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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오랑 소령의 양친은 막내아들의 비참한 죽음에 충격을 받고 홧병으로 사망했다. 김오랑의 부인인 백영옥(白榮玉)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으로 완전 실명했다. 체포조를 지휘했던 박종규 중령과 김오랑 소령은 가까운 선후배라서 충격은 더했다. 두 사람은 관사에서도 위아래층에 살던 이웃이였고 쿠데타가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에도 부부들끼리 동반으로 저녁식사를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훗날 백영옥은 관사에서 퇴거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갈 곳도 없는 상황이였다. 관사에 머무는동안 남편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던 도중, 총격에 맞은 김오랑을 의무실까지 업어준 당번병을 찾았다. 그 역시 상관들에 의해 함구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설득끝에 친하게 지낸 이웃인 박종규 중령이 지시했단걸 알게 되었다. 그 뒤 전화로 왜 그랬냐고 원망하듯 따지자. 박종규 중령은 "난 군인이니까 명령대로 한 거요!" 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백영옥이 "군인이 반란 일으키라는 걸 명령대로 하나 보죠?" 라며 일갈하자 반론하지 못하고 끊어버렸다고 한다.
1986년 한 여성지에서 백영옥을 인터뷰한 바에 따르면 매달 30만원씩 나오는 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8] 김오랑-백영옥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백영옥의 건강문제로 인해, 자녀 계획 자체를 미루고 있었기 때문.
백영옥은 1990년에 전두환, 노태우, 최세창, 박종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려 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보류되었으며, 1991년 6월 28일 자신이 운영하던 부산 자비원 마당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당시에는 실족사로 수사가 마무리되었으나 백영옥의 유족들은 의문을 제기했다.[9] 그나마도 처음에는 자살로 발표했으나 유족들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경찰에서 슬쩍 실족사로 수정한 것이다.[10] 또한 국립묘지 안장 대상자였건만, 괴상망측한 까닭에 걸려서 남편과 합장되지 못했다. 백영옥은 사후 친정 오빠들에 의하여 수습되고 화장처리되어 1991년 11월 15일 친정오빠였던 백영도씨가 부산영락공원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를 신청하여 20년 가까이 무연고자로 방치되어있다 2008년 3월 31일 개장되면서 무연고자들과 합동으로 산골되었다고 한다.
김오랑 소령 전사 직전까지 군사반란군에 맞섰던 '참군인'
..하지만 하나회에게 끔찍한 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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