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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

보리수네집 조회수 : 790
작성일 : 2011-02-10 17:00:52
명절이 오기 이틀전, 집근처에 산불이 났었습니다.



양양군 산림과에 다니는 신랑친구로부터 산불소식을 듣고

농담이거나, 났다고 하더라도 아주 경미한 산불이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한 5분쯤 후에 마을이장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옆마을 산불을 알리며 민방위대원들은 마을회관으로 나와달라고 방송을 하십니다.



신랑은 민방위 대원은 아니지만, 인력이 모자를 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니

옷을 챙겨입고 불끌 준비를 하고 뛰어나갑니다.



신랑이 나가고 나서 한 십분쯤 지났는지, 이장님이 다시 방송을 하셔서

대피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워낙 바람이 태풍처럼 휘몰아치던 밤이니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는구나 싶어 식은 땀이 납니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라, 달리, 뭐부터 해야할지 몰라

일단, 우리 보리 옷을 두껍게 입히면서

어머니께 대피 준비를 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머니는 그 전에 산불이 난 것을 본 일이 있는 터라

혼을 쏙 뺀 사람처럼 안절부절하면서 짐을 챙기십니다.

옷부터 따뜻하게 입으시라고 말씀드렸더니

나중에 보니 겨울옷은 죄다 보따리에 싸고

정작 걸치신 옷은 봄에 입는 홑 옷을 걸치고 나오셨더랬습니다.

아기옷을 챙겨 입히느라 경황이 없으니 어머니가 뭘 입고 나오신지

나중에서야 확인을 했습니다.



아이와 어머니를 보건소에 대피시켜 놓고

신랑과 둘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쌉니다.



나는 일단, 아기 겨울옷들과 이불을 챙기고, 앨범들을 챙깁니다.



신랑은 주문 들어온 택배보낼 것부터 챙기고 나서

우리 옷 몇가지와 아기 기저귀를 챙깁니다.



어머니는 집문서 땅문서, 패물같은 것을 챙겨서 가지고 가셨습니다.



더 뭘 챙겨야 하나. 생각하면서.

컴퓨터에 그간 저장해놓은 사진들이나 데이터가 있으니

컴퓨터를 챙겼습니다.

곳간에서 오래된 함지박 두개를 더 챙깁니다.

돈을 주고는 살려고 해도 다시 사기 힘든 것들을 챙깁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 몇권과

보리가 친구들에게 선물받았던 책 몇권

그리고 집에 있는 책들중에선 오쇼의 책 한권과 월든 한권을 챙겼습니다.



더 챙기려니, 더 챙기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다만, 걱정이 되었던 것은 집에 있는 소 네마리,

한마리는 태어난지 이제 막 한달되는 아기 송아지이고

남은 세마리중 한마리는 이제 오늘 낼 오늘낼 송아지 낳을 차비를 하고 있다 하여

풀어놓고 내놓을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괜히 풀어놓았다 다치면 어쩌나 싶어서 마구주변에 물만 잔뜩 뿌려놓았습니다.



집이 홀랑 타버리는 것은 괜찮아도

혹시나, 이 산불에 소가 질식을 하거나 타죽을까봐 걱정입니다.

혹시라도, 불길이 우리집까지 번지면

그때는 마구문을 열어주고 모두 도망가게 하려고 고삐만 풀어두고

주변에 불이오면 뿌리려고 큰 드럼통에 물을 계속 받습니다.  



바람은 너무 많이 불고

하늘은 칠흑같이 검으니 산불진화는 불가능하다고 하니

그저, 그 밤은 길고 길게 눈을 치뜨고 보내었습니다.



새벽이 되어 산불진화가 시작됩니다.

바람은 다행히 인가쪽으로 불지 않고 하천쪽으로 내리달고

간벌이 잘 되어 있어서 산불이 쉽게 옯겨 붙지 않아

밤새 탄 불 치고는 피해가 적은 편이었습니다.



그저 다친 사람이 없으니, 그것으로 안심하며

새벽에 매캐하게 동네를 휘감은 산불냄새와 연기들 사이로

집에 들어와 대충 이불을 펴고 누워 그제서야 발을 펴고 잠이 듭니다.



누워서, 이 생각 저 생각하는데

정말,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몇가지 없다는 생각.



각기, 짐을 쌀때 사람의 성격이 나오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평생 만들어놓으신 그 땅과 집, 통장들이 가장 중요한 물건으로 챙기신 어머니와

가족의 재난상황에 일단 의식주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임무와

그 상황에서도 주문받은 택배만은 부쳐주자는 마음에 농산물을 챙기고

무엇보다 마구에 있는 소를 지키려고 밤새 마구주변을 빙빙돌던 신랑과

하나뿐인 아들과, 돈주고는 다시 살 수 없는 것들을 챙기는 내가. 쌌던

그 날 단촐하기 짝이없던 이삿짐은



지금 생각해보아도, 지금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되짚어 알려주었던, 기회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마구옆에 물을 뿌리며 사수하겠다고 물통이란 물통엔 모두 물을 받던 신랑을 보면서

생명을 소중히 여길줄 아는 사람이니, 정말, 믿어도 되겠다고.

그날, 새벽에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새해 첫 명절을 대청소한번 시원하게 잘 했습니다.



나무들이 많이 타긴 했지만

예전에 낙산사에 났던 불처럼 참혹하지는 않았고

그저 살아서 웃고 우는 생명들이

모두, 무사하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되내였던 새해입니다.



새해에 모두, 무탈하십시오.



그런데, 지금,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IP : 121.187.xxx.44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T
    '11.2.10 5:06 PM (183.96.xxx.143)

    어우.. 별 기대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뭔가 마음에 묵직한게 생기면서 생각이 많아집니다.
    지금 나한테 제일 소중한게 뭘까요.
    원글님 덕에 오늘 하루 오래오래 생각해보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2. 눈물
    '11.2.10 5:26 PM (118.32.xxx.204)

    핑.. 돌았어요.
    주욱~~ 읽어 내려오면서 그 긴박했던 상황이 느껴져 오구요.
    나에게 소중한것이 무얼까. 생각하게 되네요.

  • 3. ㅜㅡ
    '11.2.10 5:38 PM (125.187.xxx.175)

    가족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저도 이따금, 무슨 일이 생긴다면 뭐부터 어찌할까 상상해볼 때가 있습니다. 머리가 어지러워
    더 생각할 수가 없더군요. 아이들 챙기는 것 외엔 딱히...

    어릴적 건너편 빌라에 불난것을 본 적 있었습니다.
    tv에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바라보는 것만으로 무서워 이가 딱딱 마주칠 정도였어요.

    덕분에 가장 소중한 것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가족...다른것이 아무리 많아도 그들이 없으면 의미가 없겠지요.

  • 4. ..
    '11.2.10 5:40 PM (218.238.xxx.45)

    저도 구정지내며 그런 생각을 했네요.
    내가 당장 죽게 된다면 남기고 갈 게 무얼까?
    아이밖에 없더라구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길 말.
    원글님 글을 읽으며 참 진실된 글의 힘을 실감합니다. 감사합니다.

  • 5. 읽고 또 읽고
    '11.2.10 6:13 PM (183.98.xxx.240)

    눈물이 핑 도네요

  • 6. 웃음조각*^^*
    '11.2.10 7:08 PM (125.252.xxx.182)

    보리수네집 원글님 댁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항상 건강하시길..

  • 7. 아...
    '11.2.10 7:49 PM (221.149.xxx.201)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단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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