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개막한 국립오페라단 국내 초연작 [죽음의 도시] 추천합니다. 금요일 공연을 막 보고 집에 도착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최근 몇년간 본 오페라 중 최고였어요.
오페라답게 단기 일정이라 총 4회 공연으로 26일 일요일 끝나기 때문에 급한대로 간단하게나마 추천글 올립니다. 해외 협력이 많은 오페라 특성상 단발성 프로덕션에 그칠 가능성이 높고 더군다나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라 다시 보기 힘들 겁니다.
국립오페라단이 간만에 물건 하나 제대로 내놨습니다. [라트라비아타][보체크] 이후 오페라 서사에 집중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본 경험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잘 만들었네요. 인터미션 더해 3막 165분인데 시간이 후딱 지나갑니다. 예매는 일찌감치 해놨지만 생소한 작품이고 이달에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어서 관람하기까지 취소 문제로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봐야겠어서 움직인건데 보기 잘했습니다. 국내에서 인지도가 약한 작품이라 자리가 남아도는데 마음같아선 토요일 공연이건 일요일 공연이건 한번 더 보고 싶네요.
1930~1950년대 할리우드의 영화음악 작곡가로 활약한 오스트리아 출신 작곡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드가 1920년 올린 독일 오페라로 이번 국립오페라단 기획이 국내 초연입니다. 원작 [죽음의 도시 브뤼주]는 사진이 수록된 최초의 소설로 1892년에 출간됐고 작년에 국내에도 번역됐습니다. 얼핏 줄거리를 보면 히치콕 [현기증]과 유사해서 [현기증] 원작인가 싶었더니 [현기증] 원작은 다른 작품이더군요.
에리강 볼프강 코른골드는 1939년 [로빈 훗의 모험]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작곡가이고 할리우드에서의 영화음악 작곡가 활동은 나치 핍박을 피해 1935년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그전에 나온 오페라 [죽음의 도시]에서도 스튜디오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느낌이 나서 클래식한 친숙함으로 귀에 착착 감깁니다.
막마다 무대 구성이 압권입니다.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심각한 네크로필리아 증상에 시달리는 남자가 죽은 아내와 비슷한 외모라고 착각한 무용수 여자와 관계되면서 정신분열 증세와 심각한 패티시 증상을 보입니다. 애도와 추모를 끝내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는 홀아비의 정신적 독립에 이르기까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데 1막의 현대무용과 스톱모션을 섞은 것 같은 기괴한 동작의 죽은 아내 표현 방식은 흡사 납량 오페라극을 보는 것같이 섬뜩하게 사로잡습니다. 소름끼치면서도 산자의 정신을 지배하며 죽은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얼굴 없는 귀신의 고독과 호소가 몸부림으로 처절하게 드러나죠. 무서우면서도 가엽고 애잔합니다.
2막의 공중부양 그네를 타고 내려오는 극중극도 굉장합니다. 3막은 애틋한 사랑과 영혼으로 호러에서 감동적인 멜로로 전환되며 신비롭고 낭만적인 고딕풍 멜로드라마로 가슴을 적십니다. 기괴한 패티시의 섬뜩한 긴장감과 사별의 트라우마와 영적인 지배가 독특한 몽환으로 음산하게 휘어잡습니다.
예전 KBS '금요일의 여인'이 무단으로 가져다 쓴 유명 추리 소설같은 멜로드라마의 음산한 구조가 탁월하게 맞물리고 가사도 뛰어나서 모처럼만에 가사를 전부 읽으며 봤습니다. 오페라는 자막기 가독성이 떨어져서 대략 해당 곡의 흐름만 파악하는 정도로 가사의 3분의 1 정도만 읽는 편인데 이 작품은 빼어난 가사에 줄거리 자체가 무척 흥미진진해서 저절로 읽게 되더군요. 곡들도 훌륭하고 성악가들의 기량도 뛰어납니다.
오페라 프로덕션이란 게 보통 한번에 그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은 국립오페라단의 근래 기획들 중 [호프만의 이야기]처럼 추후에 한번 정도 더 올렸으면 좋겠어요. 현재 관객도 많지 않은데 4회 공연으로 접기엔 연출이 아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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