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릴레오 '박태균 교수'편 보다가 재밌을거 같아서요.
알라딘 '책속에서'中
P. 19 이승만은 그에 대한 우리의 혐오를 알고 있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두 명의 공산주의자가 있는데 하지 장군과 버치 중위’라고 했다.
P. 48 여운형은 일제강점기에 진정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식민지에서 핍박받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생각을 조금이라도 더 총독부에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적과도 대화하고, 이를 통해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자세, 그것이 진정한 정치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라고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정치는 하지 않고 공작만 하는 한국 현대사의 대통령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여운형이 갖고 있었던 것이다.
P. 72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덮어놓고 뭉치자.”라고 했지만, 실상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 덮어놓고 뭉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
P. 78~79 돈에 대한 두 사람(이승만과 김구)의 태도는 두 사람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며,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돈에 대한 이승만의 욕심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권력 그 자체는 돈을 획득하는 수단으로서 작동한다. 반면에 김구는 집단의 수장으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돈을 추구한다. 돈이 많았을 때 그는 북한으로부터 월남한 난민을 위해 사용했고, 극빈자를 구호하는 데 썼으며, 그에게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기부했다.
P. 115 경찰복을 입은 사람들이 암살을 했다는 것은 과도정부의 한국인 관료들을 놀라게 하는 효과가 있다. 암살자들은 장덕수의 부인에게 그들의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P. 163 친일 지주는 지역을 장악하기 위하여 청년단을 불러들였다. 서북청년단과 광복청년단이었다. 이들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니었다. 조용했던 마을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P. 183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다. 정치는 국민들의 정서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정권을 잡는 데만 몰두했다. 해방은 한국인들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P. 243 결과적으로 볼 때 미군정의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 암살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민주당 자체 가 다수당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당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남은 희망은 김규식밖에 없었다. 특히 버치로서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정치 세력들을 묶어야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결코 버치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김규식의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었다.
P. 259 분단 정부를 수립해서는 안 된다는 김규식의 신념, 그리고 이승만이 갖고 있었던 돈과 지방에서의 정치적 힘이라는 두 요소를 제외하고도 김규식이 지도자가 될 수 없었던 또 다른 요인이 있었다. 바로 여운형의 죽음이었다. … 1949년 6월 김구의 암살은 김규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P. 267 한국을 떠난 직후 쓴 글에서 버치는 특히 미군정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했다. 즉, 친
일파를 기용했던 미국의 정책,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대한 미군정 요원들의 잘못된 태도 등은 미군정이 실패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P. 277 하지와 버치의 예상은 적중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지 못했다. 미국의 대한 정책은 번번이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과 미국은 동맹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이가 되었다.
P. 286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해방과 통일 독립국가 수립이라는 너무나 소중한 기회를 상실하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기회의 상실은 곧 전쟁이라는 위기로 다가왔으며, 또다시 그런 경험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P. 16 하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빠른 시간 내에 정권을 이양하라고 떼를쓰고 있는 골치 아픈 보수 우익의 지도자들이나 소위 ‘추수폭동‘을 주도한좌익이 아닌 중도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들로 리더십을 세우고 싶었고, 이를 위한 중재자로서 버치 중위를 선택했다.
P. 24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운형은 미국의 대한 정책에 적합한 인물이아니었다.
P. 49 총독부 관계자들을 인터뷰 최종 보고서에 의하면 ˝조사는 처음에여운형의 반역과 일본에 대한 협력을 찾는 데 집중˝ 되었지만, 심문을 하면서증언자들이 여운형의 배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판단했다. 처음에는 ˝증언자들이 다시 일본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여운형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라고 믿었지만, ˝이러한 모든 혐의는 상상의 것이었으며 (여운형에 대한) 명예훼손이었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P. 62 버치는 이승만을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었다. 하지 사령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그러한 이승만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P. 67 이승만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었고, 표면적으로는 가까웠지만 실제로는 우익 내에서 김구와 경쟁 관계였으며, 조선공산당과 여운형 등 좌파와 각을 세우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하자 조금씩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이승만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이승만은 이런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한 것이었지만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던 미군정의 시도는 실패했다.
