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18때 거기에 있었다. 아니 그곳을 지나만 가고 있었을 뿐이었다.
부산에서 우리 가족은 겨우 직계가족만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뤘다.
장례차가 장지인 전라북도로 가기 위해서 부산에서 진주로, 다시
하동을 지나 구례로 들어설 때였다. 군인들이 길을 막았다.
장의차에 올라 타 총부리를 겨누며 우리식구들을 한명 한명 훌 터 나갔다.
대학원 다니던 오빠의 얼굴은 희다 못해 잿빛이 되고 팅팅부은 우리 자식들 눈들은
죄인인양 겁에 질려 크게 뜨지도 못했다. 한마디도 못하고 있던 중에 한 군인이 윽박질렀다.
관 뚜껑을 열으라고 했다. 빨리 열어 보라고 소릴 질렀다.
그 때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던 나는 그 군인들의 눈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번뜩이던 눈, 악마의 살기가 느껴지던 눈동자, 사탄의 눈이 저럴거라는 생각이
그 절박한 순간에 내 마음에 박혀 아직도 생각하면 섬뜩하다....
그 눈동자의 살기는 그때까지 한번도 본 적이 없었고 지금까지도 없었다.
그 후로 나는 인간은 선함보다 잔악함이 더 많다고 믿는다.
단지 교육으로 사회성을 배우며 절제하고 감추고 살아 갈 뿐이다.
조용하고 조신하신 어머니의 귀를 찌르는 비명과 안된다는 몸부림의 고함에 움찔해진 젊은 군인들은
못이기는 척 우리를 통과시켜 주었었다. 그리고도 우리는 두어번 더 삼엄한 경비를 통과해
장지에 도착했다. 장례 안장을 준비하던 일꾼들도 먼 친척분들도 말이 없었다. 다 쉬쉬하며
말을 아꼈다. 무섭고 흉흉했다.
서둘러 장례를 마치고 우리는 빠르게 다음 날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식구들 아무도 그 상황들을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었다.
나중에서야 엄마는 그 때 오빠가 개머리판에 얻어터져 죽거나
내가 겁탈을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했다.
지금도 떠오르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래서 무조건 계엄은 안된다.
장갑차로 겁만 주려 했어도 계엄은 안된다.
견학 나온 수준의 계엄도 절대 아니된다.
우리에게 평생 두려움이라는 죄성을 심어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