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친한 후배의 결혼을 축하해주려고요. 이거 광주에 있으니 다른 건 다 좋은데, 주말마다 결혼식 참석하는 게 일이군요. 물론 애를 보거나 집안 청소, 빨래 등을 하는 것보다는 그냥 고속버스에 앉아서 자거나 책을 보는 게 훨씬 쉬운 일이라서 힘들기보다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지만요. 아내와 제가 같은 대학을 나온 탓에 아는 친구, 선후배들이 거의 겹치는데, 저는 결혼식에서나마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지만, 아내는 그러지도 못하고 집에서 애 보고 있어야 되니 미안하네요. 선배들도 남자 선배들만 참석했는데, 제가 광주에서 올라온 것을 보고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시길래 '사실은 힘들기 보다는 집에서 벗어나는 것에 약간 해방감 같은 것도 느낀다. 아내에겐 미안하지만.'이라고 대답했더니 다들 강하게 공감하시더라구요. 음냐. 어쨌든 서울에 올라와서 시간이 남아 서점에 들러서 책을 좀 샀습니다. <안나 까레니나>도 사고, <직업으로서의 학문>, <직업으로서의 정치>도 사고, 뭐 이런 저런 책을 많이 샀습니다. 애 키우다 보니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야 하는 터라 서점에 갈 시간도 별로 없더라구요. ㅠ.ㅠ 오랜만에 서점 가니 좋더군요. @..@ 그리하여 광주로 내려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봤습니다. 전에 조국 교수님의 홈페이지에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라'는 베버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 것을 보았었는데, 그게 이 책에 있는 말이로군요. 이제서야 이 고전을 보다니...
베버는 학자가 되는 길의 외적-내적 조건에 관해서 말하면서, 특히 그 내적 조건에 관해서 열정과 소명의식을 말하면서 매우 인상적인 말을 합니다. 너무 좋아서 한 번 옮겨보겠습니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학문에 문외한인 모든 사람들로부터는 조롱을 당하는 저 기이한 도취, 저 열정,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 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너무 멋지더군요.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하다니...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 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다니... 게다가 베버의 이 강연이 행해진 시기는 1917년. 바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배가 확연하게 예견되는 상황으로서, 이 강연에 베버를 초청했던 학생들은 독일 국민들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위기 극복의 방법은 무엇인지에 관해서 '대가'인 베버께서 한 말씀 들려주시기를 강렬하게 바라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다시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엄격하게 구분하면서 학자란 열정과 소명의식을 가지고 사실판단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가치판단의 기초를 제공해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결코 섣부르게 가치판단이나 방향 내지는 위기 극복의 방법을 말하는 '예언자'나 '설교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대목에 이르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만화 <마스터 키튼>에서 2차 대전 중 독일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런던 거리에서 시민들을 위한 고고학 강의를 진행하면서 이럴 때일수록 고고학을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던 유리 교수님(키튼의 스승)이 생각나기도 하는 장면이더라구요.
