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이해인수녀님이 쓰신글-법정스님께

법정스님 조회수 : 788
작성일 : 2010-03-11 15:36:20


[동아일보]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인터넷 뉴스팀
IP : 211.231.xxx.39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0.3.11 3:50 PM (121.140.xxx.23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해인 수녀님도 편찮으시다는데
    빠른 쾌유를 빕니다.

  • 2. 그러잖아도
    '10.3.11 3:52 PM (222.234.xxx.168)

    이해인수녀님의 안부도 궁금했었는데 차마 입밖에 내기가 두려웠어요
    혹시나싶어서..
    수녀님글 읽으니 진짜로 가신게 실감이 나네요 ㅠ ㅠ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528643 시동생과 같은날,,, 10 생일 2010/03/11 1,176
528642 법정스님이 입적하셧습니다 2 인생 2010/03/11 610
528641 가습기 쓰면 가스불이 빨게요 4 hhh 2010/03/11 1,060
528640 독서록 쓰기 팁좀 주세요 3 초2 2010/03/11 591
528639 좋긴한데 대신 월급의 반을 세금으로 내야하네요. 6 프랑스 육아.. 2010/03/11 826
528638 우리 동네 성범죄자 신상정보' 열람해 보니… 1 세우실 2010/03/11 1,202
528637 루푸스라는 병..아시나요? 13 아니기를.... 2010/03/11 2,204
528636 불교 관련 좋은 구절 모음집...같은 책 추천 좀 해 주세요~ 2 마음다스리고.. 2010/03/11 321
528635 고1학생 영어조언 좀 부탁드려요. 1 학부모 2010/03/11 469
528634 작은 유리 저그? 시럽그릇 어디서 팔까요 4 허니 2010/03/11 558
528633 법정스님의.. 책.. 더이상 출간되지는 않을 듯 하네요... 12 극랑왕생 하.. 2010/03/11 1,798
528632 평촌에 사시는 분들 계신가요? 9 예비신부 2010/03/11 1,113
528631 인터넷에 2차 가공품판매(콩뻥튀기, 미숫가루) 식품제조허가를 받아야 하나요?? 5 저랍니다 2010/03/11 1,406
528630 신발이나 이쁜옷 사이트좀 알려주세요.. 사이트 2010/03/11 360
528629 역삼동 옐로우 나나바라고 아시는분. 1 .. 2010/03/11 502
528628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4 ㅋㅋㅋ 2010/03/11 622
528627 고질적인 기사 베껴 쓰기의 '우리 사회 천덕꾸러기'는 1 세우실 2010/03/11 190
528626 천만원정도 쓸일이 있는데 아시아나 마일리지... 7 카드 2010/03/11 1,473
528625 이 옷걸이 좀 찾아 주세요~~~~ 1 플리즈~ 2010/03/11 437
528624 이해인수녀님이 쓰신글-법정스님께 2 법정스님 2010/03/11 788
528623 냉동칸 없으면 진짜 좀 아쉬울까요? 9 사무실냉장고.. 2010/03/11 568
528622 법정스님의 기고- 추기경님을 떠나보내며 2 법정스님 2010/03/11 699
528621 어떤 게시글에 이멜주소 남기면서 정보 가르쳐달라는 댓글다신분들.. 3 여쭤요.. 2010/03/11 522
528620 1가구 1주택자예요.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못 채울 것 같은데 어쩌면 좋을까요? 7 아파트고민 2010/03/11 785
528619 문짝 맨위에 걸쳐놓고 사용하는 자바라식 옷걸이요.. 5 문의 2010/03/11 733
528618 아이 문제..이럴때 어떻게 해야하나요? 9 .. 2010/03/11 1,392
528617 눈물...... 4 눈물 2010/03/11 940
528616 유치원에서 2 질문 2010/03/11 281
528615 둘째고민 4 꿀꿀이 2010/03/11 523
528614 이런 대학생도 있구나 다시 보게 되네요.... 14 아짐 2010/03/11 2,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