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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엄마 #1

이순이 조회수 : 3,511
작성일 : 2023-05-30 15:55:01
내가 중학교 되던 무렵 엄마는 하루 아침에 가출을 했다.
서울의 어느 반지하 방에 세 살고 있을 때였다.
학교 다녀와 보니 집안의 모든 세간살이가 사라지고
촌스러운 자주빛 밍크담요 몇 개가 바닥에 추레하게 쌓여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분명히 사람이 있었는데
별 잘난 것도 없는 살림살이와 함께 엄마는 휴거되었는가. 
그집에 처음 이사들어갈 때,
반지하 치고 밝게 빛이 잘들어온다고 엄마가 좋아했었는데
집은 아침과 다르게 잿빛 동굴로 변해 있었다.

빈 공간을 보고, 오빠의 망연자실한 표정을 보고
가슴 한쪽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내 기억의 저편에 엄마가 나와 둘이 있을 때 몇 번
'엄마가 갈 건데, 너는 데리러 올게' 라고 웃으며 했던 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 이런 거였어? 
엄마가 간다는 것이 이런 것인 줄, 나는 버려지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내 본능은 이런 기억을 얼른 숨기라고 종용했다.
엄마가 자식들을 버리고 간 것은 분명 나쁜 짓이고,
그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나는 공모자 이므로 
게다가 말썽을 자주 피우는 오빠는 말고, 나만 데리고 간다고 했던 것은
더 잔인한 일이니 이건 의심할 여지없이 숨겨야 할 일이었다. 
죄책감과 수치심 황망함이 뒤엉켰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이 사실을 철저히 함구했다.

충격은 눈물도 감정도 아예 원천부터 틀어 막아버렸는지
눈물 한 방울, 한숨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남기고 간 괴발개발 써내려간 편지에는
차라리 불가피하게 두고 가는 모정의 피눈물이라도 서려있으면 같이 울기라도 하련만
두고 가는 자식들에 대한 어떠한 염려나 애정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동봉된 낡은 놋쇠 쪼가리 같은 십원짜리 4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공중전화 두 통을 걸 수 있는 돈이었다. 
벌써 몇 년 전 이혼한 늬 아빠에게 전화하라는 거였다. 
뒤에서 바람 핀 상대의 아내가 칼을 들고 쫓아와도 이리 급하지 않을텐데
양육권을 찬찬히 넘기고 갈 여유도 없이 
구차한 살림살이를 하루아침에 쓸어 담아 달아난 엄마는 
과연 무엇에 미쳐있던 것일까...
찌그러진 냄비는 데려갈 지언정 
정녕 우리는 엄마 인생의 차꼬였단 말인가.
행여 물건을 실는 중 우리가 학교에서 예상보다 일찍 올까봐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이삿짐 인부들을 재촉했을까...
우리가 없을 때를 골라 옷가지를 챙기고 물건들을 고르느라
얼마나 오랜 시간을 은밀한 작업을 했을까
방을 빼고 전세금을 받아가는 것을 우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마나 꽁꽁 비밀을 봉인했을까.

엄마는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우리를 버리려고
세심한 열정을 기울였음이 틀림없다.
엄마가 가고 난 후 남겨진 사진속의 엄마 모습은 모두 공을 들여 도려내져 있었다.
우리가 웃고 있는 우리 옆 자리의 엄마는 사라진 세간살이처럼 텅비어 있었다.
우리 남매가 가장 충격적으로 엄마의 떠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마치 공연 준비하듯 세심히 소품까지 신경을 늦추지 않았다.
떠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의 여운이 
엄마가 떠난 뒤에도 예상치 못한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것은 메세지였다.
이제 너희 인생에서 나는 없는 사람이라는. 
나도 너희를 이미 지우고 떠났다는.
아무도 말로 전하지 않았지만
친엄마가 백주 도주했다는 것과, 
우리는 이제 그 사람을 인생에서 도려내야 하는 과업을 받았음은
내 폐부에 깊게 새겨졌다. 
엄마의 자리는 그때부터 도려내져 있었다.
나는 13살부터 엄마 없는 인생을 살게 되었다.

IP : 180.69.xxx.124
3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23.5.30 3:58 PM (203.236.xxx.188)

    아이고
    딱해라 ㅜ ㅜ

  • 2. ~~
    '23.5.30 3:58 PM (220.92.xxx.184) - 삭제된댓글

    엄마 아버지 힘드신데 저 키워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 3. 오늘은2
    '23.5.30 3:59 PM (14.32.xxx.34)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요 세상에
    원글님 고생 많으셨어요

    그 엄마 소식은 지금도 모르시나요?
    뭣때문에 자식들까지 모르게 그렇게 갔나요

  • 4. ...
    '23.5.30 4:00 PM (123.212.xxx.209)

    참 기막히다

  • 5. 이순이
    '23.5.30 4:00 PM (115.21.xxx.250)

    반백년의 인생을 살고보니
    그때의 경험이 내 인생의 큰 축을 담당했더라고요.
    그래서 한 번 찬찬히 정리해보고 싶었어요.
    반대하지 않의면 가끔 써볼게요

  • 6. ..
    '23.5.30 4:01 PM (112.150.xxx.163)

    작가세요? 진짜 글 잘쓰시고 먹물티가 철철 넘치시네요. 도망간 엄마 덕분에 님은 예술가가 되셨군요

  • 7. ~~
    '23.5.30 4:02 PM (220.92.xxx.184) - 삭제된댓글

    다음글 올려주세요ㅡ원글님 역경이겨내고 잘살아오신듯 해요.
    글 감사히 읽겠습니다.

  • 8. ..
    '23.5.30 4:02 PM (112.150.xxx.163)

    순이님 또 써주세요. 팬 될라카네요

  • 9. ..
    '23.5.30 4:03 PM (118.40.xxx.76)

    기다릴께요.

