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전투를 주도했고 항일무장투쟁 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며 대대적으로 선전해오고 있는 보천보전투의 진실, 김일성의 실체를 밝힌다.
<증거1>
보천보 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장군을 연구하다 3년전 타계한 이명영 교수(전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는 그의 저서 ‘김일성 열전’(1974년 출간, 신문화사)을 통해 북한의 조작사실을 밝혔다.
이 교수는 저서에서 “보천보 전투의 김일성 장군은 1887년 태어난 일본육사 출신의 본명이 김광서라는 사람”이고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정권이 해방후 북한의 공산정권수립에 용이하게 사용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당시 소련의 지휘하에서 훈련받았던 만주의 공산유격대 출신인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본명은 김성주(金聖柱)이고, 북한에 들어와서 처음엔 김영환(金英煥)이란 (變名)변명으로 행세했었다.
이후 1945년 10월 11~12일, 소련군 정치사령부 로마넨코 소장의 각본으로 평양시내 ‘다미야’라는 일본 요리집 자리에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위원장 조만식) 멤버들에게 김성주가 처음으로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이른바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가 열렸고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으로 행세케하여 김성주가김일성장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증거2>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평안남도 양덕이 고향인 전 평안남도지사 박인각(87)씨는 “연설에 앞서 스치차코프 점령군사령관(대장)이 그를 김일성장군이라고 소개했으나 참석했던 사람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증거3>
‘김일성 평전 속(續)’을 내며 김일성을 연구하고 있는 허동찬(70·현 고대 북한학과) 교수는
재일동포로 조총련의 일본내 조선대학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가르친 바 있다.
허교수는 “보천보 전투 후 김일성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며 “그 후 4개월 뒤에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이 다시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말했다.
<증거4>
또 1945년 해방신문의 기자로 동란 후 월북, 북한 외무성의 국장까지 지냈던 박갑동(82)씨도 있다. 그는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 전투에 참가했다 일본군에게 잡혀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중이던 박달과 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속 인물이 김일성장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했다”며 “박달과 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의 일본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온통 거짓과 선동과 우상화로 시작된 저 북쪽의 반국가단체, 반란단체, 반역집단이 무너지는 것.
진실은 밝혀진다! 진리는 승리한다는 것을 60년 넘게 기다려온 대한민국은 반드시 목도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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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투쟁의 주역 김일성 장군은
safiplease 조회수 : 198
작성일 : 2011-08-17 16:28:49
IP : 220.79.xxx.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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