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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조수석의 예수님

추억 조회수 : 2,181
작성일 : 2024-11-05 22:34:02

제목에서 보듯이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글이니 싫은 분들은 뒤로가기 눌러주세요~

 

아주 예전의 일이었어요. 저는 그때 세례를 받은 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었는데

동네 마트에서 알바를 했었지요. 

손님들 중에 아주 별난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분이 사 가는 품목은 두부, 콩나물, 물미역 여러 야채들 그런 등속이었죠 

 

이분이 왜 특이한 사람이었느냐면 콩나물 천원어치를 달라고 하셔서 제가 봉지에 담아 드리면 

이거 썩은 거지? 다 썩은 거잖아! 이거 봐 여기 여기 다 썩었네 

이렇게 외치는 분이었어요ㅜㅜ

참고로 이 분 목소리가 아주...마치 쇠를 맨손으로 잡아 찢는 것 같기도 하고 

병든 공룡이 꽈악꽈악 울부짖는 듯 한 그런 아주 별난 목소리였답니다. 

 

암튼 그분이 그렇게 외치고 나면 진정시키는 게 어려웠어요. 

썩지 않았다, 아무리 강조해도 믿지 않았어요. 저는 다른 것보다도 

다른 손님들이 그 얘기를 듣고 싫어할까봐 그게 조바심이 났죠. 

제 눈에는 콩나물이고 물미역이고 채소고, 다 괜찮았는데 그분이 왜 그러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한번은 그 손님이 가고 나서 사장님이 벌게진 얼굴로 제게 와서 저 인간 죽이고 싶다고 하더라구요ㅜㅜ

맨날 싸구려만 골라서 사가면서 왜 저렇게 영업방해를 하느냐고...

 

어느 날 사장님은 그 손님이 오는 걸 보고 제게 와서 

오늘도 저 손님이 소란을 피우면 추억씨가 내보내라고, 큰 소리 내도 괜찮다고 했어요. 

그 사장님이 직원을 교육할 때, 손님한테는 과잉 친절을 해야 된다고 강조하던 분이었는데 

나름 엄청난 용단을 내린 거죠. 

 

그 날도 손님은 이거 썩었다, 로 타령을 하고 저와 한바탕 실랑이를 했어요. 

하지만 이제 오지 말라는 말은...제 입에서 차마 안 나오더라고요. 

속으로 좀 이해는 안 됐어요...썩은 물건 파는 걸로 보이는 곳인데 왜 올까...

근데 생각을 계속하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동안 많이 당했나? 

 

그 생각이 제게는 마치 어두운 곳에 불을 켜는 것 같았어요. 

요새도 상인들 중에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물정 모르는 사람한테는 좋지 않은 물건을 골라서 주는...

젊은 시절에 저 손님이 어디서 많이 당했나보다, 싶은 거예요. 

 

그래서 저는 그 뒤부터는 그 손님이 와서 콩나물을 찾든 두부를 찾든 물미역을 찾든 

무조건 새 박스를 꺼내서 보는 앞에서 포장을 뜯고 새 물건을 담아 줬어요. 

저만의 느낌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뒤로도 그분이 의심은 했지만 

소리는 좀 작아지는 것 같았어요. 

 

이분은 저와 실랑이를 하면서도 본인 신상을 조금씩 얘기했는데 

성함은 이XX, 나이는 60대 초반, 직업은 영업용 택시기사, 

현재 남편이 병들어서 집에 있으며 이걸 사가서 반찬을 해놔야 내가 일을 나가고 나면 

남편이 밥을 먹는다, 

이 정도를 말해줬어요. 

 

저는 속으로 그 아저씨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마누라복 하나는 한국 최고구나 싶었어요. 

남자도 은퇴할 나이인 60대 초반에, 초로의 여자가 

병든 남편 먹여살리겠다고 영업용 택시를 몰아요. 

 

제가 예전에 여자 택시기사들이 겪는 어려움을 들은 적이 있는데 

반말 찍찍, 돈을 던지는 손님, 여자라 얕보고 술주정에, 택시비 안낸다고 버티는 놈

심지어 하루에 얼마 버는지 물어보고 일당 두 배를 줄 테니까 나랑 모텔가자는 미친놈...

별 손놈들이 다 있더군요. 

 

거기까지 알고 나니까 저는 더 이상 그 손님이 힘들지 않았어요. 

