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뉴스로만 접했는데,사진들 보는데 인파가..이한열 열사 장례식때...정말 대단했네요.
http://www.cyworld.com/sysche/218036
이한열 열사 정말 곱상하고 여리여리ㅠㅠ
어려서 뉴스로만 접했는데,사진들 보는데 인파가..이한열 열사 장례식때...정말 대단했네요.
http://www.cyworld.com/sysche/218036
이한열 열사 정말 곱상하고 여리여리ㅠㅠ
직접 참여는 아니고... 나중에 대학교 들어가서 6월항쟁 알게됐을때 지난 시간들 다시 생각해보니깐, 딱 그즈음에 (초등5학년때) 시내와는 먼 우리동내에도 이상한 메케한 가스들을 맡았던거랑,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몇주를 계속 늦게 오셨거든요.. 그때가 6월항쟁이었더라구요..
어려서 참여는 못했지만
그때 대학생이었던 남편의 말을 들어보니...
굉장했다고 하네요.
저요...
있어요..
이런 시간이 다시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김대중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시절 너무 맘 놓고 살았습니다 ㅠㅠ
그리 했기에 그나마 전대갈 노태우
물러나게 -선거라는 형식으로라도, 6,29라는 기만적인선언이지만-
했죠..
고문, 의문사죽음당한 숱한 희생으로 이뤄낸...
그땐 지랄맞은 지랄탄 생각나네요..
전 고등학생이었구요. 언니가 86이어서 매일 집회 나가고 싸우고 들어왔는데요.
아버지가 한번은 연대에서 집회하는 것을 보고 언니 쫒겨났어요.
그래서 제가 기말고사도 망치고 언니 찾으러 사방팔방으로 다녔던 기억이 나요.
ㅎㅎ , 그리고 아까도 썼지만, 87년 그해 겨울에는 또 한번 언니랑 아버지가
김대중이야기 하다가 밥상엎고 으.. 추웠던거 같은데 언니 맨발로 도망갔어요.
진짜 치열했던거 같아요.. 그 때 전 얼마나 옆에서 울었는지, 엄마도 속옷바람으로
언니 쫒아가고요.. 그래도 우리집 단독주택이어서 그렇게 싸우고 난리필수 있었던거 같아요.
ㅋㅋ 진짜 단독주택 살고 싶다. ..
전 고딩땐데 아파서 집에서 휴학중이었어요. 젠장
그래도 지금은 한계레 경향도- 물론 이뤄낸 거지만-
인터넷도 있지...그 당시 언론은
지금의 좃중동 그대로였다는
단 한 곳도 제대로언론을 낸 곳이 없었다는
매일 데모를 하고 ,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이한열이나 박종철 ,최루탄에 맞아 부상당하거나-
죽어나가도 , ...
솔직히 고백하자면--;;데모는 공부하기싫어서 하는줄 알았다눈 ㅠㅠ;;
링크걸어야하나보네용
http://www.cyworld.com/sysche/218036
http://fuan.tistory.com/32
저는 한글 배울때였는데
동네 벽에 노태우 개새끼라고 적힌거 보고
한글 읽을 줄 안다고 엄마한테 읽어드렸죠(왜 애들 간판 보면 한번쯤 읽고 하잖아요)
뭐... 그것 때문에 엄마한테 야단 맞지는 않았는데 정확한 엄마의 반응은 기억 자체가 안나요.
별로 없는 기억중에 한 장면이네요.
그게 딱 6월 항쟁 때였는지. 아니면 노태우 대통령 당선되고 나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대충 나이를 집어보니 87년이나 88년 경이었어요. 6~7세 무렵이었다는 거 밖에는 기억이 안나네요
당시 조선일보를 통해 지금 상황이 국민들의 분노가 대단하다는 걸 알았다면 믿어 지세요.ㅎㅎ
언론이 완전히 통제되던 당시에 조선일보 등 신문들을 보면 그 분위기가 조금씩 감지가 되었기에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 더 거리로 나왔었죠.
황당한 건 당시 시위하다 전경들에게 맞아 지금도 허리가 아픈 친구가 이제는 딴나라당 지지한다는 거...
당시 노태우 포스터에서 노태우에게 귓속말을 하던 예쁜 꼬마소녀는 지금은 30대의 아줌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몇가지가 있지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느낌이었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내편이구나, 여기서 느끼는 편안함, 안도감. 피흘리는 사람들을 볼때 튀어나오는 분노. 하지만 어찌어찌하다 앞줄에 서게되면 다리가 덜덜 떨렸어요. 지랄탄이나 백골단에 대한 기억은 솔직히 별로 없어요. 아마 직접 두들겨 맞은 것이 아니라 그렇겠지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오히려 감각적인 기억이에요. 비닐 봉지를 뜯어내 눈을 가릴때 나는 소리, 눈 주위에 바르던 치약냄새, 건물 주변에서 나던 쓰레기와 배변냄새, 최루가스와 땀 기름이 한데 섞인 그 이상한 냄새 등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막내는 파스냄새가 기억에 남는다고 한 적이 있어요. 버스고 뭐고 다 끊기기가 다반사였으니, 몇 시간씩 걷는게 흔한 일이었어요. 도시락통에 가방에 뭐니 잔뜩 짊어진채 들어와 아프다고 징징거렸지요. 그나마 도시락이나 먹고 왔으면 다행인데, 등교는 시켜놓고 수업은 중간에 끝나기가 일수 였으니, 그 쉰내가 또 엄청났어요.
