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구에 대한 복수
어린 시절 토지를 읽었을 때에는
조준구에 대한 복수가 허무하다고 느껴졌어요
관리도 안되어 쓰러져가는 평사리집을 조준구에게 다시 돈 오천원 (그 당시 거금)을 주고 사는.
정말 그 조준구랑 홍씨 부인을 평사리 별당 연못에 묶어두고 주리를 틀어도 시원찮을 판에.
말도 안되게 비싼 값에 주고 사는 서희
그런데. 지금 나이가 한참 들어 요새 가을이라 좋아하는 부분을 읽으니 새롭게 보입니다.
서희가 조준구를 압박하여 몰고 가는 모습이 긴박하게 그려지네요.
의도적으로 몇시간을 고풍스럽고 우아한 서희의 진주 기와집의 하인들 쓰는 행랑채에서 기다리게 해놓고.
조준구를 사랑방으로 안내해 아랫자리에 앉힌 후
들어서는 서희 (아름다움)
멍청한 조준구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그를 파산시켰고.
그 전보다 몇배나 더 부자가 된 서희가 조준구를 상대하고 앉아.
그가 속죄하도록 몰아부치는데 그 방식이 다시 읽으니 너무 좋네요.
안자(서희의 심복)에게 시켜 돈 만원을 갖다 놓고 반으로 가르게 해요.
오천원도 거금이니 만원은 뭐 막 30억? -
서희가 직접 손으로 돈을 만졌다면 그녀의 존엄이 약간 구겨지는 느낌일텐데
안자를 시켜 거금을 반으로 가르게 하는 것도 숨막힙니다.
그리곤
‘일말의 양심을 가져가시든지, 오천원을 집어가시든지’라고.
뭐. 염치없는 조준구가 식은 땀을 흘리며
자기 사는 형편이 어렵다고 얘기도 하고…
서희는 당신의 선택이에요. 맘대로 하세요.
조준구는 냉큼 오천원 집고 사라지죠.
일말의 양심을 가져가는게 아니라 .
동네 사람들도 이렇게 한 서희를 이해할 수 없다라고 하죠
그런데 나이들어 다시 읽으니 이 복수의 방법이 곱씹게 되네요.
서희가 다시 찾으려고 했던 가치가 단순히 돈과 땅이 아니라 자존심, 권위, 윤리적 우위, 염치, 고귀함, 뭐 이런 것이였음을.
조준구 뺨이라도 때렸으면, 시원했을런지 모르나.
그렇게 했다면, 이처럼 조준구의 비열함이 드러나지는 않았을 듯요.
철저히 힘을 빼앗고, 무력한 상태에서, 일말의 양심을 가져가도록 몰아넣죠.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이제 결코 대등한 상대가 되지 않는 비굴한 늙은이가 돈오천원을 가져가는데.
싸하게 통쾌하네요.
예전에는 이 부분 답답했는데.
또 길상이는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너무나 실망스러운 캐릭터.
박경리 작가도 자기가 길상이를 너무 사랑해서 망쳐버렸다고 하는데,
정말 이야기에서 어디로 데려가야할지를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시간의 압력 속에 부서져버린.
중2병 걸려 자아찾기 하는 소년 같기도 하고.
서희를 방치하다시피 내버려두었고.
그러나 덕분에 뭔가 쓸쓸한 연민으로 남은 둘의 사랑이 토지에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과감히 중요한 장면을 생각하고 불친절하게 한 문장으로 갑자기 던져놓는 박경리 작가때문에
예전에 놓쳤던 부분을 보게되는데.
이 번에 다시 읽으니 여러 곳의 힌트 덕에 이 둘은 평생 10번도 같이 안 잤을 것…같. ^^
다시 읽으니 언제나 좋네요. 역시 이 소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