P. 70 이승만은 워싱턴 방문을 통해서 미국의 대규모대한 원조를 얻어냈으며, 모스크바 삼상 협정의 틀은 그대로 유지하되, 남한에서만 임시조선정부가 먼저 수립되는 것으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바뀌었다고 선전했다. 또한 남한만의 임시조선정부가 들어서면 그 수장은 이승만이될 것이라는 소문도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 ‘가짜 뉴스‘였다.
P. 90 프란체스카가 미국에 있던 이승만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그녀는 비서이면서 정치적 조언자였다. 그러나 단순한 조언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확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 전신 중에 ‘러치 계획’에 대한 언급이 몇 번 나오고 있다. 러치 장군은 미군정 내에서 버치와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그 계획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승만의 정치적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는 모든 계획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P. 92 지금도 생소한 이름인 강용흘은 자신의 삶을 그린 『초당』이라는 작품으로 1933년 구겐하임상을 받은 문인이었다. 그는 도미 후 보스턴대학(의학)과 하버드 대학(영문학)에서 수학했다.
1946년 강용홀은 미군정청의 출판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1948년에는 주한미군 제24군단 정치 분석관 겸 자문관을 역임했다. 한국에 대한 전문가가 없는 상태에서 수립된 미군정에게는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들이 필요했고, 강용흘은 그중 한 사람이었다.
P. 99 미군정이 38선 이남을 영원히 통치하지 않는 이상 일본 제국주의에 적극협조했던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보호막이 필요했다. 어쩌면미군정의 여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이 그 보호막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민주당 내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보였던 송진우는 1945년 12월 암살되었다. 그나마 한국민주당 내에 원세훈이나 김약수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 즉 전범들에게안전한 우산이 되기는 어려웠다.
강용흘이 이승만과 김구를 똑같은 사람이라고 비판했지만, 김구는 친일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우산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우파의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친일과 전범 경력이 있었던 사람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P. 104 1949년 한국민주당은 과거 김구와 같이 일했던 신익희와 손을 잡았고, 정당명도 민주국민당으로 바꾸어야만 했다.
이승만은 1947년 말의 시점에서 자신을 지지할 수 없다는 한국민주당에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았던 그로서는 한국민주당과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1948년 3월 17일 문서 (FUN Report」, 버치 문서 Box 5)에 의하면 김성수 역시 선거 이후에 이승만을 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P. 109 버치는 여러 곳에서 장덕수 암살의 배후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그 중 하나는 이전의 암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이승만과 김구가 있다는 것이었다.
P. 114 이들은 지시하는 사람이 시키면 필요에 따라 김구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고, 이승만의 추종자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군정이 해체되고 38선 이남에서 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배후에 있는 사람과 친분이 있는 지도자가 대통령이 될 것이고, 곧 풀려날뿐만 아니라 경제적 보상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 121 김구의 암살은 장덕수 암살 사건 직후에 이미 계획되어 있었다. 안두희의 범행은 우연이 아니었고, 개인적 차원의 범죄도 아니었다. 이미 1년 전부터 철저하게준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P. 133 버치의 문서군에는 1946년 이후 지방의 상황 변화에 관한 다양한 문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경찰과 청년단, 그리고 정치조직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중에서도 1947년 3월의 조사 문건이 가장 눈에띈다. 여기에서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는 아직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적 상황에 대한 보고한국의 정당 평가를 위해서는 왜 한국의 정당이 미국과 다른가를 이해해야 한다. (1) 한국인들은 3개 또는 그 이상의 정당들이 인민에 의해 자유롭게구성된 상황을 경험하거나 관찰했던 적이 없으며, 표현의 자유 역시 없었다.
