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고등학교때 마음이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아무도 몰랐을 거에요.
외양적인 것은 강남 8학군의 모 여고 다니면서
성적 상위권에,
늘 까불기 좋아하고,
친구들 몰고 매점 다니기 좋아하는
발랄 명랑한 소녀였죠.
하교 후에는 친구들과 돈모아서 매일매일
즉석떡볶기를 먹고, 후식으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었어요.
친구들 웃기는게 취미였고,
매일 저녁 친구에게 갬성+개그로 편지를 썼고요.
그런데 저는 집에 들어가기가 너무 긴장되고 무서웠어요.
새엄마가
소파에 눈 내리깔고 앉아 계실것이 상상되었거든요.
마치 냉장고에서 막 나와서 허연김을 뿜어내는 얼음 덩어리처럼요.
그 표면에 닿으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움츠려들듯,
새어머니의 차가운 시선에 부딪히는 일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매일 야자 끝나고 신나게 수다떨고 헤어진 후,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숨을 딱 멈추고
아파트 베란다를 올려다보며 세었어요.
1,2,3,4,5,6층..아! 다행이다 오늘은 불이 꺼졌다.
주무시나보다. 휴.
남들은 고2, 고3이라고 엄마아빠가 늦은밤 데리러 오고,
피곤하지, 어화둥둥 해주고 간식주고 했겠지만
저는 존재를 감추는게 가장 큰 미덕이었어요.
아파트 철문 열쇠를 찾아서 최대한 소리 안나게 ,,
열쇠 끝을 열쇠구멍의 벽에 밀착시켜 천천~~~히 돌리면
마지막 딸깍 소리에 다시 심장이 쿵.
문을 사알....짝 열고 발끝으로 들어갑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도시락 두개 싸던 시절이니 다 꺼내요.
씻어놓지 않으면 안되니 잔반....남기면 혼나는데,
쓰레기통(그땐 음쓰 따로 분리안할 때)의
다른 쓰레기 밑에 마지막 한입 남은 쉰내 나는 밥덩이를 감추어 버려요.
물을 최대한 소리나지 않도록
하나의 실뱀처럼 주르륵 흐르게 작게 틀고는
가만가만 오래오래 두개의 도시락을 씻어 엎어놓습니다.
출출하여 먹을 것 있나 찾아보니
세탁실 세탁기 위에 뭔가 반찬이 올려져있어요.
아마 식히느라 거기 있나봐요.
선채로 한 두어입 주워 먹어요.
아침엔 여지없이 그 감춰버린 밥덩이에 대해 혼나죠.
쉬는 시간에 먹었는데, 선생님 들어오시는 통에
마지막 한 입은 못먹었다고 사실.을 말했는데,
저 한 입을 못먹을리는 없다고 단정하는 새어머니 말에
저는 항거할 힘을 잃어요.
길게 말해봐야 길게 혼날 뿐.
고개를 푹 숙이고 꼬리를 내립니다.
더불어 '쥐새끼처럼' 세탁실에서 반찬을 주워먹었다고
또 한소리를 들어요.
쥐새끼 눈이 어두워 세탁기 위에 몇방울 흘리고도 몰랐나봐요
쥐새끼.가 내 몸에 찍찍...새겨집니다.
그렇게 들으니, 밤늦게 불도 안켜고
누가 나오기 전에 허겁지겁 입에 뭘 몰아넣는 내 모습이
쥐새끼랑 꼭 닮은 것 같아요.
새엄마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나에게 밥해주고, 엄마의 자리를 채워주는데
무서워하고 피하는 내 자신을 보며 죄책감도 들어요
은혜도 모르는 사람같고요.
그렇게 어둑어둑한 가정생활을 하고
학교에 오면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있고,
거의 혼날일이 없었던 안전한 학교와교실이 있었어요.
운동장에서 뛰어 놀아도 되고
소리를 지르고 호들갑을 떨어도
'유난떤다'는 소리도 안들어도 되고요.
저는 낮과 밤을 오가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까불쟁이 오락부장 여고생을 보며
밤을 상상하는 사람은 없더라고요.
저의 밤은 참 외롭고 길었는데도요.
혼자서 등불없는 외딴 길에 서 있는 기분이었어요.
새엄마는 좋은 분이었어요.
저 몇 워딩이 비인간적이었지만,
저도 마음 속에서 그분을 비난하고 싫어하고 두려워했고
철없는 짓도 엄청 많이 했기 때문에 비겼어요
불편한 관계로 만난 운명 탓을 해야죠
그 시간을 그래도 잘 지나온걸 감사하게 생각해요.
수많은 인생 터널 중 하나였다고..
겉으로 아무 생각없이 무뇌로 보이는 까불쟁이도
각자 마음 속에서는 어둠과 전쟁을 치루고 있을지 몰라요.
그래서 사람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지 말고,
친절하게 대해주려고요.
저 자신에게도, 남에게도요.
좋은 오후 되시기 바랍니다.
일 하기 싫어 잠시 82에서 놀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