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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아 '3월의 마치', 최은영, 조해진, 줄리안 반스 그리고 눈폭풍

... 조회수 : 288
작성일 : 2026-02-27 01:28:01

저는 미국 매사츄세츠 주에 살고 있어요. 제 시간으로 지난 일요일 밤부터 월요일 늦은 밤까지 25시간 동안 시속 100에서 110 킬로미터의 바람과 더불어 눈이 90cm 가 넘게 왔어요. 

눈폭풍 예보가 있은 후부터 소형 발전기, 제설장비를 준비하고, 정전이 될 것은 당연하니 읽을 책들을 준비했어요. 

 

몇 년 전부터 노안이 와서 e-book 으로 주로 책을 읽었는데, 작년부터 괜한 부끄러움을 버리고 좋아하는 작가 책은 큰 글자 책을 사서 보기 시작했어요. 

줄리안 반스의 글은 큰 글자로 재발행 된 것들이 많아서 다시 손에 책을 들고 읽을 수 있게 되어 기뻤어요. 

제가 아날로그형 인간이어서 그런지 내 손에 물성을 지닌 책을 들고 글을 읽으면 묵직한 글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되는 느낌을 받아요. 

 

departure(s) 라는 제목의 이번 신간은 그가 가진 특유와 유머와 비틀어 보기가 잘 섞여서 술술 잘 읽혔는데, 몇 장 지나지 않아서 - 이 책은 나의 마지막 책이 될 것이다- 라는 말이 쓰여 있었어요. 

그 문장을 보니 마음이 쿵 내려앉아 더 이상 책을 읽기가 힘들었어요. 

책을 다 읽기 전이었는데도 아까워서 읽지 못하는 마음과 아쉬움이 짙게 들고, 그를 떠나 보내기 전인데도 그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슬펐어요. 

 

아 어쩌나 하다가 지금은 술술 잘 읽힐 책이 필요해 하면서 정한아의 '3월의 마치' 를 읽었는데, 정한아는 젊은 이야기꾼 같아요. 리틀 시카고도 좋고, 달의 바다, 친밀한 이방인 모두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능력이 큰 작가인데, 3월의 마치에서는 작가가 설정한 뻔한 상징이 그 뻔함을 스스로 이겨내는 힘을 보이네요.

3월의 마치를 다 읽고 어떤 소재에 대한 연상작용으로 최은영 소설집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를 읽었어요. 

좋은 작가의 말은 단어의 뜻를 일상의 언어로 재정의 해주기도 해요.

 

-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최은영  '일 년'중에서

최은영을 다 읽고 나서는 얼마 전 어느 댓글님 덕에 잊고 있던 조해진 작가가 생각나서 '빛의 호위'를 다시 읽었어요. 다시 읽으면 더 좋은 글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에요. '빛의 호위'와 최은영 작가의 '몫' 은 또 다른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허리케인급의 바람이 눈과 함께 24시간을 휩쓰니 모든 건물은 재난영화에서 본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어요. 건물 외벽이 큰 자석이 되어 눈이 그대로 바람의 모양대로 달라 붙어서 이 바람이 조금만 더 계속되면 부서진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겠다 싶었어요. 

 

제설작업을 위해 모든 거리는 운전금지령이 내리고 전기는 5분마다 나갔다 돌아왔다 하는데, 완전한 정전이 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생각했는데, 다음 날 아침 뉴스에서 본 지역의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해서 다행이라는 말은 차마 내뱉을 수가 없었어요. 지역주민의 90퍼센트가 전기를 잃은 상황이었거든요. 

남편은 제설기를 들고 나가서 제설기 없는 집들의 드라이브웨이를 치워주고, 저는 노부부만 남은 이웃집들에 걸어가서 눈을 치우고 그렇게 5시간 넘게 둘이 눈을 치웠는데, 이상하게 지치지가 않았어요. 노동주를 마시고 일한 영향도 있고, 마침 전날 제가 읽은 책들이 모두 돌봄을 이야기하고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어요. 

정전으로 커뮤니티 센터에서 밤을 보내신 분들에게 보내려고 집에 있는 모든 재료를 털어서 치킨스프, 비프스튜를 만들고 나니 더 뭘 만들 재료가 사라져서 고민하다가 이탈리안 웨딩스프까지 만들어서 가지고 갔더니 거기 계신 어떤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스프를 눈폭풍이 와서 먹네 하면서 껄껄 웃으셔서 다들 즐거웠어요. 제가 가기 전에도 이미 여러 분들이 다녀가셔서 그분들의 마음을 같이 느끼는 것으로 또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화요일 오후가 되었는데, 정전지도를 살피던 남편이 조지 아저씨네 아직 전기복구가 안된 지역이라고 하면서 저희 집에 모시고 와야겠다 했어요. 음. 우리 조지 아저씨는 고집도 세고, 더군다나 약간의 뇌졸증 후에 운전도 그만두셔서 집에 혼자 계실 것이 뻔했어요. 역시나 전화했더니 나 지금 스웨셔츠 두 개에 플라넬 셔츠 두 개 입고 있어서 안춥다 하시고는 안온다 하는 것을 우리 집에 맥주 많아요로 꼬셔서 겨우 모시고 왔어요. 조금 전에 전기복구 되어서 집에 모셔다 드리고 저는 간만에 82에 들어왔습니다. 

 

눈폭풍 속에서 고요함을 잃지 않게 또 지치지 않게 오염되지 않은 말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여러모로 감사한 며칠이었어요. 

 

 

 

IP : 71.184.xxx.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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