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차는 어쩌라고!
-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 서방이 번다더니…
십 수 년 전 일이다. 우리는 그때 취미 생활로 가끔 함께 스킨 스쿠버를 즐기곤 했다. 이젠 아주 유명한 사진이 되었거니와, 문재인 변호사가 특전사 공수부대 시절 베레모 삐딱하게 쓰고 낙하장비를 든 채 눈 딱 부라리고 정면을 응시하는 ‘폭풍 간지’가 흐르는 사진을 보신 적 있으리라. 그 사진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문 변호사는 스킨 스쿠버 실력도 아주 수준급이었다. 특히 산소통을 메지 않고 자연 호흡만으로 잠수하는 스킨에 특히 강했다. 보통 사람들은 그걸 한 20분만 하면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지만 그는 좀처럼 지치지 않는 강골이었다.
그날 우리는 거제도의 한 입수 포인트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우리 일행은 차 두 대에 나눠 탔는데 내가 모는 차에 탄 사람은 문 변호사, 이창수 씨, 그리고 나. 함께 놀러가는 차 안의 풍경이야 뭐 두 말할 것도 없이 들뜬 분위기 일색, 무슨 사고가 나리라고는 티끌만큼이라도 짐작이나 했겠는가. 하지만 사고는 꼭 그럴 때 나는 법.
거제도 내의 어느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중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차가 중앙선을 넘어 우리가 탄 차를 들이받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차는 한 방 크게 먹어버렸다. 멀쩡히 제 차선 지키며 얌전히 가던 차를 맞은편에서 중앙선 넘어와서 박은 사고로 백 프로 상대방 과실이었다.
“저노무 시키, 뭘 잘 못 먹었나, 중앙선을 저거 집 안방 문지방 넘듯이 넘어야?”
과실 책임이 저쪽에 있다는 것이 분명할 때 이쪽 목소리 커지는 것은 당연지사. 나는 목과 허리를 연신 주무르며 차에서 내렸다.
“여보시요! 아니 무슨 운전을 그 따우로 해! 남의 마누라 과부 만들라꼬 이라요! 참말로 사람 잡을 양반이네!”
저쪽 차에서 내린 사람은 그야말로 혼비백산 제 정신이 아닌 듯했다. 처음에는 어버버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나는 명명백백한 피해자의 입장을 십분 활용할 심산이었다. 보험으로 처리할 것은 당연히 그리 할 것이며 보험으로 커버 되지 않는 피해에 대해서도 당연히 보상 받아야 할 터.
“우짤끼요? 버벅 거리지만 말고 말을 해 보소, 말을!”
“그게 아니고, 우리가 지금 낚시를 가는데….”
거의 횡설수설인 그 사람의 말을 어렵게 종합해 보니 사정이 이랬다.
- 대우조선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인 그가,
- 갓 결혼한 아내와 친구 두 명과 함께,
- 갓 딴 운전면허를 소지하고,
- 갓 산 첫 차(비록 중고이긴 하지만)를 몰고 낚시를 가다가,
- 갓 시작한 운전이 너무 서툴러… 박았노라.
그러니까 그는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혼의 생초보운전자였던 것이다.
한데 매우 안타깝게도 내 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왼쪽 앞바퀴를 심하게 부딪친 탓에 차의 프레임이 틀어져버려 이걸 어찌 바로 잡는다 해도 완전한 복구는 불가능해서 계속 운행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 즉 이 말은 차를 새로 뽑으란 소리와 다름없었다. 완전히 새 차는 아니었지만 멀쩡히 잘 굴러가던 애마 엘란트라를 버리란 소리였다.
그러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 살 차의 대금은 당연히 가해자 쪽에서 받으려 했다. 그런데….
“거…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사람 사회 초년생인 모양이던데…더구나 최근에 결혼했다면 무슨 돈이 있겠나? 있는 것, 없는 것 다 털어 넣었겠지. 억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형편 나은 자네가 인생 후배한테 부조한 셈 치고 고마 넘어가지…. 살다보면 손해 보는 일도 더러 생기는 거라 생각하시고….”
문재인 변호사의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 한참 어린 친구를 그악스럽게 몰아댈 자신이 없어졌다. 그의 말대로 인생에선 더러 손해 보는 일도 생기는 법이며 내가 입은 손해와, 알게 모르게 내가 남에게 입히는 손해가 서로 상쇄되면서 굴러가는 게 인생사란 걸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한편 새삼스레 좀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 돈은 내가 들였는데 왜 문 변호사만 근사해 보이냐고?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말, 딱 그 짝이네. 에라, 그때 못한 말 지금이라도 한 마디 해야 속이 시원하겠다.
“문 선배, 내 차는 어쩌라고!”
- 배경조(문재인 변호사 고등학교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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