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독교라 불리우며 어쩌다 가카만큼 이땅에서 사라졌으면 하는 대상으로 추락해버린 기독교에서 믿는 천국(천당)에 대하여 제 나름의 다른 관점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모태신앙으로 아주 보수적인 기독교신자였지만 신학대학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한 뒤 목사의 길을 포기하고 종교다원주의자가 되었던 경험과 그 과정 중 사유해 얻어진 결과입니다. 불신지옥 예수천당으로 대표되고 한국교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기독교근본주의를 믿는 분들에게는 새로운 천국상을, 개독교라 부르는 무신론자분들에게는 충분히 합리적 과학적 사고 아래에서도 기독교 신앙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알리고자 합니다. 아래 글은 예전 종교다원주의자였던 시절에 썼던 글로 하나님이란 용어를 하느님, 신으로 대체해 읽으셔도 그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SBS스페셜에서 소통이란 주제로 다룬 다큐멘터리 세편을 보면서 수구골통과 좌파빨갱이의 소통 뿐만 아니라 기독교인과 기독교 폐해를 보고 무신론자가 된 사람들 간의 소통도 필요하다고 느껴집니다. 수구정치세력도 보수적인 한국교회도 엄연히 존재하고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이웃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셨으면 합니다.
[ 죽음 그리고 천국(천당)에 대한 새로운 관점 ]
엊그제 큰 이모님이 뇌졸중으로 돌아가셔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한 달 전만 해도 큰 이모님 칠순잔치에서 자녀들과 친지들이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고 축복의 인사를 건네며 함께 반주에 맞추어 춤추는 것을 보았는데..... 가까이 있는 자들의 죽음을 접할 때마다 언론매체에서 접하는 것과 달리 죽음에 대해 실존적으로 깊은 느낌을 받는다. 죽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고 새로운 세포가 생기며 미시적으로 소멸과 생성을 늘 반복하는 인간에게 거시적인 생물학적 죽음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나는 죽음이 나에게서 의도적으로 떨어져 나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크게 쓰시라는 믿음이 있어 교통사고 등 불의의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역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현대과학의 성과물을 충분히 수용한 현대신학을 공부하고나서 두려움이 생겼다. 나도 사신의 무작위적인 침탈에 맡겨질 수 있는 몸이란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엄연히 자연법칙이 존재하고, 그 자연법칙 내에서 살아가는 창조물은 자율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에, 나와 관계 맺은 다른 창조물의 선택에 의해 생물학적 죽음이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자연법칙이 존재하고, 하나님이 손수 부여하신 창조물의 자유의지가 계속 존재하는 한 초자연적이라 믿는 어떤 힘에 의해 내가 생물학적 죽음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은 겸허히 받아들이는 방법밖에는. 무엇이든지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고등부시절까지 모태신앙을 키워온 모교회는 성령운동을 하는 교회였다. 방언, 방언통역, 치유, 입신 등 은사자들이 많은 교회로 천국(이하 내세의 천국)에 몇 번 갔다 온 이들도 있었다. 그게 바로 입신의 경험이다. 입신자들의 경험담뿐만 아니라 천국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들의 책도 읽으며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내세의 천국이라.....