저는 87학번이었어요. 시골에서 상경해서, 갓 대학을 들어오자마자 거리로...
그때 그 광경들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혹시 당시 계성여고 다니셨던 분 계시나요?
계성여고생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분들에게 음식도 갖다주고 아주 활약이 대단했었죠.ㅎ
말하기를 하늘에서 광화문 시청 명동 사무실 에서 휴지가 떨어졌다고 하더라구요.
매우 최류탄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휴지를 던져줬다고 그러고요.
당시에는 노인들도 나와서 지팡이로 전경들을 때리며 분노를 표시하셨는데..
지금 할배들은 가스통을 들고 민주인사들을 향해....
저도 최루탄가스는 기억에 남아요. 시위담날 도로는 난장판이고, 매캐한 최루탄 가스가 남아있는데, 눈뻘개갖고 사촌동생이랑 둘롤라스케이트 타러가고 ㅎㅎㅎ
이한열 선배 죽은 6월이면 해마다 신촌에서 시청까지 달려야 했어요.
그래도 막 감정이입 되진 않았는데, 어느해 6월에 의료진과 관련된 글 보고 뭉클했어요,
이한열선배가 최루탄 맞고 그날 사망한게 아니라, 열흘정도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사망했대요.
살리려고 밤을 새며 최선을 다했지만, 이한열 선배의 사망이 확정된 순간,
관련된 십 여 명의 세브란스 의료진 전원이 다 울었대요.너무 괴롭고 안타까워서.
이한열씨의 장례행렬이 신촌로타리에서 노제를 지낼 때 수 많은 만장에 세워졌던 신촌 앞 그 길에, 25년이 지난 후 그의 후배들은 "오미 슨상님 고대라 하셨소"라는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그 선배가 꿈꾸던 세상을 비웃더군요...
정치 절차적 민주주의는 그 많은 희생으로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아직도 먼 길을 더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는 신촌, 집은 동교동...입학후 학교다니는 것도 참 힘들었다는...
대학이 여럿있다보니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거의 최루탄과 함께 하교한 기억이 많네요. 지하철 2호선이 완공되기전엔 더했고..
정말 암울했던 시기였는데..86년도엔 거의 주말약속이 친구들 공판가는 일...
부산이 집이었는데, 부모님이 거의 하루에 한번씩 전화하셨어요..삐삐도 없던 시절이라, 12시넘어 통화안되자 울아버지 바로 서울로 올라오신 적도 있었구요.
6월 항쟁땐...참 그렇더라구요...무서워도 사람들이 많아지니 더 용감해지더라구요. 지금도 머릿수로 승부한다는 건 진리인듯...
그 시절 다 보내고 반백앞둔 나이에 이런 꼴들을 또 보게되니...걱정보단 처참한 심정이란 말이 더 맞겠네요.
지금도 그때 생생한 기운이
생각나...
이한열 열사의 피를 보는 순간의
판단에 선택이~ ~
거리로 ~
거리로 ~
지금은 소리없이 한미FTA 오라 줄이
내 목을 쪼이고
우리식구가족들에 숨통을 쫄려는데....
생존을 위해서는
우리의 주권을 포기하고
미국이 시키는 데로 ...
꼭두각시 노릇하듯
흑인을 노예로 부리던 시절 향수가 그리워
약소국가를 현대판 영원한 노예제로 만들려는
불합리한 FTA 조항 폐기들을 위한 최선책은 ??
국민 모두가(매국당 원조 151+황영철포함=152명과 후원자들 제외)총궐기
하여 풍전등화와 갖게 만든 대/한/민/국/을
반 민주 의회정치 구테타 세력이 백기를 들때까지
깨어나는 민주시민의 총 궐기의 저항은 계속되어야 한다.
제 2의 6.29 선언이 나올 때 까지.................................
87학번입니다.
이웃에 살던 곱상하고 공부 잘하던 오빠의 소식은 비극이었죠.
저희는 운구를 맞이하러 톨게이트까지 갔고 도청앞 노제에선 거짓말 같이
파랑새 한마리가 만장 위에 올라 앉았어요.
다시 할 수 있습니다.
저두요..
노태우의 6.29선언을 이끌어 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