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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창회 사이트의 감동적인 이야기 - 어떤 여행

골목집 조회수 : 1,399
작성일 : 2010-02-16 09:33:36
좀 깁니다 ---

원문 http://power.jegonet.com/bbs/zboard.php?id=BBS&no=12161

어떤 여행

지난 며칠간 어떤 여행을 하였다. 과거로의 여행을.

그곳은 내가 가 본 세계 중 가장 멀리 있는, 돌아갈 수 없는 나의 옛날이 있는, 그러나 바로 내 발 밑에서 잊혀진 땅이었다. 40여년 전의 부평역 주변을 나는 다녀왔다. 큰 길 건너에 살던 친구들의 집을 아직도 기억한다. 당시로서는 현대식 주택이었던 흥식이네의 이층 양옥집. 얘들아! 부르시던 할머님의 소리가 아직도 들리는 듯하다. 골목길을 좀 나오면 대정이네 가게가 있던 삼층 높이쯤 되었을 건물. 무슨 잔칫날이었을까, 꼭대기 방까지 비좁은 계단을 올라와 음식을 날라주시던 누님의 모습도.

그 동네에서 놀다가 돌아올 때는 버스를 탔었다. 부평 삼거리 철길을 덜커덩거리며 넘고, "문둥이" 마을이 있다는 야산을 도망치듯 내려오면, 저 아래 너른 주안벌 위로 황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겨울에는 논두렁 위에서 스케이트 날을 갈아주던 아저씨의, 추위에 쩍쩍 갈라진 그 두툼한 손. 저 들 너머 따뜻한 남쪽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어린 나로서는 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 하는 나의 버스가 제물포를 지나 도원동 고개를 넘어 배다리에 이를 무렵에는, 좌우로 늘어선 과일가게와 포목가게의 백열등들이 하나씩 둘씩 켜져, 마치 먼 항해에서 돌아오는 배를 맞아주는 항구의 등불처럼 보였었다.

그리고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젊은 시절 부평의 예식장에서 새신랑된 친구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 홀로 막차를 타야 했던 그 외로움처럼 부평역에 다시 내렸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이제 거대한 백화점과 끝없이 이어진 지하상가, 그리고 귀를 찢는 크리스마스 캐롤 아래 붐비는 인파 속의 쓸쓸함이었다. 나는 어떤 과거로 돌아가기 위하여 이 역에 내리게 된 것이었다.

1.

그러니까 지금부터 40여년 전의 일이었다...

부평역 바로 앞에, 그 많은 "양공주"들과, 웬지 모르게 시꺼멓게만 보이던 지저분한 집들과, 그 보다 더 시꺼먼 연탄공장과, 역시 시꺼먼 "찌푸" 승용차들이 "야매" 휘발유를 사기 위하여 밤이면 경인간 “시발” 택시들과 함께 줄줄이 서있던, 미군부대 기름창고가 있는 그 동네에, 어느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

남자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 여자는 아파서 온종일 방구석에 누워있었다고만 했다. 딸 아이 하나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그렇게 지냈다. 아이가 기억하는 것은 아빠의 큰 키와 아빠의 큰 손과, 어두운 방 속의 엄마와, 엄마가 입고 있던 - 아마 싸구려 "몸뻬" - 바지의 무늬라고 했다. 아빠에게는 "엄마"가 둘이 더 있었다고 했다. 어느 날인가는 배다른 자매 둘이 다른 엄마를 따라 집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던 듯 싶다고도 했다.

아이가 여섯 살쯤 되던 해, 아빠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부평 "성심동원"이라는 고아원에 갔다. 그곳에 버리기 전에, 아빠는 분명히 아이에게 맛있는 짜장면 한 그릇을 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롯데 껌 하나를 아빠의 큰 손으로 잘 벗겨 아이의 입 안에 쏙 넣어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울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이 여자 아이가 가족에 대해 간직한 추억의 전부이다.