그리고 어느날 저는 그 손님이 '썩었다' 타령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마음 속의 오래된 피해의식...좀 괜찮아진 것이겠죠? 

그걸 깨달을 쯤에 그 손님이 또 오셨어요. 

그날은 세상에...어린 손녀를 데려왔어요. 

 

저한테는 그분이 손녀를 데려왔다는 게 좀 놀랍고 반가웠어요. 

왜냐하면 저는 저도 모르게 그분이 병든 남편이랑 단 둘이 쓸쓸하게 산다고 생각하고 있었나봐요. 

근데 아들 내외도 있고, 손녀도 있다는 그 사실이 좋았던 것 같아요. 

신기한 것이, 손녀가 제 할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솔직히 그분은 인물이 없는 편인데 

손녀는 참 예뻤어요. 그것도 신기하더라구요. 그 소녀가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자주색 머리띠를 한 것도 기억나요. 

 

그분은 신이 나서 이것저것 샀어요. 비싼 한우에, 이런저런 과일에, 몇 십만원 어치를 사시더라구요. 

아들이 저기서 차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고...기분 좋게 그러시는데 제 마음이 찡했어요. 

보나마나 저 좋은 고기며 과일은 아들 내외랑 저 손녀한테 주려고 샀겠구나 싶어서요. 

본인은 두부랑 콩나물에 물미역으로만 버티면서...

 

저 손녀라는 꽃 한송이를 피우려고 저 어머니는 보잘것없는 나무 등걸 같은 모습으로 살기를 자처하는구나, 

그걸 고생스럽다고 생각도 않고 당연하게 여기는구나, 싶으면서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저 분이 모는 택시의 조수석에 앉아 계시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어요...그냥 머리로 드는 겉껍데기 지식이 아니라 제 마음에 가득히 들어차는 

그런 깨달음이었어요. 

 

사실은 제가 이 글을 쓴 이유가 

저도 피해의식이 있는데, 오늘 그게 건드려지는 일이 있어서 

그걸 좀 혼자서 달래보려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다가 갑자기 그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얼굴이랑 목소리, 우리가 주고받은 실랑이들^^; 그 어여쁜 손녀까지 다 생생히 기억나네요. 

우리 이XX 어머니 건강하게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손녀는 이제 어여쁜 처녀가 되었겠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IP : 210.204.xxx.55
2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24.11.5 10:38 PM (14.52.xxx.217)

    원글님 마음속에 앉아계신 예수님을 저도 보네요.
    지혜롭고 따뜻한 예수님.
    잠시 제 그리움 가득한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 2. 좋은글
    '24.11.5 10:38 PM (112.104.xxx.252)

    종교는 없지만
    마음이 따뜻해졌어요
    원글님은 세상을 보는 눈이 따쓰한 분이네요

  • 3. 세상에나
    '24.11.5 10:51 PM (1.235.xxx.154)

    한 편의 소설같은데요
    실제 있었던 일이군요
    친절함 이해심으로 한 분을 변화시키셨네요
    소리도 지르지않으시고
    대단한 믿음이세요

  • 4. ...
    '24.11.5 10:55 PM (114.203.xxx.111)

    오늘 좀 건드려져서 힘들었는데
    감사해요

  • 5. ..
    '24.11.5 11:02 PM (182.215.xxx.192)

    지우지 말아주세요. 종종 힘들때 읽어보게요

  • 6. 로로
    '24.11.5 11:05 PM (175.121.xxx.74)

    아름다운 얘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조수석의 예수님과 친구사이이실 것 같아요- ^^*

  • 7. tower
    '24.11.5 11:06 PM (211.36.xxx.247)

    지금 우리 옆에도 예수님 계세요.

    내 옆에서 내 가슴 울리는 소리 다 듣고 계신 분.

  • 8. 아아
    '24.11.5 11:06 PM (59.17.xxx.179)

    좋은 글이네요

  • 9. 댓글 주신 분들
    '24.11.5 11:19 PM (210.204.xxx.55) - 삭제된댓글

    다들 감사합니다.

    세상에나 님, 제가 그분을 변화시킨 게 아니라 그분이 저를 변화시켰어요.
    나이 드신 어머니뻘 여인이 병든 남편 먹여 살리겠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 그 자체가
    저한테는 정말 마음 서늘해지는 감동을 줬어요...
    배우자 처지가 안 좋아지면 매몰차게 버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한테는 그 어머니가 불보살이에요. 제게 깨달음을 주려고 찾아온...