(2) 현재 한국의 정치에는 정치적 책임이 없다. 사람들과 당원들은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책임져야 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관리와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장이나 행동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P. 135 1946년 가을의 추수봉기‘는 지방에서 좌우익 사이의 세력 관계가 역전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문서뿐만 아니라 지방의 상황을 조사한 대부분의 문서들은 1947년 이후 우익 세력이 상황을 장악하고 있다는 내용의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지금까지 미군정 시기에 대한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1946년 가을의 봉기는 미군정의 정책 실패에 항의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의 의사표시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각 지역에서의 좌파 조직이 대부분 노출되었고,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체포되었다. 물론 서울에서는 이미 그 이전에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수배되었으며, 일부 좌파 신문들은 발간이 금지되었다. 박헌영을 포함해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38선 이북으로 도피했다.
P. 141 대부분의 연구들이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실상 독재 체제가 어떻게 지속되었는가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지방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1945년 이후 제국이 무너지면서 한국을 비롯해 많은 신생국들이 탄생했고, 이들은 예외 없이 미국이나 유럽식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서구식 민주주의는 직능이나 계층을 중심으로 대표를 뽑는 것이 아니라 지역과 인구수가 기준이 되어 보통선거로 대표를 선출하는 제도에 기반하고 있었다.
P. 150 자산가 계층과 기독교인들은 1946년 토지개혁을 기점으로 해서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공 청년단을 조직했고, 자신들의 출신 지역을 조직의 이름에 넣었다. 북쪽에서 이들에게 소련군이 공포의 대상이었다면, 남한에서는 이들이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모든 것을 잃고 온 이들에게 공산주의자로 찍히면 그 어떤 자비도 없는 듯했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서북청년단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들은 지주가 아니라 아무런 물적, 지적 재산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P. 172 자산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친일파들을 감싸주고 있던 이승만을 지원하는 것은 정부 수립 이후 보험을 들어놓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이승만이 향후 수립될 정부의 수반이 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따라서 하지 사령관의 정치 고문 굿펠로 대령과 정치 고문단 버치 중위의 중재가 없었다면 자금 모금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유일한 정부였던 미군정이 보장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P. 184 미군정은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을 소개할 자료를 마련했다. 취재가 되었든 여행이 되었든 간에 정부로서 통치 지역에 대한 소개와 홍보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먹고살기도 힘들고 전염병도 돌고 있던한국에 대해 어떻게 소개해야 했을까? 현실 그대로를 얘기하면 통치에 실패했음을 자인하는 것이 될 수 있었고, 그렇다고 현실과 다른 내용을 소개하면이는 정보 제공에 실패하는 것이 될 수 있었다.
P. 200 미군정하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올림픽 복권은 한국 사람들이 처음으로접해보는 것이었고, 그 절차를 무난하게 진행하기도 쉽지 않았다. 복권 사기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는 점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 속에서 범죄는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P. 207 김두한은 ‘장군의 아들‘로 기억되는 알카포네였는가? 아니면 버치의 문서에 나오는 테러리스트였는가? 김두한은 3대 총선에서 자유당 소속으로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사사오입 개헌을 비판하면서 이승만을 민족 반역자라고 비난했다가 국회의장의 징계를 받았다. 진보당 준비위원회에 잠시참여했던 김두한은 제2공화국에서 집권 민주당의 친일 경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1966년에는 삼성의 사카린 밀수를 비판하면서국회에 오물을 투척하기도 했다. 김두한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P. 227 미군정이 작성했던 임시 헌장의초안은 민주적이고 통합적인 한국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 헌장의 내용에 신탁통치 또는 후견 제도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하더라도,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담고 있었다. 게다가 헌장의 초안에는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내용의 기초가 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입법부에 의한 행정부의 권한 견제, 사법권의 독립, 지방자치제도 등 민주적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이에 대한 후속 연구도 필요할 것이다.