그 아이는 자기 집이 고아원에서 불과 오분 거리도 안될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고아원의 벽이 막고 있는 바깥 세상은, 그리고 그 과거 속의 아빠와 엄마는, 아이에게 너무나 멀기만 했다. 부모와 사랑은 멀리 떠난 어떤 것이었다. 아이는 고아원에서 "여기는 사랑의 집 성심동원..." 같은 노래를 배웠다. 그리고 "부잣집 아이"들에 대하여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조차도 모르는 질투와 증오를 느끼면서, 자기와 같은 고아들은 차라리 없는 것보다도 하찮은 존재(less than nothing)라고 생각하며, 근처 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아이는 칠판 위에 걸려있던 박정희의 사진을 기억한다. 늑대로 그려져 있던 김일성과 공비들을 기억한다. 그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다른 아이들과 놀지도 못하고 바로 고아원으로 뛰어가야만 했다. 그래서 친한 동무도 친절한 선생님의 모습도 - 만일 그런 인정들이 있기라도 했었다면 - 너무나 아련하여 잡히지 않는다. 그 아이의 머리에는 "원장 여사님"의 무서운 모습만 새겨져 있다. 그 아이에게 학교는 자기가 가장 천대 받는 고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고통의 장소일 뿐이었다.



1978년 1월 14일. 5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홀트복지회를 통하여 그 아이는 프랑스 중부 리용 근처 소도시의 어느 양엄마에게 팔려가듯 보내졌다. 한 살짜리 눈도 못 뜬 갓난아기도 아니고 이제 곧 사춘기에 들어설 소녀에게 새로운 모국은 역시 어려운 환경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버림받은 소공녀라고 여겼고, 언젠가는 먼 외국 땅에서 돈을 많이 많이 벌어온 아빠가, 아니, 아빠가 아니라면 백마를 탄 왕자님이라도, 자신을 구해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철없는 부잣집 딸내미들보다도 더 철없게, 부르조아의 천박함을 화려함이라고 동경하며, 그녀는 공주병에 빠져갔다. 그러나 짝짝거리며 껌을 씹어대는 소리와, 한 손에 젓가락 숟가락을 둘 다 쥐고서도 행여나 빼앗길 듯 재빨리 반찬을 참새처럼 쪼아먹는 가장 한국적인 아줌마의 우아함은, 그녀의 배고팠던 과거도 가난했던 조국도 배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녀는 결혼을 했고, 중학교에 다니는 두 딸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프랑스인 남편은 작은 도시의 작은 공장 주인이고, 시의원이며, 앞으로 시장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정치를 하는 자기 남편을 "스탈린"이라고 부른다. 왜냐면 그녀에게는 자기처럼 못살았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을 가까이 하는 자체가, 가난했던 자신의 감추고 싶은 과거를 드러내는 치욕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30여년 전 지워져야 할 기억의 수첩 속에서 그녀는 공주여야 했다. 그녀는 자기가 공주처럼 대접 받아야 할 권리가 있으며, 이미 그 댓가를 지불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분명히, 그녀의 과거는 현재라는 이기(利己) 속에서 죽었다. 그녀의 이름은 "노에미"이고, 그녀의 이름은 "윤미경"이었다. 그녀의 생일은 1966년 2월 2일로 적혀져 있다.

2.

나이 마흔이 되던 해 그녀는 30년 전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볼 생각을 했다. 나를 낳아준 모국에의 사랑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나를 팔아 버린 나라에 무슨 애증조차 남아 있을까. 나의 여행은 나의 과거로의 회귀일 뿐이다. 이제 나는 그 무섭고 싫었던 원장 선생님의 얼굴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겼노라 생각했다. 일년 치의 여행비를 마련하고 30년 전 끌려왔던 그 반대의 길을 거슬러 왔다. 이곳은 대한민국이었고 이국보다 더 이국같은 서울이었다. 황량한 이곳에 그래도 남아있는 반가운 옛날이라면 아빠가 마지막으로 사주었을 롯데 껌 상표의 추억 뿐이었다.

그녀는 서울 명동의 기숙사에 방을 마련하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국민학교 때 교실 뒤에서 졸다가 벌받는 것만이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반항이었다지만, 그녀는 30여년 동안 단 한 마디도 쓰지 않았던 모국어를 불과 며칠 만에 되살려냈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어를 잘한다는 사실을 감추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 말 중국어나 독일어를 며칠 만에 유창하게 했다면 그것은 축복받은 재능이겠지만, 나를 버린 부모의 말을 아직도 마음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재능이 아니라 분명히 나를 지긋지긋 따라다니는 고통이며 저주일 뿐.