    그리고 또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어떤 사람이 모자라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그걸 이해하신다는 걸 알았어요. 그 마음 속에 있는 피해의식을 아시고
    그게 생길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너무나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걸 깨달은 거죠.

    하느님은 그 피해의식과 부끄러운 모습을 미워하고 책망하시지 않고
    이해하고 품어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또 그런 피해의식이 생길 때까지
    그 당사자가 가정과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희생한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느님은
    사람은 그걸 이해하지 못하고

  • 10. 댓글 달아주신
    '24.11.5 11:26 PM (210.204.xxx.55)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세상에나 님, 제가 그분을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저를 변화시켰어요.
    제 상황이 어렵고 힘들 때마다 저는 그때 그 어머니를 생각하곤 한답니다.
    자기 이익에 따라서 배우자를 골랐다가 버리기도 하는 이 매정한 세상에서
    한 초로의 여인이 그렇게 남편과 가정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큰 깨달음을 줬어요.

    또한 한 가지 더 깨달았어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피해의식을 미워하고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생기게 된 사정을 다 알고 그걸 따뜻하게 품어주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런 피해의식이 생길 때까지 그 사람이 감당해야 했던 어려운 일들, 상황들, 사람들을 다 알고
    그 사람이 그런 희생과 노력을 해온 것을 고맙게 여기신다는 것을 알았어요.

    우리에게는 부끄럽고 못난 모습도 있지만 그걸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있어요.
    그 하느님을 닮은 모습을 하느님께서 알아보고 우리에게 행복을 허락하시는 거죠.
    사람은 그걸 잘 모르니까 저 인간이 왜 저래, 이러면서 흉보고 멀리하지만 하느님은 아시는 거죠.

  • 11.
    '24.11.6 12:07 AM (14.33.xxx.27)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감사합니다

  • 12. ㄱㄴ
    '24.11.6 12:43 AM (121.142.xxx.174)

    밤중에 가슴을 울리는 글 감사해요.
    성경에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 기준도 밝혀 주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원글님이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셨네요.

  • 13. 아멘
    '24.11.6 1:01 AM (1.236.xxx.93)

    따뜻한 예수님 늘 항상 우리곁에 계셔 눈동자같이 우리를 보호해주심을 믿습니다 주 날개 밑 제가 평안히 쉽니다

  • 14.
    '24.11.6 1:08 AM (121.138.xxx.89)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 감사합니다

  • 15. 몬스터
    '24.11.6 1:17 AM (125.176.xxx.131)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분이시네요 원글님.....

  • 16. 희야
    '24.11.6 1:23 AM (180.230.xxx.14)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17.
    '24.11.6 1:27 AM (58.239.xxx.59)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한편의 단편소설같네요. 원글님은 소설가로 등단하셔야할듯
    한강 작가님의 향기가 나요
    마트 진상손님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답게 써주신 원글님
    글솜씨 만큼이나 외면도 내면도 다 아름다운분일듯
    이밤에 무심코 읽은 글이 넘 감동입니다

  • 18. oo
    '24.11.6 2:03 AM (118.220.xxx.220)

    울컥하네요 글이 너무 따뜻하고 원글님 마음도 따뜻하시네요
    배워야 하는데 저도 사람 상대하는 직업이라 쉽지 않네요

  • 19. 아~
    '24.11.6 2:59 AM (180.68.xxx.158)

    향기로운 글입니다.
    예수님이 원글님 손에 쥐어준 핸드폰이
    이렇게 아름다운 고백을 하게하시네요.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된 삶을 사시네요.^^

  • 20. 마음
    '24.11.6 5:21 AM (221.162.xxx.233)

    이글두번읽었어요
    원글님은 어떤분이실까 궁금해요.
    이글읽고 사실 저는 마음이 비뚤어졌구나 새삼더
    확인했어요

  • 21. 마음
    '24.11.6 5:22 AM (221.162.xxx.233)

    원글님 글감사해요
    행복한날들되세요~~

  • 22.
    '24.11.6 5:30 AM (106.102.xxx.204)

    눈물이 흐르네요~
    추억님의 따뜻한 마음과 글솜씨때문에ᆢ
    종교는 다르지만 ᆢ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나이들수록 어떤사람도 내가
    다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비난도 잘 생각해보고 하려는 마음이 들어요
    오늘 깊은 배움을 얻어갑니다
    그리고 추억님의 피해의식도 잘 치유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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