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의 12월은 제게 설렘이었어요.
그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저는 우리집 강아지 보다도 못한 존재였어요.
사업가 아빠는 언제나 부재중이었어요. 차가웠던 집만큼이나 더 쌩한 새엄마라는 여자와 그 여자의 딸에게 저는 언제나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어요.
옆 집에 저보다 3살 많은 피비케이츠 닮은 언니가 살았는데 그 언니네 부모님도 이혼해 언니는 고모와 살고 있었어요. 바하 인벤션, 모짜르트, 쇼팽 야상곡과 에띄드를 스와니강 치듯이 치는 언니, 구디 막대핀과 구디방울이 철제 덴마크 쿠키통에 가득 있던 언니, 미국에 있는 엄마아빠와 전화로만 만날 수 있는 언니.
소설 속에 나올법한 이쁘고 고상한 이름을 가진 언니도 외롭고 심심했는지
집에만 오면 저를 데리고 다녔어요.
미국에서 보내온 옷으로 저를 꾸며주기도 하고, 머리모양도 이리저리 바꾸어 주고, 또 어떤 날은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피아노를 가르쳐주기도 하고요.
그림도 그리고, 분홍 존슨즈로션을 얼굴과 손에 발라주기도 하고...
12월 10일 경 부터는 보낼 곳도 없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잔뜩 만들어 댔어요. 반짝이풀과 색상지, 색종이, 싸인펜, 색연필, 크레파스 등으로 요렇게, 조렇게 예쁘고 정성스럽게... 봉투에는 크리스마스씰도 미리 붙여놓구요. 집 밖에만 나서면 어디서든 캐롤이 들리고 작은 구멍가게에는 싸구려 크리스마스 장식이라도 하나씩 붙어 있었어요. 문방구에는 크리스마스카드와 카드, 장식품을 만들기 재료들이 가득했어요.
교보문고, 동방플라자 같은 곳은 중앙 가장 넓은 곳에 카드 판매대가 자리했구요. 큰 트리도 있었어요.
설렛어요.
12월 내내 붕 떠있는 것처럼요. 크리스마스에는 짠!하고 괜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어요.
내게 일어날 좋은 일이라고는 5살때 헤어진 친엄마와 같이 사는 일 밖에는 없었는데, 혹시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대신 엄마랑 살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산타의 존재가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요.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카드는 옆집 언니와 친구들, 선생님에게만 주고 가족에게는 주지 못했어요.
피비케이츠를 꼭 닮은 언니가 없었다면
그때의 12월은 그렇게 설레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면 1987년 12월 만큼 설레는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없었어요.
누구라도 이리 오라고 손짓하면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유기견처럼 저는 옆집 언니에게 다가 갔어요.
부모없이 외로웠던 작은 아이 둘이서 그렇게 12월을 지냈어요.
언니는 봄이 오자 갑자기 옆 집에서 사라졌고,
저는 6학년 때부터 친엄마와 살게 되었어요.
2023년의 크리스마스는 길에 들리는 캐롤도 없고,
반짝이 풀로 덕지덕지 만든 카드도 없고, 크리스마스 씰도 없네요.
마치 항상 벌을 받고 있는 기분으로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이었지만, 4학년 때의 설렛던 12월로 돌아갈래? 하면
망설임 없이 그 언니를 만나러 돌아갈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