결국, 결국 과거와 마주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 용기란 용서였다. 나를 버린 부모를, 나의 어린 시절을 유폐시킨 고아원을, 나를 발톱의 때 만큼도 여기지 않았던 선생들과 동무들에 대한, 그 상처의 기억에 대한 용서였다. 아니 고아원에 버려질 때 아빠에게 매달려 울지 못했던, 학교에서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에게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던, 바보 같고 X신 같고, 이 세상의 어떤 욕을 퍼붓더라도 시원치 않을 나쁜 년, 내 자신에 대한 용서였다.

왜 엄마는 아빠가 나를 고아원으로 끌고 갈 때 눈물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을까. 아무리 먹고 살기가 고달프다 하더라도, 차라리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는 것이 아이에게 미군부대의 전지분유와 옥수수빵이라도 먹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식을 내팽개칠 수 있는 부모는 과연 부모인가. 그 부모를 용서해야만 하는가. 그러나 내가 용서하는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래도 그녀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보고 싶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가족 사랑의 위선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나에게 가족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그런 가족으로 하여금 나를 이 세상에 떨어트려 놓은, 할렐루야! 신(神)의 사랑이란 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면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그녀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찾고 싶었다. 그것은 운명의 무의미와 부조리에 대한 탐구였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둘러싼 허무에 대한 확인이었다.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는...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처럼... 결국 완전한 무(無)일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완전한 우연이며, 나의 세계는 오직 나라는 존재의 원점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天上天下 唯我獨尊. 그녀가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부모의 희미한 자취가 아니라 부모가 없다는 확연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원점(原點)으로서의 그녀 자신이었다.

3.

우리는 윤미경의 고아원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녀의 본적으로 되어있는 인천시 북구 부평동 430번지 사회복지법인 부평성심동원. 그러나 30여년의 세월은 부평의 거의 모든 얼굴을 바꾸어 놓았다. 성심동원은 커녕 430번지 자체가 아예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그 자리가 농협이 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고아원이 있었을 법한 산곡입구 삼거리 431번지의 근처에는 농협이 아니라 하이마트만이 서있었다. 대법원 등기부를 찾아 보았다. 유일한 430번의 잔해, 430-3번지는 부평역 철도부지에 붙어있는 잊혀진 작은 땅이었다. 그곳은 현재의 431번지에서 너무나 멀었다.



http://www.seongsim.or.kr/ 1951년 창설되어 전쟁고아들을 돌봐왔었다는 성심동원도 이미 1979년 정신박약아 교육기관인 성심학교가 되어 멀리 경기도 오산시로 옮겨갔다. 그러면서 고아보육 당시의 거의 모든 서류는 분실되었다고 했다. 어려웠던 시절, 해외에 고아들을 입양시킨다는 것은 사실 어린 아이라는 상품을 외국으로 수출하는 것과 같았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돈을 위하여 영혼과 생명을 팔았었고, 아직도 팔고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인정이 넘쳐 흐르는 우리의 조국이었다. 많은 고아원들에게는 감춰야 할 잔혹과 검은 돈의 역사가 있었다. 성심동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당시의 "원장 여사님"도 이후, 아마 돈 문제로, 감옥에 갔었다는 말도 들렸다.

윤미경의 고아원 서류도 조작이 된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기억은 국민학교 입학 전인 여섯 살 무렵 고아원에 들어간 것 같다고 더듬었으나, 입원서류는 불과 두 살 때인 1968년에 아이가 입원한 것처럼, 그러나 훨씬 뒤 1976년 7월 8일에나 작성되어졌다. 1976년 5월 27일 성심동원이 홀트아동복지회에 해외입양승낙서를 보낸 것으로 보아, 애시당초 있지도 않았던 입원서류를 부랴부랴 만들어 첨부시켰을 것이다. 그녀의 호적은 1975년 7월 3일 법원의 허가에 의하여 생일을 1966년 2월 2일로 추정하고 성을 尹 본을 坡平으로 창설함이라고 쓰여져 있다. 아마 그녀의 생일은 1966년 2월 2일도 아니고 윤씨에게서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윤미경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창조는 다만 허구의 말일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태초에 말씀만이 계셨느니라... 요한 1:1.