P. 243 여운형 암살과 장덕수암살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물론 한국민주당 자체가 다수당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정당이었는가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제 남은 희망은 김규식밖에 없었다. 특히 버치로서는 이승만과의 관계가 안 좋았기 때문에 김규식을 중심으로 해서 다른 정치 세력들을 묶어야 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결코 버치의 희망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김규식의 대답은 끝이 아니라 시작˝ 이라는 것이었다.
P. 244 김규식은 버치가 가장 많이 접촉했던 인물이었다. 2018년 4월 17일에 있었던 대한민국입시정부 수립을 기념하는 학술회의에서 만났던 김규식의 딸은 버치와 그의 가족을 기억하고 있었다. 버치의 문서들 속에서도 김규식이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다. 버치가 한국에 온 이후 본격적으로 정치 공작을 했던 좌우합작위원회와 입법의원의 중심에 김규식이 서 있었다. 그는 김규식을 새로 수립될 한국 정부의 중심에 세우고 싶었다. 과연 이러한계획은 실현가능한 것이었을까?
P. 264 김규식은 남북협상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 속에서 미군정에 의해 이용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신념을 지켰다. 그에게 있어서 남북협상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48년 남북 지도자회담이 이승만처럼 북진통일을 추진했던 사람에게는 마지막 시도가 되겠지만, 김규식처럼 평화통일을 희구하는 사람들에게는 1948년 이후 오늘까지계속되고 있는 출발점이었다.
P. 286 버치 문서는 미군정기의 실패와 함께 한국 사회가 겪었던 좌절의 역사를보여주고 있다.
P. 20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미군정은 처음부터 분단 정부 수립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을까?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조선에 대한 합의안은 단지 합의일 뿐 전혀 실현될 수 없는 방안이었는가?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를 진정으로 지원한 것인가? 국내에 전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승만이 미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빠른 시간 내에 한국민주당을 제치고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일까?
P. 21 과거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던 인사들의 재기용에 대한 여론의 비판을 알면서도 미군정은 왜 이들을 계속 고용했어야 했는가?
P. 56 이 지점에서 이승만이 내놓은 구호가 ˝덮어놓고 뭉치자.˝였다.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친일 부역자를 비롯한 모든 정치 세력들이 뭉치는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좌파 정당들은 이러한 무원칙한 이승만의 원칙에 반발하면서 독촉중협으로부터 탈퇴했다. 이승만도 ˝덮어놓고 뭉지자.˝라고는 얘기했지만, ˝덮이 놓고는 수사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중요한원칙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위에서 ˝모든 한국인들이 예외없이 나를 따르기를 원한다.˝라고 언급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의미한다. 결국 ˝덮어놓고 뭉치자.˝라는 구호는 그 앞에 ˝공산주의자와 나를반대하는 사람을 빼고˝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했다.
P. 72 이승만은 1945년 10월 귀국한 이래로 통합의 아이콘이라기보다는 분열의 상징이었다. ˝덮어놓고 뭉치자.˝라고 했지만, 실상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빼고 덮어놓고 뭉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로 비난했다. 이승만의 주위에서 합리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했다. 미군정에 가장 협조적이었던 한국민주당이나 안재홍의 국민당이 모두 이승만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승만을 통해 한국내 보수 세력을 통합하고 좌파에 대응하겠다는 계획은 더 이상 가능하지않게 되었다. 이승만을 ‘최고의 애국자‘라고 소개하면서 화려하게 데뷔시켰던 미군정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러한 실패는 이미 1916년 5월부터명백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말‘ 을 잘 못 쓴 것이다.
P. 99 그의 최고의 약점은 다른 동료들과 협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서 일하게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하지는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매우 외로운 사람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반쯤 체면에 걸린 seemihypnotized) 사람들은 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은 그에게 기꺼이 이글렸다.
