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4학년 때 14과목 중 9과목을 낙제 하여 유급 위기에 처하자 유급이 싫다고 학교를 중퇴하여 초등학교 중퇴로 학업을 마치고 오빠 게오르게(Gheorghe)와 같이 부쿠레슈티 로 이사를 가서 제약 공장, 다음에는 직물 공장의 비숙련 노동자가 되었다...
...1945년에 그녀는 외무성에서 비서로 일했으나 무능하다는 이유로 해고당했으며 1947년 12월 23일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결혼한 후 '아내는 남편보다 어려야 한다'는 생각에 서류상 생일을 1919년 1월 7일로 3년 늦춘 데다가 이름도 '엘레나'로 바꿨고 니콜라에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다.
그녀는 니콜라에를 공산당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그의 단점들을 고쳐 주었는데 특히 말을 심하게 더듬는 니콜라에를 위해 말더듬는 것을 교정하는 훈련을 시켰고 그 결과 완벽하지는 않지만 많은 부분이 고쳐졌다. 이렇게 그녀는 니콜라에의 참모이자 조언자로써 부족함이 없었으며 적어도 한 남성의 부인으로써는 내조를 잘 했기 때문에 니콜라에는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의존하게 되어 버렸다. 이는 차우셰스쿠의 집권 후 그녀가 고속 승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 외에는 다른 여성에게 관심이 전혀 없었던 니콜라에는 그녀에게 의지하면서도 그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대중 앞에서는 니콜라에에게 충실한 아내였지만 사석에서는 니콜라에를 남편으로 존중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대했다. 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식사시간이나 약속시간에 늦기라도 하면 차우셰스쿠는 안절부절 못하고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긴장하면 항상 그랬듯이 말 더듬는 습관이 튀어나왔고 땀까지 흘렸다."고 한다..."
(집권이후)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악행으로 알려진 것들의 많은 부분은 정확히는 그녀가 입안하고 남편이 실행한 것이었는데 '체계화 프로젝트'를 가장한 농촌 파괴, 민생 파탄을 동반한 1980년대의 긴축 정책, 부쿠레슈티의 사적지 무단 철거, 그리고 그 악명 높은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 등이 바로 그녀가 입안한 정책들이었다. 1985년 1월 20일에 그녀는 '에너지 절약'을 명분으로 루마니아의 국영 방송국인 텔레비지우네아 로므너 의 채널 2개(TVR1, TVR2) 중 TVR2를 폐국하도록 지시하고는 평일 TV 방송 시간도 오후 8시~오후 10시까지의 단 2시간 으로 줄였다. [11]
또 엘레나는 정치적으로도 남편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당시 공산당의 최고위 인사였던 [12]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Iosif Maurer, 1902~2000)의 증언에 따르면 "엘레나가 차우셰스쿠를 지배하고 있으며, 니콜라에는 엘레나가 말하고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한다. # 또 니콜라에는 연설을 할 때 마치 엘레나의 얼굴에서 인정을 구하려는 듯 아내에게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엘레나가 나중에 그를 비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먼저 엘레나와 상의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것을 피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니콜라에가 보는 모든 문서들은 엘레나의 손을 거쳐야 했다. # 미국에 망명했던 루마니아 시인 도린 투도란(Dorin Tudoran, 1945~)은 "엘레나는 매우 강력합니다. 그녀는 대통령보다 훨씬 더 많은 결정을 내릴 것입니다. 지난 10년 동안 루마니아 의회의 가장 중요한 법령은 엘레나 차우셰스쿠가 앉아 있는 2번 책상에서 나왔습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 사실상 말년의 엘레나는 김정일 , 말년의 니콜라에는 노년기의 김일성 포지션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 [13]..."
