 친구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생기고 나니 막상 터놓고 이야기 할 사람도 없네요,
너무 어이가 없고 황당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보자면,
제 남자친구와 저는 사귄지 10년 가까이 된 말하자면 부부같은 연인 사이에요.
워낙 오래 사귀다 보니 다른 커플들처럼 풋풋하고 설레이는 느낌은 없지만 그냥 서로를 너무 잘 알아서 편안한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점점 서로 무심해지는 것이 씁쓸하고 쓸쓸해지도 하는 그런 보통의 오래된 커플입니다.
그 날 저는 직장에서 교육을 마치고, 평소 보다 일찍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들어와서 옷도 갈아입지 못한채로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 놀라서 일어나보니 남자친구가 와 있었어요.
그런데 남자친구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더군요. 남친 왈 오늘따라 직장에서 집중할 수가 없어서 일하는 중 수 없이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상사한테 심한 꾸지람을 들었다고 했어요.
저는 그런날도 있다며 토닥토닥 남친을 위로 해 주었어요.
위로를 해주던 중 제가 팔을 좀 긁었더니, 남친이 토끼눈을 하며 왜그러냐고 물어보길래 그냥 벌레에 물린거 같다고 했는데도 계속 제 팔을 지켜보며 걱정을 하더라구요.
그리고 자꾸 절 안고 안타까운 얼굴로 처다보고 그러길래 저는 남친의 행동에 조금 의아했지만 스트레스때문에 그런가 보다 하고 말았어요.
그리고는 함께 거실에 앉아서 남친이 사 들고온 피자를 먹고 있는데 남친은 인터넷으로 무언가를 찾아보는 듯했어요, 그런데 이 친구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어요.
뜬금없이 자꾸만 저에게 어디 아픈데 없냐고 그러고,,
자기가 아무래도 HIV 바이러스에 걸린것 같다고..
그러면서 인터넷에서 찾은 그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의 발진이 난 피부 모양을 보여주면서 자기와 비슷하지 않냐고 하데요.
제 남친이 피부 발진이 있긴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가 남자친구를 처음 만날때 부터 말하자면 10년 전부터 남자친구는 자주 피부 발진이 생겼어요.
유난히 피부가 예민하고 어쩔땐 가려워서 피가 날 정도로 심하게 긁어대서 제가 무알콜 무자극 피부 크림을 사다 준 적도 있구요.
무엇보다도 1년 반 전에 남친과 저는 한 나라의 비자를 발급 받기 위해서 함께 에이즈 검사를 하였고 둘다 음성 판정을 받은적이 있었어요.
왜 말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냐며 핀잔을 주는 저에게 남친은 더욱 심각한 얼굴을 하면서 지금까지는 자기가 아팠을때 네가 곁에 있어도 한번도 아팠던 적이 없는데 작년에 자기가
편도선 염에 걸렸을때 너도 무진장 아팠던거 기억하냐면서 너가 나땜에 아팠다면서 자기가 너한테도 바이러스를 옮긴것 같아서 너무 괴롭다고 하더라구요.
빨리 병원가서 검사 받아보라고, 자기는 너무 무서워서 도저히 못가겠데요.
이 쯤되니 제 마음에 확신이 생기더군요.
무엇이 제 남친으로 하여금 본인이 병에 걸린것 같이 착각을 할 만큼 걱정되게 하였을까,..
솔직히 그 병은 접촉 없이는 불가능한 병이잖아요.
제가 물어보았어요, 너가 그 병을 의심한다는 것은 무언가 부정한 짓을 저질렀기 때문 아니냐고 따졌더니 남친이 첨엔 아니라고 하면서 말도 안되는 변명을 했어요.
자기가 예전에 쓰레기 버리다가 날카로운 것에 손을 다 쳤다는데 예감이 안 좋다는 둥,..,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어요. 만약에 네가 그 병에 걸린것 같은데 너가 아무 짓도 안했다면 당연히 날 의심하는게 먼저지 않냐 어떻게 너 스스로 자기땜에 그렇게 됬다고 자책을 하느냐고,,
그리고 정말 그 쓰레기 사건땜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난 절대 병원 안갈거라고,, 왜냐면 내가 네 건강 염려증에 놀아나서 시간버리면서 피까지 뽑고 올 일 있냐고,,
그렇지만 만약에 정말로 너가 무슨 부정한 짓을 저질러서 그런 걱정을 하는 거라면 빨리 말하라고,,
그래야지 나도 빨리 병원가서 검사를 받지 않겠냐고 그랬더니
감자기 남친 얼굴이 시뻘게 지면서 울더군요.. 나이가 서른도 넘은 남자가.
