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Banner

나의 선생님, 나의 아이들!

고마워 조회수 : 3,096
작성일 : 2022-12-30 11:36:10

많이 길어요^^ 
이제는 사회인이 되어 독립해 나가 사는 아이들과 연말 핑계로 자주 연락하다보니 부쩍 어릴 때의 일들이 떠오릅니다 
20대초 애가 애를 낳아 ㅎㅎ 엄마가 된 저를 끊임없이 가르쳐주고 지금도 그러한 아이들 이야기를 정리하며 저 자신도 다시한번 돌아보려고 해요 



- 사람의 체온과 손끝의 촉감은 이리도 따뜻하고 부드럽구나
아이가 태어나고 어느 정도 큰 뒤 아기띠를 두르고 아기를 캥거루처럼 배에 붙이고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가 쉬려고 의자에 앉으면 솜털 보송한 따뜻한 정수리가 제 턱 밑에 닿고 아기의 통통한 볼이 제 앞가슴에 닿는데 그 따뜻함이 참 좋았어요 
아기는 제 목에 팔을 두르는 걸 좋아했는데 팔을 두른 뒤 손놀림 미숙한 별같은 두 손을 모아 뒷목에 대고 잼~잼~ 하듯 또닥또닥 꼭꼭 눌러줘요 
그러면 아무리 지친 날이라도 피로가 싹 가시고 희한하게 가슴에서 뭔가 차오르고 눈물이 고였죠 
아이가 알게해준 온기와 손짓은 어떤 난로나 담요, 최상급 맛사지사의 숙련된 기술로도 도달할 수 없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의 원형이 되어 제 안에 살아있어요 


- 남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아이가 유치원 다닐 때 숙제가 있었어요 
집에서 잡지나 신문, 광고지 등에서 빵, 물, 과일 등의 사진을 오려붙이고 글자를 써가는 것이었는데 다른 건 다 찾아서 붙였는데 그 흔한 물 사진만 없는거예요
찾다 찾다 제 눈에 띈 것이 보드카 광고 페이지였는데 술병 옆에 놓인 투명한 유리잔 사진이었어요 
술이 담긴 유리잔만 오려내면 물인지 술인지 모를테니 그걸 오려서 붙이자고 했죠 
아이가 보더니 “엄마 그거 술이잖아요 물 아닌데..”하더니 자기가 술인거 아는데 어떻게 거짓말로 숙제를 하냐고..
순간, 저는 부끄러워서 보드카는 눈으로만 봤을 뿐인데 이미 마신듯 얼굴에 열이 오르며 뻘개졌어요 ㅎㅎ
결국 아이는 술잔 사진 대신 연필로 물컵을 그려갔고 그 이후로 아이 앞에서는 작은 거짓말도 무서워서 못하는 엄마가 되었어요 


- 내가 한 약속이니까 지켜야지 
초등 2학년 때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교회에서 성가대를 했어요 
어느 날 성가대 선생님이 오셔서는 아이가 한달만 쉬고 오겠다는 말을 하고 가버렸다고.. 하다보니 지겨워서 그럴 수도 있으니 두고 보자고 하셨고 저도 하기 싫어졌나보다 생각했죠 
그렇게 잊고 있다가 어느날 선생님이 저를 보자마자 달려오시더니 “ㅇㅇ가 나타났어요! 정확히 한달만에!”라고 하셔서 뭔소린가 했더니 선생님도 잊고 있다가 아이가 나타나니 “ㅇㅇ이, 오랜만이네” 하셨는데 아이가 “제가 약속했잖아요 한달 있다가 다시 온다고~^^” 했다면서 애가 특이하다고 ㅎㅎ

