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원대 조성민교수 페북)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한 장태완소장을 칭송해왔는데, 결국 신군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한 자리 꿰찼군요.
백승종교수님 글을 옮깁니다.
5.18이후의 장태완의 이력을 제대로 아십니까 – 신군부의 배려로 한국증권전산사장에 임명된 장태완
경향신문 1982년 2월 26일 – (한국)증권전산사장에 장태완씨: 장태완씨(예비역 육군소장)가 25일 한국증권전산주식회사 사장으로 선임됐다. 이것은 장태완이 신군부와 모종의 타협을 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국증권전산사는 민간기업의 형태로 운영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영기업이나 다름없었다.
이 회사는 현재 회사명을 주식회사 코스콤이라고 한다. 최초 설립일은 1977년 9월 20일인데, 그 설립 배경은 그 당시의 재무부였다. 재무부가 증권거래소 내에 ‘증권전산실’의 설치를 지시한 것이 출발점이었다(‘75.5.20). 그리하여 재무부 장관의 내부 인가를 거쳐 증권 유관기관 및 증권회사가 공동 이용할 목적으로 증권전산 전문회사를 설립하였다. (‘77.9.20)
1982년 2월 말에 장태완은 관련 분야에 경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이 회사의 사장에 임명되었다. 전두환 정권과 장태완이 대립하고 있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였을까. 이미 전두환은 대통령이란 자리를 차지하였고, 그는 “패장 장태완”을 회유하려고 반(半) 관영회사의 사장 자리를 제안한 것이었다. 장태완은 그 자리를 수락함으로써 일단 해빙무드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점이 묘했다. 장태완의 외아들 장성호(서울대 학생) 군이 조부의 산소 근처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아마도 전두환은 장태완 일가에 대한 심리적 부채를 줄이기 위해 “큰마음”을 쓴 것으로 보인다.
그 뒤로 전두환 집권 기간 내내 장태완은 정권전산사의 사장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경향신문 1984년 2월 24일에는 장태완이 증권전산 사장에 유임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 매일경제 1986년 2월 28일자에는 장태완 사장이 다시 유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증권전산사의 주주총회에서 결정된 사안이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자 장태완의 자리가 잠시 흔들렸다. 노태우 대통령은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던 것 같은데, 장태완은 호락호락 물러나지 않았다. 경향신문 1988년 4월 4일자를 보면, “증권거래소 사장 놓고 하마평 무성 ... 장(태완) 사장은 직원들에게 ‘임기를 채우겠다’고 공언, 한때 가능성이 약해지는 듯했으나 최근 다시 가장 강력한 후보로 나섰으며 ...”라는 기사가 보인다. 장태완은 노태우 정권과 협상하여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었다.
이후 회사의 사장 자리는 회장으로 승격되었다. 장태완은 그 자리로 옮겨 앉았다. 경향신문 1989년 3월 31일자를 읽어보면, “한국증권전산 정(기)총(회) 장태완씨 회장 승진”이란 기사가 보인다. 이렇듯 장태완은 제5공화국이 태동하던 초기에 몇 개월 동안 심한 고초를 겪은 이후, 늦어도 1982년 2월 말부터는 상당히 좋은 자리를 얻어, 군부 정권이 이어지는 동안 계속해서 경제적 및 사회적 활동을 계속하였다(1995년 3월 말까지). 그를 군부 집권의 “가엾은 희생양”으로만 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