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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선은 오직 신앙에 의지해 수절했다. 성경을 끼고 살았다. 현 남대문시장 내 상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1920년대 신문 보도가 있으나 상동교회의 기록은 없다. 전동교회(典洞·현재 견지동) 전도사라고 했으나 이 역시 실증되지 않는다. ‘신학 공부를 한 똑똑한 전도사’라는 보도다. 이승만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아들 태산을 지인 편에 보냈고 자신도 남편에게 가기 위해 선교사 주선으로 일본 나가사키에서 영어 공부를 하다 발병해 3개월 만에 포기하고 귀국했다. 태산은 미국에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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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금의환향한 이승만은 박승선을 내쳤다. 박승선이 그의 거처 ‘돈암장’에 몇 번씩 갔으나 애정이 없었다. ‘부정설’ ‘개가설’이 있는 데다 프란체스카와의 결혼 때문이었다. 중혼인 셈이다. 결국 이승만·박승선의 창신동 호적은 이승만 집권기에 지워졌다. 하나님만을 의지해 살던 한 여인은 1950년 인천상륙작전 직후 얹혀살던 신당동 사돈집 대문에 발린 인민군 포스터를 찢어 버렸다가 그날로 잡혀 납북되고 말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건이다.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출처] - 국민일보 2020.11.6. 한국기독역사여행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62948
... 라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은 거의 안알려져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