고등 때, 취미지만 대충이 허용되지 않는 아마추어 경기팀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선발된 학생은 매일 3시간의 훈련과 경기 참여가 요구되고 1년 동안 팀의 일원으로 성실하게 참여한다는 각서 비슷한 걸 쓰고 들어갔죠 
그래도 학년이 학년인만큼 이미 공부나 다른 활동으로 스트레스가 큰데 운동까지 하다보니 힘들어하면서 성적이 흔들렸어요
걱정이 된 저는 원하는 대학에 가려면 네가 준비할 것들이 있는데 성적에 지장을 받으면 그만두는 것도 방법이라고 했다가 한소리 들었어요 
자기가 처음에 들어갈 때 1년 동안 중도포기 안하고 최선을 다한다고 약속했다고… 그런데 자기가 그만두면 팀은 영향을 받고 코치와 다른 팀원들과 한 약속 뿐 아니라 나 자신과의 약속도 깨는 거라고… 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죠
결국 다크서클 내려오는 얼굴로 버티면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
그런 아이 앞에서 저희 부부는 함부로 약속을 내걸지 못하고 약속을 하면 죽어도 지킬 수 밖에 없었어요 ㅎㅎ


- 적을 아는 것도 또하나의 무기다
아이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까칠해진다 싶더니 어느날 가족들을 불러모았어요 
학교에서 배웠는데 자기가 사춘기가 시작된 것 같다면서 가족들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들어보니 그때는 사람이 동물처럼 변한다면서 자기가 방에 문잠그고 들어가 있으면 동물 한마리가 방 안에 있나보다 생각하고 내버려 두라고, 자기가 어느 순간 이유없이 화내고 버럭하면 지금은 동물로 변했구나 하고 빨리 각자 방에 들어가 피하라고, 괜히 말시켰다가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 모르는 척 지나쳐 달라고 비장하게 얘기하더니 방으로 들어가버렸어요 
그래서 저희 부부와 작은 아이는 호르몬의 포로가 된 형을 도와주기 위해 한동안 몸사리고 때론 모른척 하다보니 어느새 지나갔네요 
오춘기, 갱년기를 최근에 지냈고 현재진행중이기도 한 저희 부부는 그때를 떠올리며 따라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효과가 있어요 ^^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전술을 가르쳐주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


-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다른 무언가를 내려놓아야 하나봐
아이가 키우던 애완용 앵무새가 있었어요 
요녀석은 사람을 좋아해서 날아다니는 시간보다 새장에서 나와 뒤뚱뒤뚱 걸어다니다가 가족들 다리 사이에 파고들어 부벼대거나, 쫑쫑 걷다가 휘리릭 날아서 어깨나 머리에 앉아 노래부르는 걸 좋아했죠 
아이도 새와 한몸이 되어 알지못하는 소리를 서로 주고받으며 즐겁게 지냈는데 아이가 먼 곳으로 대학을 가게 되면서 새를 보내야했어요
남은 가족이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서 아이는 수소문 끝에 맡아키워줄 믿을만한 좋은 곳을 찾았지만 중등때부터 함께한 친구라서 마음이 아팠나봐요
게다가 해외살던 때라 아이가 마지막 2년간 등하교 하며 몰던 차도 처분해야 했는데 팔고 오는 길에 아이가 한참을 뒤돌아서 보더라고요 
비록 싸구려 중고차지만 첫차이기도 했고 추억이 많은 차였죠 
그러면서 하는 말 “원하던 대학에 가게 된 건 너무 좋은데 내가 아끼던 새랑 차랑 빠이해야 하는건 슬프네. 그렇지만 보내줘야겠지…” 
아이도 저렇게 자기 마음 다독이고 정리하고 다음 목적지로 나아가는구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 또한 처음으로 아이를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 보내며 드는 아쉽고 안쓰러운 마음을 잘 정리할 수 있었어요 



처음 해보는 엄마 노릇이 쉽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줘서 함께 해나갈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해요 
가족이 있는 집도, 혼자인 집도 가족만큼이나 다들 얽혀서 살아가고 배우고 하니 그들만의 이야기가 많을거예요 
감사할 일들, 좋은 추억거리들은 한번쯤 정리해서 잘 쌓아두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도 있는데 한해의 끝, 밖에서 힘들었던 것들 다 털어버리고 소중히 아끼는 사람들과 따뜻하고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82쿡 덕분에 풍성하고 즐거웠던 22년이었고 감사드려요^^



IP : 59.6.xxx.68
10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헐...
    '22.12.30 11:47 AM (211.252.xxx.156)

    글을 너무 잘 쓰시네요. 잘 읽었고 고마워요. 일상의 작은 것들을 그냥 흘려보내면서 사는데 원글님은 그것들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또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시니... 이래서 82가 좋습니다.