루마니아의 국영 TV 방송국은 전반적으로 평범한 외모를 가진 [15] 그녀를 스크린에 만족스럽게 나오게 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실제로 당시 루마니아의 TV에서는 큰 코를 가진 그녀의 옆모습을 송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물론 신문에 재현된 그녀의 도상 역시 그녀의 '미모와 젊음, 지적 능력'을 강조했는데 [16] 이를 위해 당시 루마니아의 언론은 그녀를 멀리서 촬영하거나 [17] '유리한' 각도에서 촬영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명확하게 식별할 수 없게 하거나 아예 조심스럽게 수정한 사진을 써야 했음에도 그녀의 모든 이미지들은 '광범위한 청중이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에 대한 세심한 검사를 받아야만 공개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사진사들은 그녀의 '미모와 젊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진 속의 주름을 없애고 코의 크기를 줄이는 등의 보정 작업을 해야만 했고 [18] 열악한 인쇄로 신문 속 그녀의 얼굴이 찢어지거나 얼룩이 생기면 신문 전체가 회수된 후 재인쇄를 거쳐야만 했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60세를 맞이한 1979년 에 한 시인은 그녀의 60세 생일에 '이 나라의 영부인은 모든 인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위대한 지도자 옆에 선 영부인은 루마니아가 나아갈 영광의 길을 굽어 살피신다.'는 글을 남겼고 루마니아의 소설가 겸 영화 대본 작가 에우젠 바르부 [24] 는 그녀를 '국가의 고귀한 여인'이라고 아첨한 데다 심지어 1983년 한 잡지는 '그녀의 주름에서 드러나는 온화한 에너지는 모든 예술의 영감이 된다'는 노골적인 아첨을 남겼다. 물론 후술할 내용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녀는 '상당한 지식과 인품을 가진 학자'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시인 코르넬리우 바딤 투도르(Corneliu Vadim Tudor, 1949~2015) [25] 가 쓴 차우셰스쿠 부부를 찬양하는 시 역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다.
......그녀가 오늘날까지 큰 비판을 받는 이유는 니콜라에의 괴팍한 독재와 실정에 협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는 그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니콜라에보다도 괴팍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그녀를 모시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인민 전부를 괴롭게 했다. 개인적인 내조에서 멈추었다면 아마 그녀는 '어쩌다 보니 괴팍하고 정신나간 남편을 둬서 내조한 죄 밖에 없는 아내'가 되었을 것이고 [26] 모든 분노를 피할 순 없더라도 최소한 거대한 인민들의 분노는 피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27] 학력 콤플렉스와 욕심이 화를 불렀으며 그녀는 거기서 멈출 성격이 아니었다.
니콜라에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자 오르자 그녀는 자신도 걸맞은 영부인이 되기 위해 화학 강좌에 참여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는 자기가 무식하니까 공부하겠다는 의지를 좋게 보고 문제점도 영부인의 학력 세탁으로 적당히 눈 감아줄 수 있는(?) 정도였다. 문제는 그녀가 학력 세탁 정도로 만족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 무식 함이 현장을 고통스럽게 했단 것이다...
...그녀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마친 봉제공 출신이라 무식에 한이 맺혔는지 남편의 집권 직후에 부쿠레슈티 중앙화학연구소 소장이 되자마자 그녀의 명의로 100개가 넘는 논문도 발표했고 명함도 신나게 뿌렸다. 물론 그녀가 썼다는 논문들은 전부 다른 학자들에게 쓰도록 지시한 후 그 논문들을 가로채 자신의 이름을 내걸어 출판한 것이다. 실제로 당시 화학연구소에서 일했던 한 학자는 '엘레나의 이름이 표면에 나타나지 않은 논문을 써서는 안 되며, 출판은 더더욱 안 된다'고 증언했고 그녀와 토론을 하기는 커녕 그녀를 본 적도 없었으며 연구가 끝난 후에도 그녀는 아무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이렇게 그녀는 실제로 부족한 만큼 공부하고 교양을 쌓아서 무지를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신 겉으로 드러나는 학위와 직함에만 집착했다. 그녀는 명령을 내려 다른 저자들 명의로 작성된 과학 논문들도 자신의 이름이 제1저자로 나오지 않으면 절대로 출판될 수 없게 했다....
...사실 그녀는 남편처럼 글을 겨우 읽고 쓸 줄 아는 수준이었다고 하며 그녀의 실태를 보면 (자신이 교정해 준 후의) 남편보다도 훨씬 무식했다. [33] 일단 닥치는 대로 공산주의 관련 책들을 탐독하며 공산주의를 이해하려는 시도라도 할 수 있던 남편과는 달리 그녀는 서류도 제대로 읽지 못해 그녀에게 보고를 해야 할 때에 그녀에게 서류를 보내는 대신 국무대신이 직접 그녀 앞에서 서류의 내용을 읽어주는 방식으로 해야 했던 것은 물론, 심지어 어설프게나마 서류를 작성할 수 있었던 남편과는 달리 [34] 그녀는 국가 정책에 관련된 서류를 전혀 작성할 수 없었고 그녀의 사무실에는 서류가 단 한 장도 없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일생 동안 표면적인 학위에만 집착했지 자신의 부족한 문해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한 게 전혀 없었던 모양.