http://www.bh.es.kr/ 윤미경이 다녔던 학교는 부평동 171번지의, 1963년에 설립된, 부흥초등학교였다. 그녀는 1973년 3월 5일 1학년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있고, 1978년 2월 24일 5학년을 수료한 것으로 되어있다. 성적표와 생활기록부는 열람할 수 없었으나, 성심동원에서 보내는 고아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부모에 대한 어떠한 기록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부흥초교는 성심동원이 있었다는 곳으로부터 꽤 멀었다. 성심동원이 현재의 431번지 쪽이 아니라, 부평역 동쪽 철도부지 기슭의 430번지, 지금의 골프연습장 쯤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에 있든지, 고아원에서 학교까지는 10분 내외의 거리인데, 그 길을 무려 오년 간을 왔다갔다 하면서, 아이에게는 집으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을까. 누워있는 엄마를 보고 싶지도 않았을까. 커다란 아빠가 무서웠기 때문일까.

4.

우리는 부흥초교에서 굴다리 오거리 방향으로 하여, 예전 못살던 사람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을 부평역 철로변 쪽을 가보았다. 비록 삭막한 현대의 아파트들이 마치 동키호테의 거대한 풍차처럼 침략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가난한 여행객을 맞아주는 이 세상의 어느 역 근처나 마찬가지로, 아직도 나지막한 집들과 지저분한 구멍가게 그리고 이제는 모텔로 간판을 바꿔 단 여인숙들이 예전 술취한 "지아이"들의 워카와 "양공주"들의 하이힐 소리를 들리게 하는 듯 했다. 그곳의 시각은 30년 전에 멈추어져 있었다. 불과 백여미터 저 쪽에는 발전이란 굉음이 귀를 찢어대고 있었으나, 부평에서 가장 번화한 곳의 바로 발 아래에는 경쟁이 추월해버린 늙고 가난한 파지주이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가끔 서울 쪽으로 노가다를 나가는 아저씨들과 근처 식당의 잡일을 하는 아줌마들의 세계가 마치 깊은 산골의 마을처럼 쓸쓸하게 그러나 아늑하게 숨어 있었다.



윤미경은 과거 속으로 빠져가는 듯 했다. 그렇고 그렇게 생긴 몇 채의 낡은 집들이 그녀에게 다만 연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그녀가 살았던 거리였던 것인지... 그녀는 자기 집 앞에 불을 뿜어대는 공장이 기억난다고 했다. 동네에서 나이든 사람을 찾았다. 파지를 주워 파는 할머니가 30여년째 그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또 부평중부교회 뒤에 사는 어느 할아버지를 찾아주었다. 현대 더로프트 아파트 자리 쯤에 정말 연탄공장 하나가 있었다고 했다. 양은공장이나 철공소도 근처에 하나 있었던 듯 하다고 했다.

우리의 주위에 동네 사람들 몇몇이 모여들었다. 어떤 할머니들은 윤미경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불쌍하다고 또 대견하다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지나간 옛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김포에서 농사 짓다가 왔다는 어느 사내에게 마누라가 둘인지 셋인지 되었는데, 그들이 살았던 집이 바로 연탄공장 앞 지금은 헐려서 주차장이 된 182-20번지 였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은 윤미경의 얼굴에서 그녀의 엄마라는 여자를 알아보았다. 아니 알아보려고 노력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그 시절 뜨내기들의 사연은 모두 비슷비슷하였고, 비극도 비슷비슷하였을 것이다. 그들 자신이 일거리를 찾아 부평까지 흘러왔었으며, 30년 40년이 지나도록 부평역 철로변 싸구려 동네를 벗어나지 못한 채 그렇게 제2의 고향 삼아 살아왔던 영원한 외지인들이었다.

키가 크고 허우대 좋던 윤씨였지 아마... 그 사내가 뭐하던 사람이었습니까... 건달이지 뭐. 다행히 노에미는 "건달"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으며 나는 그 뜻을 통역해주지도 않았다. 윤씨는 나중 산곡동인지 가좌동 쪽으로 이사를 갔다고 했으며, 윤씨의 여자가 부평역 동네에 가끔 놀러오기도 했다고 했다. 그 여자를 윤미경이 닮았다는 것이었다. 윤미경의 엄마가 딸을 고아원에 보내야 할 정도로 아팠었다면, 어떻게 몸이 회복될 수 있었으며, 회복된 후에 딸을 다시 찾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았는지... 윤씨의 여자가 윤미경의 엄마가 아니라면 왜 닮았다고들 그러는지... 결국 동네 사람들 아무도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윤씨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니, 영원한 외지인들은 30년간 이웃으로 지내온 서로에 대해서 영원한 타인들이었다. 물론 윤미경이 고아원에 보내졌던 사연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윤씨가 십오륙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는 소식은 들었다고 했다.