  • 2. ㅇㅇ
    '22.12.30 12:26 PM (61.72.xxx.77)

    좋은 글이네요..

  • 3. ...
    '22.12.30 12:29 PM (119.69.xxx.167)

    작가가 쓴 글 같아요~!!!

  • 4. ...
    '22.12.30 2:10 PM (210.221.xxx.102)

    읽다가 왜 눈물이 나는걸까요?

  • 5. ..
    '22.12.31 12:05 AM (211.206.xxx.191)

    원글님 글 읽고 저 반성되네요.
    좋은 엄마세요.

  • 6.
    '22.12.31 2:21 PM (58.140.xxx.247)

    오,저한테도 도움이 돼는 글이에요
    님 글 좀 자주올려주세요

  • 7. 감사합니다
    '22.12.31 2:41 PM (210.178.xxx.242)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 8.
    '22.12.31 2:53 PM (59.16.xxx.46)

    좋은글이네요 글 감사합니다

  • 9. sage
    '22.12.31 3:17 PM (211.109.xxx.151)

    엄마가 읽어야 할
    동화책의 일부분 인것 같아요
    편안하고 따뜻한글 감사합니다.

  • 10. ..
    '22.12.31 3:25 PM (115.140.xxx.42)

    아이의 성장과정이 새록새록..
    아기띠하고 꽃도 보고 나무도 보며 혼자 떠들었던 포근한
    봄날이 생각나네요 감사합니다^^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1419312 중국요리단품중 뭐가 맛있나요? 25 ㅣㅣ 2022/12/30 2,961
1419311 단속카메라 설치후 바로 작동하나요? 3 완소윤 2022/12/30 852
1419310 전세계약 갱신권에 대해 여쭐게요 7 흠흠 2022/12/30 919
1419309 겨울엔 따뜻한 나라에서 살고 오는 사람들 있던가요. 12 .. 2022/12/30 3,254
1419308 인서울 로스쿨 가려면 학점이 4점대여야 하나요? 7 로스쿨 2022/12/30 3,695
1419307 남편에게 식세기 살까 물어봤더니 싫대요 그런데 7 ㅇㅇ 2022/12/30 3,491
1419306 시모 생각하면 골치가 10 ㅇㅇㅇ 2022/12/30 4,657
1419305 성판악 가까운곳 게스트 하우스가 어디일까요?? 3 제주게스트하.. 2022/12/30 652
1419304 유류분 청구 소송에서 나라가 가져가는 몫이 있나요 5 ㅇㅇ 2022/12/30 1,093
1419303 알뜰한건 가난한 경험 아니면 타고난성향때문인가요.??? 21 .... 2022/12/30 5,505
1419302 30대 아들 게임문제 34 ㅇㅇ 2022/12/30 5,051
1419301 마이크에 잡힌 "건방진 X".. '쿨하게' 사.. 4 부러워서눈물.. 2022/12/30 3,446
1419300 1만원대~2만원대선물 추천해주세요^^ 4 선물 2022/12/30 1,113
1419299 간식추천 병아리콩 볶음 6 ........ 2022/12/30 2,351
1419298 내년에 주식 어찌될까요? 10 에효 2022/12/30 3,039
1419297 대국민 협박 "전쟁" 20 생지옥 2022/12/30 2,880
1419296 아이가 도마뱀을 사왔는데 ~ 11 질문 2022/12/30 2,143
1419295 정신과약 두통이요 2 ㅇㅇ 2022/12/30 830
1419294 "남자는 많이 배울수록 뚱뚱, 여자는 많이 배울수록 날.. 33 아직도이러나.. 2022/12/30 8,805
1419293 세시 반인데 일거리 주면서 5 ㅇㅇ 2022/12/30 2,494
1419292 미국냄새 10 킁킁 2022/12/30 3,587
1419291 뉴스공장 막방, 6시간만에 조회수 50만회 넘어 15 단6시간 2022/12/30 2,068
1419290 에어프라이어 상하열선 vs 상부열선 어느 거 살까요? 4 질문있어요 2022/12/30 2,125
1419289 패딩 몇개나 있으세요? 5 패딩입자 2022/12/30 2,376
1419288 몸무게때문에 돌겠어요 전대체왜이러죠?? 20 이유가모냐고.. 2022/12/30 5,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