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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 조회수 : 1,761
작성일 : 2023-05-02 15:02:56
트라우마라고 하면 엄청난 아픔일 것 같지만
저에게는 타인은 공감하기 어려울,
저 자신만의 약소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초딩시절 전학을 가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니게 되었어요.
집은 어느 정도 살았지만 부모님은 엄격하기 그지 없어 친구들과 잘 놀지 못하게 한 데다
집이 멀어서 한번도 친구들과 제대로 놀아 본 적이 없고
집에 놀러 갈 수도 없었고
우리 집에 오라고 할 수도 없었죠.
공부는 잘 하는 편이었지만
친구를 깊게 사귈 수가 없었고
항상 겉도는 느낌으로 학교 생활을 했던 것 같아요.

제 생일에는 엄마가 친구를 불러도 된다고 했지만
겨울 방학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혹시 부른다고 해도 멀어서
아무도 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반 친구들 몇 명이 일요일에 학교 앞에서 만나서 놀자는 얘기를 하게 되었어요.
저는 너무 너무 기대 되고 흥분되어 거기에 꼭 가겠다고 했어요.
그러나 집에서 허락을 받는 게 하늘에 별 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었어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저희 아빠는 너무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라
나가서 자고 오고 놀고 하는 것을 한번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자존심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애걸복걸 이번만 보내 달라,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하겠다
제발 이번만 보내 주시면 정말 말도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
울며 불며 겨우겨우 허락을 얻게 되었어요.

너무 기쁜 나머지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약속 장소였던 학교 정문 앞으로 달려갔어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친구들은 오지 않았어요.
삼십 분, 한 시간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아마 한 친구 전화번호가 있었던지
그 애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너무나 여상하게 
너 나갔냐? 나는 안 갔는데, 다른 애들도 안 나왔냐?
뭐 그랬던 것 같아요.
걔가 사과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미안해 했는지 안 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요.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과 슬픔에 빠졌어요.
내가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엄청난 노력을 해서 
겨우겨우 만나러 왔는데
아무도 나오지 않은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자기가 뱉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그게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도 너무 충격이었죠.

걔들에게 일요일에 친구를 만나서 노는 것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일이었을 텐데
저는 아니었던 거죠.

다음 날 학교에 가서도 말도 못 했던 것 같아요.
너무 상처 받고 힘들고 괴롭고
집에 가서도 애들 못 만났다는 말도 못 했던 것 같아요.
자존심도 상하고 
지금 이 나이 되도록
그 장면이 떠오르면 눈물이 나요.

생각해 보면
그 또래 아이들에게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저에게는 트라우마처럼
한번씩 생각나며 여전히 힘든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걔들에게 놀이는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었을 것이고
저와는 다른 입장이었을 거라는 것도 알지만
그때 받은 충격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이런 얘기를 선뜻 하기 쉽지 않아서
아는 분께 
아주 줄여서 지나가듯 한 번 해 본 게 다인데
한번씩 떠오르면 울컥하고 
서러움이 치밀어오릅니다.

부끄럽지만
이 글로라도 
아직도 자라지 않은 상처 받은 내면의 아이를 드러내며
잘 안아 주고 싶어요.

"왜 그랬니? 애들아.
나는 그때 내 목숨을 거는 심정으로 
무서운 아빠에게 허락을 받아 그 자리에 간 거였어.
좀 나와주지 그랬어.
단 한 명이라도.
나는 그때 너무 힘들었어.
아무도 약속을 지키지 않고 
너무 상처 받았고 자존심도 상하고 너덜너덜해졌었지.
지금껏 극복하지 못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나.
내 마음은 그렇게 많이 아팠었단다.
너무 너희가 미웠고, 원망스러웠어."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아무 것도 생각 안 나는 애들이에요.
그때 제가 너무 외로워서
그토록 친구가 고팠던가 봅니다.

트라우마라고 이름 붙이기도 웃기는 거지만
이젠 털어버리고 싶어요.
IP : 1.232.xxx.61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ㅁㅁ
    '23.5.2 3:20 PM (183.96.xxx.173) - 삭제된댓글

    저는 상상이상의 누구도 알지못하는 상처들이 많거든요
    그런데 그런생각을하죠
    그래
    그건 내 잘못이아니었어 ,라구요

    지난일은 강물밑으로 흘러가버리게 두란 말이있어요
    그건 님 잘못이아닙니다
    이제 지금을 사십시오

  • 2. ..
    '23.5.2 3:31 PM (118.235.xxx.132)

    저도 비슷하게 자란 시골 외딴집 외동딸
    그악스런 과잉보호와 무심한 방치 사이에서 자랐어요
    자식키우면서 부모를 더 싫어하고 이해불가하게됐어요
    어떤건지 너무이해가요
    넘 슬펐죠 저도 비슷한일이있어요

  • 3.
    '23.5.2 3:39 PM (118.235.xxx.132)

    애들 집에 못놀러오게하는거

    그땐 부모님집이니 내가 멋대로 친구불러오면
    나쁜짓이라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니 나도 가족구성원인데
    너무 빈번하지않으면
    부르고 오가는게 맞지
    뭐그리 인상쓰고 지롤을했나

    저 애둘 워킹맘
    엄마 애하나 전업

    심지어 우리집이 더 넓고 부자.

    이해불가입니다

    전 애가 친구데려오면

    애가 친구가있다! 너무행복한데

    그거 깨닫고나서 친정모와 거리감 확 느껴지더군요.

  • 4. 제가
    '23.5.2 3:56 PM (117.111.xxx.4)

    아이들을 엄격하게 키웠어요.
    TV 시청 시간도 제한하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이는 순종형이라 규칙을 잘 지켜 자랐고
    박사까지 마치고 세계적인 기업에 다녀요.
    그런데 어느날 잊혀지지 않는 일을 얘기하는데
    초등학교 저학년때 디지몬인가 만화가 엄청
    인기여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얘기하는데
    자신은 보지 못하니 낄 수가 없었답니다.
    그게 너무 보고싶었는데 못봤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나한테 말하지 왜 안했냐니까
    말해도 안보여 줄 것같아 말 안했다네요.
    저는 너무 미안하고 그때 친구들 얘기들으며
    얼마나 보고싶었을까 싶어 마음이 아프더군요.
    우리는 살면서 무지나 고집에서 비롯된 많은 일들이
    있죠. 인생이 완벽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죠.
    안그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아픔들이 사람을
    더 성숙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죠.
    엄마가 잘못했다고 말하니까 아이가 그냥 웃으며
    그런 일이 있었다구요 하는데 더 미안했네요.

  • 5. ㅇㅇ
    '23.5.2 4:00 PM (112.153.xxx.180)

    저도 친구 잘 못사귀고 어색해하는 성격인데 어쩌다 깉은 반 애들이 놀러오면
    엄마가 애들 있는데서 구박과 잔소리를.....
    일부러 간식해놓고 친구들 불러다 놀리지는 못할망정.
    애들도 불편해하고 가버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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