작년에 제 남친이 무슨 일 때문에 하룻동안 싱가폴에 다녀온 적이 있었어요. 그 날 우연히 레스토랑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여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고 고백을 했어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너무 후회가 되더래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죄책감이 혹시 자기가 병에 걸리지 않았을까라는 걱정으로 변하더람니다.
화를 억누르며 피임 기구 안 썻냐고 했더니 쓰긴 했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든데요,
혹시 직업여성 아니냐고 했더니 그냥 평범한 현지 여자였다고 레스토랑에서 만나서 바에가서 술마시면서 이야기 나누다가 술에 너무 취해서 실수하게 됬다고 믿어달락고 하면서 펑펑 울더군요.
연락처 같은것은 애초에 교환하지도 않았고 이름도 얼굴도 기억 못한다면서.
그리고 저번주에 제가 한 쪽 팔에 살짝 두드러기가 생기다가 없어졌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본 제 남친의 염려가 폭발한것 같아요. 아마도 그것을 발진이라고 생각했나봐요.
염려가 확신으로 변하면서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었고 그냥 두렵기만 했데요.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생각보다 자기 때문에 아무 잘못없는 내가 병에 걸렸을까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고..
남친의 고백을 들었을땐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났어요. 그런데 저절로 눈물이 막 쏟아지더군요. 흘리는 눈물도 아깝다 생각했지만 멈출 수가 없었어요.
다음날 남친을 쳐 끌고 가서 검사를 마쳤고, 당연히 둘다 음성 판정을 받았어요.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이 글 읽으신 분들은 무슨 저런 머저리 병신 같은 놈이 있나 하시겠지만 그것은 사실이에요. 비웃으셔도 되요.
그런데 저는 아직 이 쪼다같은 남친이랑 헤어지지 못했어요,
10년동안 사귀면서도 한 번도 여자문제 땜에 속썩이거나 한적도 없었어요. 그 일을 불기 전까지는 말이죠.
제가 남자친구의 이메일 비밀번호며 페이스북 비밀번호까지 다 알고 있고, 특별히 의심가는 거 없어도 나름 틈틈히 확인도 해 보았구요.
카카오톡은 원래 안하고 핸드폰에 따로 비밀번호가 걸려 있지도 않고 함께 있을대 이상한 전화가 오거나 그런적도 전혀 없었어요.
남친이 술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마시는것도 1년에 10번 이내에요. 송년회 직장 회식 이런거 다 포함해서요.
술을 좋아하긴 하는데 주로 집에서 티비보며 맥주캔 따 마시는 정도에요.
10년동안 싸우기도 무진장 많이 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를 거의 기억 못 할 만큼 큰 문제로 싸웠던 적은 없구요.
싸울때도 다혈질인 저와는 달리 남친은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꾹 참고 말을 안 하는 편이에요.
제가 완전 미친 여자가 되서 으르릉 거리고 남친 걷어 차고 때리고 그래도 그래.. 너 화풀릴때까지 때려라 하면서 묵묵히 맞고만 있는
자기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에게는 충성하지만 직장 동료나 그냥 아는 사람들에게는 냉정할 만큼 딱 선을 긋고 행동하는 편이구요.
게으르지만 자기 일에서 만큼은 성실한 편이고 나름 인정도 받고 있어요.
단점도 일일히 말할 수 없을만큼 많은데 그렇다고 치명적인 단점은 없었어요.
어쩌면 그래서 헤어지지 못한 걸 수도 있어요, 열렬하게 사랑해서 계속 사귄게 아니라 그냥 헤어져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
그런데 이제 이유가 생겼네요. 그런데 왜 갈등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 어떡하면 되나요?
제가 이러고도 남친을 받아준다면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이대로 내치자니 울며 불면서 매달리는 남친에게 미련이 남네요.
특히나 요즘 제 남친이 여러가지 문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상황이라서 더 마음이 아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