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친구들이랑 '집안 자랑 배틀'이 붙었대요. 중3 남자아이인데요.
주로 할아버지가 뭐 하셨고 집안에 재산이 어느정도 있나 그런 걸 자랑했나봐요.
얘도 아는 만큼, 우리 할아버지 뭐 하셨고 엄마 친정은 서울의 어느 동네였고 거기까진 얘기 했나봐요. 그런데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해서요.
아빠쪽은 니가 아빠한테 직접 물어보고 엄마쪽은, 엄마의 친가쪽에는 서울대 나와서 직업적으로 성공하고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사신 삼촌들이 많은데 그거야 진부한 얘기고. 엄마의 외가가 독립운동 하던 집안이라서 좀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아. 엄마의 증조할아버지가 집안은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 하시느라 엄마의 할아버지는 굉장히 어렵게 자라셨는데 그래도 독립운동하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했어. 그 분은 광복을 못 보고 돌아가셨는데, 독립유공자 등록하라고 정부에서 연락이 왔더니 우리 할아버지가 거절하셨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는데 그런 거 등록해서 보상받을 이유 없다고. 자기 아버지가 독립운동 하시는 바람에 본인은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라셨는데 원망은 커녕. 그래도 고학으로 어찌저찌 학교 선생님이 되시고 대한민국 초기정부에 발탁되셨는데 어느날 정부에서 땅을 하사했대. 서울 시내에 일본인들이 버리고 떠난 노른자위 땅들이 많아서 공무원들이 먼저 나눠 가졌나봐. 종로인가 서울 중심부의 금싸라기 땅이었는데, 역시 우리 할아버지, 나는 이미 살고 있는 집이 있으니 땅이 필요 없소, 거절하시고 대신 할아버지가 부서장으로 있는 부서에 집이 없는 직원이 몇 명있나 조사해서 집 없는 부하직원 네 명한테 그 땅을 넷으로 나눠서 주셨대. 지금 애들이 좋아하는 북촌 서촌 아마 그 쪽이었나봐. 멋지지 않니?
이 부분에서 아이가 폭발했어요. 그걸 갖고 있었으면 우리가 지금쯤 잘 살았을거 아냐? 글쎄, 모르는 일이지. 어떻게 그렇게 바보같을 수가 있냐고 그 중에 1/4만 갖고 있었어도 좋았잖아, 화를 내길래요. 우리 할아버지는 자본주의가 정착되기 전에 태어나 성장하신 분이라 그런지 돈은 갖고 있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셨어. 돈 욕심 부리는 거 제일 천박하다고 생각하셨고. 돈이 생기면 무조건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한테 나눠 주셨어. 할아버지 덕분에 장학금으로 공부해서 집안을 일으킨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할아버지 장례식에 천여명이나 되는 인파가 모여서 가시는 길 손으로 흙을 고르면서 은혜를 갚고 싶다고 엉엉 우는 백발의 노인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할아버지는 조의금 일절 받지 말라고 하셨는데 통장에 보니 본인 장례식 치를 비용 정확히 계산해서 딱 그 돈만 남겨놓고 가셨어. 그런 인생 훌륭하지 않니?
이쯤 되니 아이가 거의 울다시피 하네요. 뭐 이런 집안이 다 있냐고.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왜 돈을 못 모았냐고요. 아이랑 진지하게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저는 나름 물질적인 가치 말고도 다른 의미가 많다고, 잘먹고 잘 사는게 인생의 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른 가치를 추구하고 저와 비슷한 가치관, 세계관을 가진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peer pressure인가요. 점점 더 돈돈, 집이 무슨 동네고 차가 뭐고 얘도 그런 걸 따지네요. 낯설고 혼란스럽고 속상해요. 이것도 하나의 과정일까요, 이러다 말면 좋겠는데, 아님 아이가 그냥 일반적인 가치를 쫓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걸까요. 제가 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