5.

나는 윤씨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러나 부평구청의 그 어느 공무원도 1966년에서 1975년 사이 부평역 182번지 근처에 살던 윤씨 성을 가진 사람을 찾아주지 못했으며, 찾으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윤미경의 사연에 슬픈 눈빛을 할 뿐, 온갖 무책임하고 비인간적인 규정을 들먹거리며, 상부지시 외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못하는 무능력자들이었다.

국민의 모든 신상이 이미 오래 전 전산화되어 있는 전체주의 국가, 스스로 아이티 강국임을 뽐내는 대한민국, 그러나 문명의 이기는 오직 관료주의의 편의와 인민의 착취 그리고 자유의 탄압을 위하여만 쓰이는 독재와 독점의 나라. 주민등록 데이터베이스에서 1970년경 부평역 근처에 살던 윤씨 성의 남자를 찾는 것이 무엇 그리 어려운 기술이라도 되는지... 사람을 찾기 위한 행정절차도 가르쳐주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경찰서에도 갔다. 하지만 우리의 질문은 평소 무소불위를 뽐내는 경찰의 권한 밖이었다. 또 어디로 어디로 가보라고 했다. 마침내... 관공서의 미로를 돌고 돌아 우리가 도착한 것은 우리의 출발점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벽 관료집단 앞에서, 그들의 경멸적인 공손과 친절 앞에서,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분노와 좌절 뿐이었다.

아마 변호사를 쓰든지... 구청에 무슨 "빽"이라도 있든지... 국회의원이라도 찾아야 하나... 이처럼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것 같은 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일에도,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친지와 동문을 찾아 "빽"을 동원해야만 하나... 입양아 윤미경의 35년만의 부모찾기는 구청장이나 국회의원의 이미지 메이킹에도 좋은 "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막말로 매스컴을 타게 할 정도로 좀 신파조의 시나리오까지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눈 앞에 굴러 들어온 떡 마저 주워먹을 수 있을 정도의 두뇌회전도 안되는, 두뇌의 사용 자체가 거세된, 내시들이었다. 이것이 이 나라의 공무원이었다. 아! 대-한민국.

6.

http://www.iros.go.kr/ 타인의 주민등록정보에 접할 수 없을 때, 주소지 만으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대법원의 전자화된 등기부였다. 인천시 부평동 182번지 근처에 살았다면, 그리고 혹시 그 땅의 소유주였다면, 윤미경의 부(父)는 토지등기부에 이름이 나와야 할 것이었다. 물론 셋방을 전전하는 프롤레타리아는 국가기록에서 잊혀져 있다. 부르조아만이 자본주의의 역사에 남는다. 그 근처 일대의 토지와 건물 등기부를 모조리 떼어 보았다. 인천시 부평동 182-20번지의 토지 등기부에 과연 윤씨라는 성을 가진 인물이 등장했다. 윤인섭이라는 이름이었다. 윤미경의 과거 만큼이나 182-20번지의 내력도 복잡했다.



182-20번지 220평 4홉의 땅은 원래 전순룡이라는 사람의 소유였다. 그가 1964년부터 1966년까지 최승전 (1964.4.20, 80/322 지분매입), 윤인섭 (1965.9.1, 85/322), 이연근 (1965.9.1, 57/322), 김윤영 (1966.6.5, 100/322) 4명에게 땅을 나누어 판다. 이어 최승전은 자기 지분 80/322 중 62를 장순석에게 넘기고 (1966.12.27), 장순석은 그 땅을 다시 최광윤에게 되넘긴다 (1971.11.18). 이들은 아마 그 땅에 허름한 판잣집을 짓고 살았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무단으로 점유된 땅을 어찌할 수 없어서, 부재지주가 주민들에게 땅 전체를 넘기고, 서로 알아서 나눠 가지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복잡한 지분관계에 서로 얽혀져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 중 두 번째로 땅을 많이 차지했던 윤인섭의 지분 약 58평은 파란만장한 기록을 남긴다. 1972년 4월 18일 그의 지분은 국민은행에게 경락된다. 2년 후 (1974.3.15), 윤인섭은 땅을 되찾자 마자, 겨우 닷새 후 김수명에게 판다 (1974.3.20). 그리고 6년 사이에 그 땅은 무려 5번이나 더 주인을 바꾼다. 박용학 (1974.12.28), 백영희 (1977.1.20), 박순자 (1978.6.5), 전남희(1979.6.5), 정분하 (1980.10.10). 그리고 송내동 새마을금고 (1996.7.26)의 소유가 되었다가 마지막으로 김창서가 매입한다 (1999.3.7). 이연근의 땅 39평은 두 아들에게 분할상속되었다가 (1977.1.17), 역시 김창서에게 팔린다 (2003.5.28). 최광윤의 땅 42평도 김창서에게 팔리게 된다 (2004.1.3).