입신자들의 경험담을 들으면 재밌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화려한 맨션이나 아파트 등의 건물들과 온갖 보물들이 천국에 즐비함을 말하고, 어떤 이들은 아름다운 숲과 풀밭이 널려 있는 가운데 동물들이 자유롭게 뛰어 노는 것을 말하는 등 묘사하는 천국의 이미지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입신자가 입신을 경험하기 전에 가진 천국(가장 최상의 상태)에 대한 희망사항이 종교적 황홀경을 경험하면서 구체적인 이미지로 투영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묘사하는 고통도 슬픔도 없고 오직 하나님을 향한 찬양만 존재하는 현세와 전혀 다른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 세상의 많은 일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하심이 동시에 존재함을 인정할 수 없게 만든다. 전능하심과 사랑하심을 함께 가지고 계신다면 이 세상을 천국을 가기 위한 과도기로 만들지 않고 곧바로 천국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반론할 것이다. 하나님이 애초에 천국(에덴동산)을 만들었으나 최초의 인간이 죄를 졌기 때문에 고통스런 세상이 된 것이고 이는 인간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고. 그러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죄를 짓는 상황(고통이 존재하는)을 만드는 '자유의지'를 그 '전능'으로 없애 인간이 언제나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유의지는 선과 악을 판단하며 다양한 변화를 생성시키는 원리이며 힘이다. 그런데 변화는 불완전한 것이고 고통과 악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천국에 고통과 악이 존재하지 않으려면 자유의지(자율적 선택)가 있어서는 안된다. 천국은 절대적 불변성의 세계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아프게 하는 대립이 발견된다. 자유의지와 행복 말이다. 현세의 체험적 삶을 통해 보건대 자유의지 없는 삶이 가능하기나 할 것이며 가능하다면 행복이나 할까? 그러면 천국은 자율적 선택이 없는 즉 어떤 변화도 없는 곳일까? 아니면 인간의 자율적 선택으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현세와 같은 곳일까?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사랑만 보더라도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천국에 다양함을 선택하는 자유의지는 없고 오직 선한 것만 맹종하는 확고히 고정된 틀밖에 없어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사랑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향한 자발적인 사랑이 아니라 미리 프로그램된 로봇의 맹종적인 봉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자발성 없는 사랑을 사랑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하나님은 전능 보다는 사랑을 선택하셨다. 인간의 자율적 선택으로 자신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한계를 가진 분이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뺏지 못하는 한계 말이다. 자유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이 없다는 말에 그러면 뭐 하러 교회 다니고 뭐 하러 예수를 믿느냐라고 답하는 이들이 있다면 자신의 신앙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곰곰이 드려다 봐야 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죽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천국을 어떻게 보고 기다릴 것인가?
나는 교회에서 말하는 천국이 존재하지 않음을 안 뒤부터 앞서의 느닷없는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고, 부재 또는 알 수 없는 내세에 대한 또 다른 두려움이 생겼다. 나와 세계를 인식하는 자아가 사라지는 즉 연속성이 단절되는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일수록 두려움이 클 것이다. 자아가 강하다는 것은 욕심이 강하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말이다. 성취욕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아가 강하다. 욕심 없는 사람은 나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한국교회 교인들은 참 욕심이 많다. 구원이 곧 천국 가는 것이라 믿으며 천국에 상급을 쌓기 위해 현세에서 열심히 선행하는 기복신앙을 갖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보상심리로 천국의 상을 그린다는 것이 성숙한 신앙일까? 선행상을 바라고 착한 일하는 어린아이의 미성숙함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보상심리는 교육효과의 초기단계의 방법이지 궁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보상심리는 하나님이 매 과정마다 창조적 변화로 유혹하는 것에 대단히 소극적으로 응답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당하는 고통에 순응하게 하게 한다.
죽음이후에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갖는 경험에 대한 기대는 앞서 말한 자아중심적인 욕구가 배어 있는 것으로 이를 넘어서는 공동체중심적, 생태계중심적, 우주중심적인 기대가 요구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객체적 불멸로 영원할 수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일이며 우리가 창조한 가치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여 더욱 이 세상을 온전하게 하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다음은 존경했던 한 교수님의 말씀으로 주체의 연속성이 단절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보다는 '당신은 죽지 않습니다.'라는 말에 희망을 걸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참으로 사랑을 알고 나면 달라질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이, 나를 사랑하는 이, 곧 하나님과 그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이 참으로 큰 위로가 되며 소망이 될 것이다. 이것을 참으로 믿는다면, 아무도 우리가 '주체로서' 죽는다는 그 한 사실 때문에 인생이 허무하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아 상실의 두려움은 사랑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보상에 근거한 천국상을 그리는 이에게도 사랑을 말하고 싶다. 그 사랑은 내가 남들을 즐겁게 해주는 즐거움을 나에게 주는 이기적인 모양새를 띠는 자기관심적인 사랑이 아니다. 자기관심적인 사랑은 사랑하는 내 감정을 사랑할 뿐이다. 이런 낮은 단계의 사랑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어렵다. 내가 사랑하노라는 자각이 전혀 없는 사랑을 할 때 욕심을 잉태하는 자아는 사라지고 나와 네가 없이 사랑만이 우주 안에 있음을 느낄 것이다.
이를 느끼는 자는 내세의 천국이 있든 없든 관심사항이 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살지 않고 오직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사랑 안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이는 생애 동안 만난 이들에게 사랑을 남기며 아니 사랑으로 자신이 객체적으로 부활함을 느낄 것이다. 의학적으로 죽음을 판정받더라도 죽은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안에, 온 우주에 사랑으로 보전, 부활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느껴보라. 그러면 모든 의문점이 자연스럽게 풀어지며 두려움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