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그 여자네 집/김용택 (정말 기네요...)

박명기 조회수 : 1,978
작성일 : 2011-12-13 20:12:45
그 여자네 집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셋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 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알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손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세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 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있던 집

여자네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시. 김용택

IP : 220.117.xxx.38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ㅇㅇ
    '11.12.13 8:21 PM (121.130.xxx.78)

    에그~
    그냥 그 여자랑 결혼해서
    처가집으로 만들 것이지...

    그랬음 이런 시는 안썼겠지만 ㅋ

  • 2. 어머
    '11.12.13 9:48 PM (180.66.xxx.84)

    그분은 이걸 외우셨단 말이죠???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53573 ‘박근혜의 남자’ 26세 비대위원 이준석 “MB 자수성가형, D.. 9 세우실 2011/12/28 1,798
53572 쥐를 잡자 이명박 가카 버전 고갈콘 2011/12/28 684
53571 왕따가해자들 무조건 소년원쳐넣었음합니다 3 따져보자 2011/12/28 1,116
53570 '시위대 처녀성 검사는 불법 배상해야 - 이집트 법원' 1 량스 2011/12/28 717
53569 그거 이름이 뭐지요? 2 급)질문 2011/12/28 980
53568 인도 음식 5 궁금이 2011/12/28 1,189
53567 고대 성추행 피해자 인격장애있다고 서명받은 모자 명예훼손으로 기.. 9 -_- 2011/12/28 1,973
53566 그 교수님이 진짜 여러 아이 구한 거라고 5 살신성인 2011/12/28 2,251
53565 버스안에서 햄버거 처먹던 여자 45 Vip 2011/12/28 15,695
53564 석유값 왜 이래요 (트윗펌) 3 애플 2011/12/28 862
53563 노란머리 서양 아가의 김치사랑 2 삐리리 2011/12/28 1,322
53562 x-ray 찍을떄 쏘인 방사능은 시간이 지나면 소멸되나요? 7 방사선 2011/12/28 5,013
53561 오랫만에 홍대 나들이 오랫만에 2011/12/28 758
53560 교사에 대해 안좋은 추억들때문에 권위무시하면은 힘들겁니다 4 susan .. 2011/12/28 1,075
53559 치즈 반입금지인가요? 1 치즈좋아 2011/12/28 2,037
53558 창문에 뽁뽁이 붙인다고 방한이 되나요? 유리와 샤시틀 그 사이로.. 10 뽁뽁이 2011/12/28 7,816
53557 차 없는 5인가족, 1월1일에 낙안읍성과 순천만여행.. 7 중1맘 2011/12/28 2,032
53556 멋진 한시(漢詩)아시는것 있으면... 공유해봐요 7 감탄 2011/12/28 2,269
53555 다날결제 3 ?? 2011/12/28 672
53554 동덕, 가톨릭대 11 정시 2011/12/28 3,043
53553 결혼 이바지로 생 돼지머리를 보내기도 하나요? 12 당황 2011/12/28 3,801
53552 요즘 학교, 학생문제를 보면서 생각나는 일 4 .. 2011/12/28 808
53551 대체 이건 또 누구 배불려주는 가카의 세심함이죠?? 2 량스 2011/12/28 778
53550 급질) 요실금수술해보신분~병원추천요. 4 40중반아짐.. 2011/12/28 2,138
53549 영종도 하얏트..가보신분 계신가요? 3 호텔 2011/12/28 2,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