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시어머님은 저희집에도 안 오시지만 전화도 거의 안하십니다 ( 아버님과 꽁냥꽁냥 평생 재미있게 사셔서 그런가 )
제 결혼생활 33 년 동안 먼저 전화하신 적이 다섯손가락 채울까 말까 정도이니 ( 저희 아이들 태어났을 때 축하 전화 , 저희 부모님 아프실 때 힘내라고 격려 전화 .. 등 )
그대신 자상하시고 저와 쿵짝이 잘맞는 시아버님이 한번씩 전화하시면 저와 수다를 떠시며 긴 통화를 하고 저는 저희 부부와 아이들 근황을 보고 ? 드려요
어머니는 그냥 너네끼리 잘살면 된다는 쿨한 분이라 동서네가 어쩌구 하는 얘기도 일절 안하십니다
그러던 분이 어제 밤 9 시가 다 되어 전화를 하셨어요
먼저 전화를 하신 것도 , 밤 9 시라는 시각도 어머님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인데 연세가 있으시니 가슴 덜컹하며 받았죠
심심해서 , 누구랑 얘기하고 싶어서 하셨대요
그렇게 시작된 통화가 정신없이 떠들다보니 한시간을 채웠네요 ( 전화하는 동안 옆에서 놀 사람없는 남편은 강아지마냥 뱅글뱅글 안절부절 ㅎㅎ )
처음엔 제가 얘기를 시작했는데 제가 아끼는 친구 얘기 , 그 친구의 친구 얘기 , 동네에 저와 친해진 떡집 여사장님 얘기 , 얼마전 남편 사촌동생의 와이프와 만나 6 시간 수다떤 얘기 , 치매이신 저희 어머니 데이케어 생활 이야기 , 어머님 아들인 제 남편 이야기 , 이제 요리에서 손떼고 사먹는다는 이야기 , 맛 대박인 사과 발견한 이야기 , 단풍철이라고 각지 단풍 근황 이야기 , 제가 읽은 책 이야기 , 올 가을 대학로 가서 본 연극들 이야기 ,…
그러다보니 어머님도 슬슬 한번씩 끼어드셔서 어머님 친구 이야기 , 동네에 새로 생긴 코스코에 몇달만에 가신 이야기 , 아버님께 간만에 집밥 차려드리신 이야기 ( 워낙 아버님 혼자 차려드시는게 습관인 분 ), 제가 맛있다고 좋아했던 어머님표 반찬 이야기 , 어머님이 맛있다고 추억하시는 제가 담근 깍두기 이야기 , 80 중반을 넘기니 눈이 안보여 읽고싶어도 책을 읽을 수 없다는 이야기 , 너희 어머니는 데이케어에 가서 노래도 부르고 그림도 그리고 사람들과 북적북적 시간가는줄 모르고 지내셔서 재미있겠다며 부러우시다는 이야기 , 제가 늘 혼자 지내는 것 같아 친구가 있었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같이 어디 다니고 수다떨 친구들이 생겨서 좋다는 이야기 , 왜 대학 때 친하게 다니던 친구와 제가 나이들며 멀어졌는지 알고 계셨다는 이야기 , 지금처럼 열심히 즐기고 건강 챙기며 재미있게 살라는 이야기 ,…
젊은 시절 , 어머님 아버님 좋은 분들인거 알지만 시부모와 며느리라는 관계로 시작된 만남이라 좋으면서도 뭔가 어렵고 어색하고 시댁 방문하고 나와 집으로 갈 때는 숙제를 끝낸듯 후련한 느낌들이 있었는데 …
아래위로 몇년씩 차이나는 사람과도 친구먹는 중년의 나이가 되다보니 어머님도 친한 동네언니처럼 느껴져요
그리 좋아하시는 책을 읽고 싶어도 눈이 안보여 못 읽으신다는 얘기에 가슴 아프고 ,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먼저 갔을 때를 돌아보며 말씀하실 때는 저도 이젠 그게 뭔지 알게된 나이가 되었고 , 혼자서 잘 지내시고 아버님과도 사이 엄청 좋으신데 그래도 밤에 남편이 아닌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하시는 평범한 여자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 , 같이 늙어가는 중노년 여자끼리 수다떠는 것도 재미있구나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니 고부관계라는 것이 수십년전 찍은 도장의 잉크가 다 바래버려 희미해진 것처럼 이제는 별 존재감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네요
올 겨울엔 밤마다 한번씩 어머니와 긴 통화를 하며 수다떠는 일이 종종 있을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