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보듯이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글이니 싫은 분들은 뒤로가기 눌러주세요~
아주 예전의 일이었어요. 저는 그때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동네 마트에서 알바를 했었지요.
손님들 중에 아주 별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분이 사 가는 품목은 두부, 콩나물, 물미역 여러 야채들 그런 등속이었죠
이분이 왜 특이한 사람이었느냐면 콩나물 천원어치를 달라고 하셔서 제가 봉지에 담아 드리면
이거 썩은 거지? 다 썩은 거잖아! 이거 봐 여기 여기 다 썩었네
이렇게 외치는 분이었어요ㅜㅜ
참고로 이 분 목소리가 아주...마치 쇠를 맨손으로 잡아 찢는 것 같기도 하고
병든 공룡이 꽈악꽈악 울부짖는 듯 한 그런 아주 별난 목소리였답니다.
암튼 그분이 그렇게 외치고 나면 진정시키는 게 어려웠어요.
썩지 않았다, 아무리 강조해도 믿지 않았어요. 저는 다른 것보다도
다른 손님들이 그 얘기를 듣고 싫어할까봐 그게 조바심이 났죠.
제 눈에는 콩나물이고 물미역이고 채소고, 다 괜찮았는데 그분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한번은 그 손님이 가고 나서 사장님이 벌게진 얼굴로 제게 와서 저 인간 죽이고 싶다고 하더라구요ㅜㅜ
맨날 싸구려만 골라서 사가면서 왜 저렇게 영업방해를 하느냐고...
어느 날 사장님은 그 손님이 오는 걸 보고 제게 와서
오늘도 저 손님이 소란을 피우면 추억씨가 내보내라고, 큰 소리 내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 사장님이 직원을 교육할 때, 손님한테는 과잉 친절을 해야 된다고 강조하던 분이었는데
나름 엄청난 용단을 내린 거죠.
그 날도 손님은 이거 썩었다, 로 타령을 하고 저와 한바탕 실랑이를 했어요.
하지만 이제 오지 말라는 말은...제 입에서 차마 안 나오더라고요.
속으로 좀 이해는 안 됐어요...썩은 물건 파는 걸로 보이는 곳인데 왜 올까...
근데 생각을 계속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동안 많이 당했나?
그 생각이 제게는 마치 어두운 곳에 불을 켜는 것 같았어요.
요새도 상인들 중에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물정 모르는 사람한테는 좋지 않은 물건을 골라서 주는...
젊은 시절에 저 손님이 어디서 많이 당했나보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뒤부터는 그 손님이 와서 콩나물을 찾든 두부를 찾든 물미역을 찾든
무조건 새 박스를 꺼내서 보는 앞에서 포장을 뜯고 새 물건을 담아 줬어요.
저만의 느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도 그분이 의심은 했지만
소리는 좀 작아지는 것 같았어요.
이분은 저와 실랑이를 하면서도 본인 신상을 조금씩 얘기했는데
성함은 이XX, 나이는 60대 초반, 직업은 영업용 택시기사,
현재 남편이 병들어서 집에 있으며 이걸 사가서 반찬을 해놔야 내가 일을 나가고 나면
남편이 밥을 먹는다,
이 정도를 말해줬어요.
저는 속으로 그 아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마누라복 하나는 한국 최고구나 싶었어요.
남자도 은퇴할 나이인 60대 초반에, 초로의 여자가
병든 남편 먹여살리겠다고 영업용 택시를 몰아요.
제가 예전에 여자 택시기사들이 겪는 어려움을 들은 적이 있는데
반말 찍찍, 돈을 던지는 손님, 여자라 얕보고 술주정에, 택시비 안낸다고 버티는 놈
심지어 하루에 얼마 버는지 물어보고 일당 두 배를 줄 테니까 나랑 모텔가자는 미친놈...
별 손놈들이 다 있더군요.
거기까지 알고 나니까 저는 더 이상 그 손님이 힘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어느날 저는 그 손님이 '썩었다' 타령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음 속의 오래된 피해의식...좀 괜찮아진 것이겠죠?
그걸 깨달을 쯤에 그 손님이 또 오셨어요.
그날은 세상에...어린 손녀를 데려왔어요.
저한테는 그분이 손녀를 데려왔다는 게 좀 놀랍고 반가웠어요.
왜냐하면 저는 저도 모르게 그분이 병든 남편이랑 단 둘이 쓸쓸하게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나봐요.
근데 아들 내외도 있고, 손녀도 있다는 그 사실이 좋았던 것 같아요.
신기한 것이, 손녀가 제 할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솔직히 그분은 인물이 없는 편인데
손녀는 참 예뻤어요. 그것도 신기하더라구요. 그 소녀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자주색 머리띠를 한 것도 기억나요.
그분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샀어요. 비싼 한우에, 이런저런 과일에, 몇 십만원 어치를 사시더라구요.
아들이 저기서 차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고...기분 좋게 그러시는데 제 마음이 찡했어요.
보나마나 저 좋은 고기며 과일은 아들 내외랑 저 손녀한테 주려고 샀겠구나 싶어서요.
본인은 두부랑 콩나물에 물미역으로만 버티면서...
저 손녀라는 꽃 한송이를 피우려고 저 어머니는 보잘것없는 나무 등걸 같은 모습으로 살기를 자처하는구나,
그걸 고생스럽다고 생각도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구나, 싶으면서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저 분이 모는 택시의 조수석에 앉아 계시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그냥 머리로 드는 겉껍데기 지식이 아니라 제 마음에 가득히 들어차는
그런 깨달음이었어요.
사실은 제가 이 글을 쓴 이유가
저도 피해의식이 있는데, 오늘 그게 건드려지는 일이 있어서
그걸 좀 혼자서 달래보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갑자기 그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얼굴이랑 목소리, 우리가 주고받은 실랑이들^^; 그 어여쁜 손녀까지 다 생생히 기억나네요.
우리 이XX 어머니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손녀는 이제 어여쁜 처녀가 되었겠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