그가 지금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는 것은 그의 능력 때문도 아니고, 그가 성취한 것 때문도 아니다. 단지 지금 경찰과 공무원들에게는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1947년 8월 4일, 정치고문단의 D.C. 유스(Youth)가 작성한 이승만 박사의 정치적 배경: 그의 현재 상태의 원인과 이유」, 버치 문서 3
P. 113 김구를 따랐던 젊은이들 가운데는 과격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극우 보수의 선봉대 또는 돌격대라고 할까? 이들 중 일부는 반탁운동의 선두에 섰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청부 살인 업자들이었던 것 같다. 시키는 사람이 좌익만 아니라면, 누구든 돈만 준다면, 그리고 시후 신분만 보장해준다면,
암살을 실행할 수 있는 사람들,
P. 131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다.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경찰의 세 번째 특징이었다. 바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경찰이 극우 테러 청년단과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렇게 경찰 문제가 불거져도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버리지 않았다. 왜? ˝반탁운동 세력의 쿠데타 시도는 경찰이 군정에충성하는 쪽으로 남음으로써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경찰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버치 문서 Box 3)
P. 132 미군정은 정치적 사안에 관계없이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경찰밖에 없다고 믿었다. 1945년 12월 30일 군성청을 마비시켰던 반탁운동 세력의총파업에서 경찰만이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가장 충성심이강한 경찰이 있기에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운영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P. 133 친일 경력의 경찰들은 이승만과 함께 김구를 그들의 경력을 은폐할 수 있는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정 때 각 지방의 경찰서에는 이승만과김구의 초상화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서울의 미군정청에서 지방 경찰서에두 사람의 초상화를 붙이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조상화는 1948년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지방 경찰서의 중앙 벽면에 붙어 있었다. (코넬리 소령에게 보내는 1947년 9월 10일부터 26일까지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에대한 정치적 조사」, 1947년 9월 29일, 버치 문서 Box 2)
P. 134 2개의 캠프로 나뉘어 있다. 군정을 지지하는 것은 우익, 아닌 쪽은 러시아에 의해 이용당하는 쪽이다. 어느 쪽도 사회 개혁이나 경제 재건 또는 정치적권리나 자유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있다. 항상 권력만을 생각한다. 서울과 평양의 정당 본부는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시위에 동원하려고 하고 있으며,
상명하복의 구조를 갖고 있다. 노동자나 농민의 복지에 대해서는 신경쓰지않으면서 소수 지도자의 특권과 권위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예외적으로 아주 잘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담장 위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 중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현명한 사람들이지만, 군사정부를 신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한국 상황에 대해서 반대 의사를 갖고 있으면서 위험을 느끼고 있다.
P. 141 최근 많은 연구자들이 제국에 편입되면서 나타났던 식민지 근대화론에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것이 왜곡되었든, 아니면 강제적으로 주입되었든 간에 그 결과가 ‘근대‘와 ‘자본주의 시장‘ 이라는 모습으로 현대 한국 사회의 기원을 형성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보다 더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제국의 한 모퉁이에서나마 식민지적 근대의 단맛을 느낄 수 있었던 대도시, 그리고 전통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못한 지방 사이의 차이가 해방 후 한국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에 미친 영향은 전혀 주목하지 않고 있다.
P. 142 이러한 사회구조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와 보통선거제도를 적용한다면,
결정적인 키를 쥐는 것은 비도시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 도시보다 비도시 지역에서 더 많은 대표를 뽑을 수밖에 없는 정치 구조가 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당시 제헌헌법에서는 대통령중심제임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특이한 형태의 정부 구조를 규정하고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수의 국회의원 선출을 좌우할 비도시 지역의 중요성은 그만큼 더 큰 것이었다. 1952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바뀐 이후에도 도시보다 비도시 지역에서 선출되는 사람들의 표심이 더 중요할 수밖에없었다.
P. 156 니콜스는 이승만의 지원으로 어떠한 간섭도 받지 않는 첩보 부대를 오류동에서 창설했다. 니콜스의 부대는 한국전쟁 이전부터 공산주의 조직들을 파괴하는임무를 맡았다. 그는 1947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지도자들의 체포와 심문 그리고 고문, 1949년 한국군 내 공산주의자들의 숙청과 처형, 그리고 북에서내려오는 사람들을 스파이로 훈련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러한 니콜스의 활동이 청년단과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있다.
