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4년 동안 어떤 업적을 쌓았는지 엄청 자랑을 했다. 나는 이런 행동을 정치인의 기본자세(?)로 여기는지라 별 거부감 없이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런데 그 후 나온 이야기가 놀라웠다. 다가올 지방선거에서 그가 광역자치단체장에 도전을 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가 이미 기초자치단체장으로 재선을 했으므로 광역자치단체장에 도전을 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충격적이었다. “이번에 광역단체장이 돼야 다음 대선에 출마를 할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차를 마시다가 나도 모르게 풉 하고 뿜을 뻔 했다. 대선이라니? 국민들 중 이 정치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1%도 안 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는 진지했다. 함께 일하는 공무원들 모두가 자신에게 “대통령 자격이 충분하다”고 조언했단다. 당연하지. 그러면 공무원들이 직속상관인 그에게 “에이, 너님이 대통령을? 꿈 깨세요” 그랬겠냐? 그게 그렇게 구분이 안 될 일이냐고?
고층에서 떨어진 고양이
다른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1987년 한 동물학자가 신박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고양이가 높은 빌딩에서 떨어졌을 때, 6층 이하에서 떨어진 고양이보다 6층 이상에서 떨어진 고양이의 부상이 훨씬 가벼웠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되나? 나도 고양이를 모시고 사는 집사이기에 고양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질 때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하는지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한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진 고양이가 낮은 곳에서 떨어진 고양이보다 덜 다쳤다니?
이 연구에 대해 물리학자들은 ‘종단속도’라는 어려운 개념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문과 출신인 나는 뭔 소린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는 설명이었는데, 아무튼 이 설명에 따르면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진 고양이가 낮은 층에서 떨어진 고양이보다 덜 다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런데 내가 문과출신인 것을 떠나서 이 설명이 맞는다면 사람도 고층에서 떨어질 때가 저층에서 떨어질 때보다 덜 위험해야 정상이다. 그게 물리고 과학 아닌가? 그런데 실제 그런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나는 이 연구를 당최 신뢰할 수가 없었다.
이에 관한 진실은 2008년 세실 애덤스(Cecil Adams)라는 필명을 쓰는 익명의 과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애덤스에 따르면 당시 연구에서 이런 이상한 결론이 나온 이유는 통계 대상을 잘못 정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이 연구를 위해 고양이를 직접 저층이나 고층에서 떨어뜨렸을 리가 없다. 그랬다가는 동물학대로 감옥행이다. 이 말은, 당시 연구가 결국 동물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온 고양이의 데이터를 분석해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물병원에 고양이가 치료를 받으러 왔다는 것은 그 고양이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떨어져서 즉사한 고양이를 병원에 데려왔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 연구의 결과가 이상해진 결정적 이유다.
건물에서 떨어져 살아남은 고양이를 분석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고층에서 떨어졌는데 부상이 덜 심한 고양이? 그 고양이는 유난히 운동능력이 뛰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고양이는 그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는다. 사망한 고양이까지 통계에 넣었다면 저런 이상한 결론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이 논쟁이 알려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진실을 알고 싶으면 살아남은 고양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고양이를 분석해야 한다. 이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매우 다양하게 적용이 되는 법칙이다.
세상을 바로 세우려면 살아남았거나 성공한 사람을 분석하는 것보다 실패하고 목숨을 잃은 사람을 분석해야 한다. 성공보다 실패를 더 중요하게 취급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서 행동경제학에서는 흔히 저지르는 이런 잘못을 ‘생존자 편향의 오류’라고 부른다.
한동훈의 자아도취 정치
총선이 좀 지났지만 그 이야기를 하나 해보자. 지난 총선에서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한동훈이 정치 일선에 데뷔한 것이었다. 강남 8학군 출신의 부르주아가 과연 대선주자급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가 총선의 주요 관전 포인트였다. 결과는 아시다시피 폭망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결과를 보고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한동훈의 총선 데뷔가 결국 실패할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총선 기간 내내 보여준 그의 행적은 그야말로 자뻑 정치, 자아도취의 결정판이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그 기초자치단체장은 주변에서 으쌰으쌰 해주니 주제파악이 안 된 것이다. 한동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는 곳마다 골수 보수들이 “함께 사진 찍어요!” “잘생겼어요!” 이러고 있으니 거기에 흠뻑 취해버렸다.
그래서 주제파악이 안 된다. 주제파악이 안 되니 뭘 해야 할 지 모른다. 선거 내내 운동권 청산이니 이조심판이니 하는 말도 안 되는, 태극기 부대나 좋아할 말만 씨불이시다가 선거를 참패한 게 그 증거다.
그래서 정치인은 자기 객관화가 돼야 한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자기 주변에서 으쌰으쌰 하는 사람만 보면 안 된다.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봐야 한다. 살아남은 고양이가 아니라 사망한 고양이를 봐야 진실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한동훈은 이걸 못했다. 자아도취 정치의 운명은 결국 대실패로 돌아갔다.
이래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주제파악이야말로 자기를 지키는 핵심 능력이다. 나는 길을 가다 매력적인 이성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 일단 경계부터 한다. 왜? 객관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나에게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상대방은 장기매매범이거나, 다단계이거나, “도를 아십니까?”이거나 셋 중 하나다.
한동훈이 앞으로도 계속 정치를 하겠다는데, 나는 그가 과연 이 자아도취 정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하다. 그리고 내 경험상, 성공가도를 달려온 사람들은 여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검사가 되는 일은 시험을 잘 보면 되지만,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한다. 총선 기간 내내 자기 앞에서 으쌰으쌰 하는 사람에 취해 해롱거렸던 한동훈의 정치적 미래는 내가 보기에 매우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