저는 전성우 선생님이 번역하시고 나남출판사에서 출판된 문고판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보았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전성우 선생님의 강의를 들은 적은 없지만, 그 분의 책은 몇 권 사서 보았으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겠지요.) 이 책은 여러 가지가 마음에 들지만, 일단 문고판이라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싸고 휴대하기 간편하거든요. 제발 위대한 고전들은 모두 다 문고판으로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외국 <펭귄 클래식> 같은 것을 보면, 고전들도 다 문고판으로 나오던데, 우리는 어찌하여 하드커버 양장본이 이리 판을 치는지... 비싸고 무겁잖아요. 비싼 건 좀 봐주더라도 일단 책이 무거우면 휴대가 너무 불편합니다. 특히 저처럼 책상에 차분히 앉아서 책을 보는 건 잘 못하고 주로 지하철이나 버스로 이동하면서 책을 보는 게 편한 사람은 휴대하기 불편한 책은 잘 못읽어요... (음냐. 이건 그냥 내가 잘못된 건가... ㅠ.ㅠ) 아무튼 이 책은 문고판이어서 좋습니다. 게다가 역자인 전성우 선생님은 줄기차게 베버만 연구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전에 베버를 좀 읽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이 분의 책을 몇 권 샀었는데, (다 읽은 건 하나도 없지만;;;) 성실한 연구자구나... 하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분 중에 천병희 선생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개인적으로 강의를 듣거나 뵙거나 한 것은 전혀 아닌데요. 그 분은 그리스-로마 고전들을 번역하는 데, 평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엄청나게 많이 번역하셨어요. 가장 최근에 나온 책이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 우정에 관하여>인 것 같은데, 음냐 갑자기 하드커버 양장본으로 책을 내시는 바람에 좀 아쉬웠지만요. 이런 분이 있기에 우리나라가 좀 살만한 나라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분이야말로 진짜 '소명의식'을 가지신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읽으면서 내내 천병희 선생님이 떠오르더군요. 대학 다니던 시절 존경했던 로마법 선생님도 떠오르고요.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대한 본격적인 독후감을 쓰기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한인섭 선생님께서 홈페이지에 <레미제라블> 독후감을 아주 재밌게 써놓으셨습니다. 특히 어릴 때 전혀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읽었던 '바리케이드의 밤' 부분이 대학에 와서 학생운동을 하게 되면서 완벽하게 이해가 되었으며,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맛이 난다고 쓰신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한인섭 선생님은 <레미제라블>을 (어렸을 때 읽으신 것만으로도) 대충 한 300번은 읽으신 것 같더군요. 고전은 읽고 또 읽어도 재밌는 책이니까요. 한 번 읽기가 워낙 어려워서 그렇지... 아무튼 저도 이 책을 한 100번은 읽어야 그나마 조금 (제대로 된) 독후감 비슷한 것이라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읽고 어제 기분이 너무 좋았었는데, 어제의 그 기분을 82님들과 함께 나눠 보고자 한 번 글을 써봤습니다. 혹시 아직 안보신 분들 꼭 보세요~~~~~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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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읽고
하늘을 날자 조회수 : 633
작성일 : 2009-04-20 08:51:28
IP : 121.65.xxx.253
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리플리
'09.4.20 9:32 AM (211.216.xxx.197)대학때 시도하다 말았었는데.. 재미있으셨다니, 기본 내공이 있는 분이신가봐요.
으홍.. 저도 애키우다 보니 사회과학 서적과는 담쌓은지 오래......
그 쪽의 촉이 무뎌지는게 느껴지는 요즘이네요.
그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저에게도 필요해요.... 흥....2. 하늘을 날자
'09.4.20 9:46 AM (121.65.xxx.253)리플리님/ '시도하다가 포기하기'가 제 특기인데...;;; 이건 좀 얇은 책이니까요. 게다가 고속버스 안이라는, 잠도 더이상 안오고 바깥 풍경만 바라보는 것도 너무나 지겨워져서 책이라도 읽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티기 힘든 그런 상황이었으니 읽을 수 있었던 거죠.;;;
어떤 계기든 꼭 만드셔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해내시고, 기운내시길~~~ 음냐. 아무튼 애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에공.;;;3. ^^
'09.4.20 2:02 PM (59.27.xxx.191)글 잘 읽었습니다~소개해주신 책 읽어보려고요. 글 많이 많이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하늘을 날자
'09.4.21 8:05 AM (121.65.xxx.253)^^님/ 오!!! 제가 소개한 책을 읽어볼 마음이 드셨다니... 너무 즐거운데요. (아직 읽지 않은 분이시라면,) 한 분이라도 읽어볼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것이 제가 글을 쓴 목적 중의 하나였는데... 드디어 한 번 성공했는가... ㅠ.ㅠ (감격) 아무튼 즐거운 독서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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