  • 10. 하~
    '23.5.30 4:05 PM (218.39.xxx.130)

    슬프다~ 그리고 안쓰럽다..

  • 11. 다음
    '23.5.30 4:12 PM (121.143.xxx.17)

    다음화 보려면 어디서 결제하면 되나요?

    꼭 올려주세요!

    어떤 결말이든 저는 일개 독자일뿐이니 그저 읽고 스치는 글일뿐이겠지만, 이 글을 쓰신 원글님의 지금 삶은 저때처럼 모질고 황폐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12. ..
    '23.5.30 4:13 PM (124.54.xxx.144)

    슬프고 안스럽네요
    13살의 원글님을 안아주고싶어요

  • 13. ㅇㅇ
    '23.5.30 4:17 PM (125.132.xxx.156)

    가끔이라뇨
    자주 올려주삼요

  • 14. ㅁㅁ
    '23.5.30 4:18 PM (183.96.xxx.173)

    엉엉
    저 오늘 부모님기일인데 가기는 싫고
    우울해 울고싶던차

    원글님 어뜩해 ㅠㅠ

  • 15.
    '23.5.30 4:19 PM (117.110.xxx.89)

    원글님 글 올려주세요 ~ 이렇게 글도 잘 쓰시고 철도 일찍 들었을 이쁜 딸을 버리고 간 엄마가 참 어리석은 여자였네요 .. 원망도 회환도 다 버리고 원글님의 오늘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16. 아휴
    '23.5.30 4:21 PM (125.133.xxx.93)

    세상에....ㅠㅠ

  • 17. 와..
    '23.5.30 4:36 PM (49.164.xxx.30)

    글을 너무 잘쓰시네요.. 근데 경험담이라면 너무 슬프네요

  • 18.
    '23.5.30 4:55 PM (58.231.xxx.119)

    박완서 소설 필체 같네요
    소설이에요 다큐에요?

  • 19. eweff
    '23.5.30 4:56 PM (1.248.xxx.79) - 삭제된댓글

    빈집에 남겨진 어린 남매가 자꾸 밟혀 눈물이나네요.
    맘아파요.
    독한엄마여. 왜...

  • 20. ㄴㄷ
    '23.5.30 4:59 PM (211.112.xxx.173)

    원글님의 아픈기억을 이렇게 수려한 필체로 읽으니 진짜 소설같아요. 글 기다릴게요.

  • 21. 000
    '23.5.30 5:00 PM (124.58.xxx.106)

    넘 눈물 나는 일이네요
    긴 세월 어찌 살아오셨을지......

  • 22. 다인
    '23.5.30 5:19 PM (121.190.xxx.106)

    아니 이게 정녕 사실입니까.....허이고...어찌 미성년 애들을 둘씩이나 버리고 어쩌라고...정말....인간도 아닌...아이고오....

  • 23. 안아드립니다
    '23.5.30 5:23 PM (59.24.xxx.76)

    상상만으로도 아픈 기억이네요. 소설같은 현실 이야기 계속 써주세요. 어제 취미의 세계 그분처럼 후속편 빨리 써주세요! 힘든 기억을 해야겠지만 기다립니다

  • 24. ....
    '23.5.30 5:43 PM (172.226.xxx.44)

    순이님...잘 견뎌내 주셔서 감사해요!
    후속편 기다리겠습니다
    참...사는게 때론 소설보다 더한 것이기도 하더라구요...
    마음 깊이 순이님 안아드립니다

  • 25. 글을
    '23.5.30 6:04 PM (211.216.xxx.221)

    너무 잘 쓰십니다.
    이곳에서 읽은 글 중 가장 감탄한 글이네요. 이어지는 글도 기다릴게요.

  • 26. ...
    '23.5.30 6:12 PM (118.37.xxx.38)

    어린 날의 이순이를 위로하고 안아드립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지금은 몸과 마음 모두 풍성한 축복 속에 살고 계시리라고 믿어요.

  • 27. 모모
    '23.5.30 6:37 PM (222.239.xxx.56)

    아!
    돈내고 읽고싶은 글입니다

  • 28. 달려라호호
    '23.5.30 8:04 PM (49.169.xxx.175)

    아 13살 ㅠㅠ 다음 글 부탁드려요

  • 29. ..
    '23.5.30 9:00 PM (116.88.xxx.16) - 삭제된댓글

    글 쓰시면서 원글님은 마음이 정리되시고 읽는 우리들은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입니다.

  • 30. 쓸개코
    '23.5.30 9:14 PM (218.148.xxx.196)

    이런 글을 쓰고 난 후엔 술 한 잔이 필요할듯..

  • 31.
    '23.5.30 9:24 PM (180.69.xxx.124)

    그러네요.
    지금 간헐적 단식 중이라 술은 잠시 미루겠습니다. ^^;;
    흥미롭게 들어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잘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습니다.

  • 32. 111
    '23.5.30 11:28 PM (118.221.xxx.158)

    작가 아니신지.이런 고퀄글을 이렇게 막 올려도 되는건지. 실례지만 무슨일 하시나요.

  • 33. 글은
    '23.5.31 12:22 AM (180.69.xxx.124) - 삭제된댓글

    82에만 쓰는데요. 말하고 싶을 때 글을 써요.
    그런데 제 글은 답글 안달리는 것도 많거든요.
    그런데 제가 이야기 식으로 내 얘기를 풀어놓으면 그때는 많은 분들이 말을 걸어주세요.
    신기한 경험이에요.

  • 34. ...
    '23.5.31 10:55 PM (175.119.xxx.110)

    읽는것만으로 무슨 장편소설 도입부같은 몰입감을 주시네요
    지금은 마음편히 잘지내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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