이상한 점은 위의 등장인물들 중 많은 사람들이, 당시는 성심동원이 있던 자리, 그러나 지금은 지도상에 없는, 부평동 430번지에 주소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윤인섭 (430-1번지), 이연근 (430), 김윤영 (430-1)을 비롯하여, 이후 윤인섭의 땅을 사고 팔았던 김수명, 박용학, 백영희, 박순자, 정남희의 다섯명 모두가 부평동 430번지의 주민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고아원과 무슨 관계가 있었을까? 무슨 이유 때문에, 별로 크게 가치도 없는 철로변 땅의, 게다가 전체도 아닌 지분이, 거의 매년마다 주인을 바꿔야만 했을까? 윤인섭은 다만 고아원의 관계자였을 뿐이고, 윤미경은 우연히 윤씨라는 성을 부여받았던 것 뿐일까? 연탄공장의 추억은 고아원 너머 보았던 풍경을 마치 집에서 보았던 듯 착각했던 것일까? 윤미경은 서류에서처럼 6세가 아니라 2세 때 고아원에 들어왔으며, 고아원 이전의 기억이란 전혀 있을 수 없고, 그저 고아원에서 일하는 윤씨 아저씨를 아빠라고 상상하며 불운한 공주의 과거를 꾸며냈던 것일까?

그러나, 등기부의 윤인섭이 분명히 국민은행에 땅을 저당 잡히고 빚을 얻어 쓴 후, 다시 은행에게서 땅을 되사다가 김수명에게 땅을 되팔았던 시기는 - 아마 윤인섭이 김수명에게 은행 땅을 팔고서는 어떻게 서류상으로 자기 땅을 판 것처럼 은행 내부의 누군가와 꾸민 것인지도 모른다 - 윤미경의 가족이 집에서 내쫒겨나던 무렵과 거의 일치한다. 그녀는 집마당에 내팽개쳐진 가재도구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간 기억은 없다고 했다. 아마 그녀의 부가 누구에겐가 돈을 빌려 은행 이자를 갚을 수 있는 동안, 은행은 그녀의 가족이 계속 그 집에 살 수 있도록 묵과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도저히 더 이상 빚을 감당할 형편이 못되자 윤미경의 부는 딸을 고아원에 맡기고 도망갔으며, 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린 은행은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사람과 합의하여 서류상의 토지매매를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 때의 채권채무 당사자들이 바로 윤인섭과 김수명인지도 모른다.

7.

나의 추적은 여기에서 끝이 났다.

만일 윤미경의 부가 진짜로 윤인섭이라 해도, 이미 오래 전 사망하였을 이 사람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란 이제 오직 접근할 수 없는 관공서의 육중한 캐비넷 속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를 동원하여 행정소송을 청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라는 존재가 없음에 만족하려는 그녀에게 부모를 찾기 위한 고통의 길을 걸어보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녀는 다만 어디선가, 마치 어느날 바람에 실린 낙엽 한 장이 발 밑에 떨어져 있듯, 잊혀진 부모의 이름과 사망을 알리는 편지 한 장이 우편함에 던져져 있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고 미워했던 부모에 대해, 아니 자신에 대해, 모든 감정의 덧없음 만을 느낄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걸어온 여정(旅程)의 의미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려니... 1:6.

8.