P. 167 건의서를 작성한 권태석은, 테러는 좌익이 아니라 우익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우익이나 중립적인 사람들 그리고 기독교 장로까지도 테러의 대상이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친일 지주가 청년단을 통해 테러를 자행하는 것에 대하여 경찰의 지원 혹은 묵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좌익 척결이라는 명분하에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에 따라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체포하고 박해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이 좌익을 옹호하도록 만드는 상황을 초래했다.
P. 217 일부 연구자들은 미소공동위원회나 좌우합작위원회가 모두 미군정의
˝쇼˝ 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찍부터 소련과의 타협보다 미국에 우호적인세력을 중심으로 분단 정부를 세우려고 한 것이 미국의 정책이요, 미군정의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치의 문서 속에 나타나는, 미소공동위원회에대한 미군정의 대처는 생각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단지 하나의 쇼가 아니라실제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에 있는 조선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해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었던 중이었고, 그 와중에 여운형이 암살된 것이다.
P. 227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열강들이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겠다고 한 것은 분명 우리 민족에게 큰 충격이 되었고,
응당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거족적인 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만약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이 헌장의 초안에 나타난 것과 같이 빠른 시간 내에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지고, 통합된 임시정부하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질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모든 정치 세력들이 이에 협조했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1955년 분할 점령과 신탁통치를 끝내고 독립한 오스트리아와 유사한 운명이 되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도 가능하지않을까?
P. 250 일정한 정도의 세금을 낼 수 있거나 해당 지역의 유지들만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1946년 중반 이후 지방에서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독립촉성국민회와 청년단이 그 세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기 때문에, 간접선거를 통한 입법의원 선거 결과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그룹의 압도적인 승리로끝났다. 친일 민족 반역자에 대한 처리와 농지개혁 등 해방 직후 처리해야만했던 문제를 다루는 법안이 입법의원에서 논의가 되었지만, 결국 동과되지못했던 것은 입법의원 내에서 이승만을 지지하는 그룹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P. 281 이렇게 미군정기에 형성된 구대 정치의 원형은 지금까지 계속 유지되고있다. 이러한 구태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가까 뉴스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안이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 주도한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졌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이 뉴욕 타임스>의 존스톤 기자와 회견을 했는데, 이 자리에서 박헌영이 조선은 소련의속국이 되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존스톤이 이승만과 연결되어있는 기자라는 점은 버치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P. 282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정치 구도는 개혁과 반개혁의 구도가 되었어야 했다. 민주화를 했기 때문에 그 민주화를 막았던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기득권 언론들은 이러한 정치 구도를왜곡했다. 개혁과 반개혁이 아니라 진보 보수, 좌우의 대립 구도가 된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반개혁 세력은 청산 대상이 아니라 보수와 우익이라는모습으로 그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P. 282 해방 정국의 모습이 비로 이러한 정치 구도 왜곡의 원형을 보여준다. 해방후 한국 사회는 독립운동을 한 진영과 친일 세릭 간의 대립 구도가 되어야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안으로 왜곡한 가짜 뉴스들은 이 구도를 좌우 간의 대립 구도로 만들었다. 한국의 식민지화와 일본의 불의한 전쟁에 협력했던 사람들은 반탁운동을 하는 애국적 우익으로 꾸며졌다. 삼상회의 결정을 찬성한 세력은 소련의 속국이 되기를 원하는 매국 좌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왜곡된 구도 속에서 반독립 세력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우익으로서 한반도의 남쪽에서 주류 기득권 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P. 19 하지 장군은 나에게 동의했지만, 우리가 한국에서 안정적 힘을 갖기 위하여 이승만이 필요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도쿄, 특히 연합군 최고 사령부로 인해서 다른 결정을 할 수 있는 힘이 부족했다.
원문 알라딘: 버치문서와 해방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