그러나 이렇게나 무식했던 그녀의 공식적인 명칭은 '위대한 과학자이자 화학자', '부통령, 동지, 의사, 학자, 엔지니어 엘레나 차우셰스쿠'였다. 자신의 이름 뒤에 칭호를 붙이면 '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고, 원시적인 ' 자신의 이미지가 바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던 그녀는 다른 나라를 방문할 때마다 명예 박사 학위를 요구했다. [35] 이렇게 그녀는 집권 기간 동안 국내외에서 무려 74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실제로 차우셰스쿠 부부는 그녀에게 학위가 준비되지 않은 경우 외국의 초대를 수락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녀는 노벨상 에까지 손을 대려고 했다. 먼저 그녀는 핵무기와 대량살상무기 감축 운동에 참여하고 팔레스타인 편에 서면서 이스라엘 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쟁을 해결한 중개자 역할 하기, 니쿠가 대통령직을 승계받을 때 노벨평화상 을 수여받을 계획을 짰으나 이것도 루마니아의 국제적 위상 때문에 되지 않자 중합체에 관련된 연구로 노벨화학상 을 타려고 했다가 이것조차 되지 않자 그녀는 뜬금없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노벨생리학·의학상 에 도전했는데 이렇게 연구한 것이 마늘을 이용한 항암치료 였다고 한다.(...) 물론 그녀는 노벨생리학·의학상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질투심과 편집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는데 실제로 엘레나는 자기보다 세련되거나 예쁘거나 똑똑한 여성들은 모두 질투하여 자신보다 아름다운 루마니아의 여배우, 가수들에게도 열등감을 품은 것은 물론이고( # ) [40] 자기보다 예쁜 여성은 자기 근처 어디에서도 머물지 못하게 했으며 , 인디라 간디 [41] 와 골다 메이어 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여성 정치인들을 자신의 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미모와 지성'을 모두가 칭찬해 주기를 바랐다.
....그녀는 자식의 연인들에게도 무자비했다. 딸 조이아의 남자친구가 평범한 집안 출신에 부모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딸의 남자친구를 의심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이런 '더러운 놈'은 가나 에 보내 기생충 감염으로 죽여야 한다. 그 남자가 죽으면 그의 뇌의 사진을 찍어와라"는 잔혹한 지시를 내려 그 남자친구를 '실종'시켰으며 아들 니쿠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한 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니쿠가 잠시 해외로 나간 사이 병사들을 시켜서 그 미녀를 집단 성폭행 을 시킨 뒤 그 사진을 니쿠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는 극악무도한 일화까지 있다. 그러나 그 미녀가 나디아 코마네치 라는 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녀는 이멜다 마르코스 와 비교해도 좋을 정도로 사치 에도 열중했다. 1970년 10월에 남편과 같이 처음으로 미국에 방문했을 때는 '내가 얼마나 고급 문화에 익숙하고 까다로운 입맛을 가졌는지 알아야 한다'며 자신이 먹을 모든 메뉴를 자신은 물론 남편도 전혀 모르는 프랑스어 로 작성하게 했으며 [44] [45] 국민들이 빵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몇 시간이나 서야만 했음에도 지하에 대형 냉장고를 설치해 언제나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은 것은 당연했고 부쿠레슈티 에 위치한 방이 174개나 되는 호화 저택인 '봄의 궁전'에 따로 방을 마련해야 했을 정도로 많은 모피 코트는 물론, 수백 벌의 드레스와 수십 벌의 밍크코트, 엄청난 보석, 다이아몬드가 박힌 구두를 포함한 그보다 더 많은 신발을 보관했다. 또 그녀는 자본주의권 국가의 사치품들인 디올 , 샤넬 , 에르메스 옷들을 여럿 가지고 있었으며, 체포될 당시에는 이브 생 로랑 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 1989년 12월 25일에 그녀는 오만 악행으로 인해 남편 니콜라에와 동급의 범죄자 취급을 받아 소규모 초등학교 에서 열리는 혁명재판에 넘겨져 사형 판결을 받고 잔혹하게 총살당했다. 그녀는 자신이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간까지도 "난 너희들을 어머니로서 대해왔다!", "우리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죽이려 하다니!"라고 울부짖었으며 심지어 당시 처형에 참여했던 한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그녀가 총살당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문자 그대로 "이 개자식아!" 였다고 한다.
재판 당시 그녀는 탁자 위에 놓아둔 한 봉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안에 스위스 계좌번호와 차우셰스쿠를 배반한 사람들의 명단이 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부부를 처형한 후 봉투를 열어보니 스위스 계좌번호는 없었고 대신 당뇨병 환자였던 남편에게 주기적으로 투여해야 했던 인슐린 주사기가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