나는 20여년 전, 앵커리지를 거쳐 파리로 가는 비행기의 이등칸에서, 프랑스로 실려가는 어느 세 아이를 본 적이 있다. 당시에는 입양아를 데려다 주면 아마 비행기표 값을 좀 싸게 해주는 제도가 있어서 돈 없는 유학생들이 그런 슬픈 일을 도맡곤 했다. 내 옆에도 세 아이와 보호자처럼 보이는 여자가 타고 있었다. 갓난 아이는 여자의 시트 앞에 걸린 바구니 속에서 잠이 들었고, 두꺼운 원서 책 속에 빠져 있는 - 아니면 읽는 척을 하는 것이었던지 - 여자의 옆 자리에서, 서너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의 칭얼거림을 일곱 살쯤의 여자 아이가 달래주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어른스러운 여자 아이를 내 생전 만난 적이 없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곧 예쁜 새엄마가 맛있는 과자랑 재밌는 장난감이랑 많이 많이 사줄 것이라고, 그러니 선생님 말 잘 듣고 얌전히 있자고... 그런 내용의 대화였다.

남자 아이는 울고 있었는데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여자 아이는 울음을 참으며 남자 아이에게 울지 말라고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그 아이들은 곧 헤어질 운명이었다.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을 어린 두 아이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저 짧은 인생에 저 작은 아이들이 벌써 얼마나 많은 이별의 슬픔을 겪어야 하는지...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어두운 비행기 객석에 파묻혀, 나는 내 생애 처음, 소리도 없이 울었다. 인간의 감정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최전방의 전쟁기계로서, 최악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도 오로지 무표정으로 극복했던 나의 눈으로. 그러나 나의 눈물은 연민이 아니라 분노였다. 야속한 과거처럼 엄마가 버린 아이들. 기약 없는 미래처럼 새엄마를 찾아가는 아이들. 이 나라가 버린 아이들. 배에 실려 먼 나라로 보내지는 아이들... 하나 밖에 없는 누이에게서 떼내어져 따로 팔려가는 어린 흑인노예의 영화 장면이 겹쳐졌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민의 무책임과 부정의와 몰인정에 대한 분노를 눈물처럼 쏟게 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이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아이들을 마음 속에서 결코 잊어본 적이 없다. 그 아이들은 대한민국 국민의 하나로서 내가 영원히 가져야 할 부채(負債)이며 원죄(原罪)였다.

나는 좋은 부모를 잘 만난 덕에 어려움을 모르고 자라났지만, 젊은 날의 실패에 내 등을 두드려주시던 아버지의 늙은 손이 고목처럼 말랐는지도, 추운 날 자식에게 따뜻한 점심 도시락을 싸다 주겠다고 학교 문 밖에서 기다리시던 어머니의 멋낸 머리보자기 무늬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가진 기억이란 아버지의 꾸짖음에 대한 불효의 반항과 잔소리하는 어머니 앞에서 문을 쾅 닫고 집을 뛰쳐나간 것들 뿐이다. 비싼 장난감을 사주어도 곧 싫증 내고 또 더 좋은 것을 사달라 보채는 내 자식처럼, 나는 내 부모에 대하여 영원한 철부지일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식이 나에 대해 영원한 철부지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불행을 모르는 것, 그것이 행복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 아버지는 나를 고아원에 끌고 가시지 않았다. 물론 내 어머니는 자식에게 밥 한 끼 해주기는 커녕 옆집에서 얻어 먹던 길에서 줏어 먹던 그렇게 개처럼 내버려두시지 않았다. 그래서 행복에 겨웠던 나는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아니, 행복이란 것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라는 보금자리 속에서 그렇게 사랑받고 있었을 때, 같은 나라, 더구나 내가 뛰놀던 같은 동네의 한 쪽 구석에서는, 엄마들이 그곳에 가서 놀지 말라고 하시던 "지아이"와 "양공주"들의 야릇한 냄새가 나던 그 시꺼먼 골목에서는, 어떤 아빠가 아이를 고아원에 내버리기 위해 롯데 껌 하나를 입에 넣어주며 달래고 있었던 것이었다.

불행은 항상 우리의 발 밑에 떨어져 있다.

9.

1970년대 인천 부평 부흥초교에 다녔던 "윤미경"에 대한 추억을 가지셨거나, 또는 "윤미경"의 부모와 형제 및 친척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실 수 있는 분은 제게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mailto:szbae@free.fr


IP : 59.10.xxx.172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10.2.16 2:23 PM (211.104.xxx.37)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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