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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는 1933년 당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던 이승만(1875~1965) 대통령을 만나, 다음해 1934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 그리고 1948년 경무대 청와대의 옛 명칭으로 대통령 집무실 겸 관사로 활용의 안주인이 되었다. 여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호주댁’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당시 서양인을 영부인으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사회적 분위기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진 한국에서,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대통령의 부인으로서의 특별한 삶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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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사의를 밝히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 대한 부정과 4.19 혁명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으로 같은 해 5월 29일 프란체스카 여사는 대통령과 함께 하와이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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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부와 국내 언론은 그의 귀국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무엇보다 이 대통령의 진정한 사과가 우선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급기야 이승만 대통령은 1962년 3월 17일을 출국 예정일로 정하고 귀국 준비를 서두르던 중, 한국 정부로부터 귀국 만류통보를 받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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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간이 흘러 1970년 5월 16일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0년 하와이로 떠난지 꼭 10년 만에, 남편을 타국 땅에서 떠나보낸지 5년 만에 한국에 영주하기 위해 돌아왔다. ... "(이화장의) 필요한 보수공사가 완료되었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략> 또한 각하께서 이 박사의 유산을 반환토록 지시해 주신데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 1970년 3월 17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서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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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의 서한에 박정희 대통령은 ‘문서처리전’을 통해 비서실장에게 수기로 지시사항을 전달했는데, 여사의 귀국과 관련해서 이화장의 내부 수리와 귀국 후 생활보조 문제를 협조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지시의 결과 여사에게는 매달 50만원의 보조금과 개인용 크라운 차가 지급되었으며, 귀국 직후 프란체스카여사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1970.6.11)을 보면 이에 대한 감사의 뜻이 담겨져 있다.
[출처] 2013년 11월 대통령기록관 기념전시 내용 https://www.pa.go.kr/record/201311/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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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그럼 박대통령이 병주고 약주고 한건가요?
한편, 이승만(1875~1965)의 본처 박승선(1875~1950) 이야기는 여기에...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62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