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공동대표, 전 춘추관장(김대중 정부)가 쓰신 한덕수 불가론입니다.
세차례에 걸쳐 쓰셨네요.
1편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013358445444853&id=10000312240400...2편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023226527791378&id=10000312240400...3편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032894703491227&id=10000312240400...3편에 한덕수의 8할은 부인 부인 최아영(74세)가 키웠다며 언론계의 유명한 치맛바람을 일으켰는데 명리학에 밝고 남편 출세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바람잡는데도 일가견이 있다는 글을 보니 윤당선자와 전화소녀가 좋아할만 하겠네요.
[한덕수론(論). 불가론(不可論)] 1편
2022.03.30.
<고향을 숨기고 부인하고/5명 대통령 밑에서 온갖 영화 누린/자신을 국무총리에 발탁한 노무현대통령을 배신,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MB 박근혜와 손잡고 등달(騰達)을 계속한 그가 또 총리?ᆢ>
-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棒)'의 심정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As good As It Gets).
1997년 제작되어 1998년
아카데미상 남녀주연상을 휩쓸었던 전형적인 로코(로맨스 코미디) 명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번역된 제목이 원제(原題)를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
1998년 국내 개봉에서도 당시로는 성공적인 50만 명 관객을 불러온 데는 제목의 힘도 컸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분)의 마지막 대사 <Tomorrow is another day>를 "내일은 또 다른 날"이라고 번역했으면 별 감동이 없었을 것이다. 이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기막히게 번역해 놓으니, '역사적 명대사'가 되고,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덕수(韓悳洙.73). 이 분의 이력서를 펼쳐놓으면, 딱 그 말이 떠오른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 누구도 이보다 화려할 수는 결코 없다.
그렇다. 그가 5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일했던 열거하기도 힘들만큼의 최고위 관직을 적다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할 놀라움과 함께 "뭐 이런 '변신술의 귀재'가 다 있어!"라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더욱이 그는 과거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영남 출신도 아니다. 고향이 전북 전주다. 거듭 놀랄 수밖에 없다.
경기고, 서울상대 경제학과, 하버드대 경제학 석박사. 8회 행시(行試) 최연소(21) 합격, 서울상대 수석 졸업.
경제기획원, 상공부에서 이력을 쌓은 후 1996년 말 김영삼 정부 특허청장으로 고위관료를 시작했다.
이어 통상산업부 차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상 김대중 정부).
산업연구원장, 총리실 국무조정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국무총리 권한대행,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체결 지원위원장, 38대 국무총리(이상 노무현 정부).
주미 대사(이명박 정부). 한국무역협회 회장, 기후변화센터 이사장(박근혜 정부). 5명의 대통령과 함께 쉼없이 최고위직에서 일했다. 그러고도 지금 73세다. 고속출세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문재인 정부에서만 기용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통 관료 중에서 한덕수만큼 국록(國祿)을 길고 굵게 먹은 사람은 없다. 관세청 사무관으로 시작해 이내 경제기획원(EPB) 으로 옮겼고, 다시 상공부로 가 꽃을 피우기 시작해 2017년 '기후변화센터 이사장'으로 공직을 마칠 때까지 47년간 국록을 받았다. 박정희부터 박근혜까지다.
사무관으로 시작해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특히 주로 상공부에서 일한 경력으로 OECD 대사와 주미 대사라는 영광까지 안았다. 그저 경탄할 뿐이다.
그런데, 왜일까? 한덕수를 생각하면 무슨 영문인지 일제강점기의 대문장가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선생의 <가명인 두상 일봉>(假明人 頭上 一棒)이라는 통쾌한 명문장이 떠오른다.
이 논설은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한 달 후에 실렸는데, 결국 박영효 초대 사장의 퇴임을 불러왔다.
이 논설에서 권덕규 선생은 "아, 슬프고 원통하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오호통재"(嗚呼痛哉)라고 써야 직성이 풀리는 일부 주자학파 유학자들을 '지나(차이나) 사상의 노예'라고 통박했다.
그러면서 한족(중국)문화를 빛내는데 몰두하는 저들을 '가짜 명나라 사람들'이라고 부른 뒤 "그들의 머리에 몽둥이를 한 방"이라고 저격했다.
명나라에 기울어진 일부 유학자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아 주체적인 학문을 하라고 꾸짖는 격문(檄文)이었다.
한덕수와 인연이 많다. 고향(전주)이 같고, 동아일보 기자시절 내내 취재원으로 만났으며, 김대중 대통령님 시절에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춘추관장'으로 같이 일했다. 노무현 대통령님 시절, 그가 국무총리에 오르자 초대 게임위원장이었던 필자는 크게 축하했다.
이제부터 인간 한덕수를 말해주는 몇가지 추억을 소환해보려 한다. 우선 전제가 있다. 필자는 그의 실력과 능력에 대해서는 이의(異議)가 없다. 슬하에 자녀도 없이 "일이 취미"라고 할만큼 일중독인 것도 좋게 본다.
다만 지금부터 쓰는 몇 장면은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 시대 최고의 관료 한덕수의 인.간성, 됨됨이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 견해와 분석이다. 이 점 고려해주기 바란다. 좀 비판적일 것이다. 사람 됨됨이에 대한 평가처럼 어려운 일도 드물다.
* 장면 1.
1995년 일이다. 초대 민선 전북지사로 29, 30대 전북지사인 유종근 박사(전 아태재단 사무총장)는 취임 이후 '전북경제 살리기'를 강조했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절실했다.
중앙부처 요직에 전북 출신이 누가 있는지 찾아보던 중 상공부 국장 한덕수를 발견했다. 즉시 한 국장을 방문, "전북경제가 많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들었다. "나는 전북 출신 아니니 앞으로 절대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에 럿거스대 교수를 했고, 한덕수보다 5살 많은 유 전 지사가 일생 이 냉대와 수모를 잊을 수 있을까?
* 장면 2.
1996년 12월 그가 특허청장에 임명됐다. YS 정권 말기였고, 호남 출신 장차관이 아주 적었던 때였다.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전북 출신 기자들이 그의 출신지를 '전북'으로 썼다(동아일보는 '군산'으로 썼음). 그러자 그는 해당 언론사에 일일히 연락해 자신의 본적이 '서울'임을 밝혔다.(그는 6남 3녀 중 5남이기 때문에 결혼해 분가하면 본적이 바뀜).
이렇게 되면 언론사는 다음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한덕수 인사카드의 '본적'란을 '서울'로 정정해 놓는다.
그가 특허청장에 가기 전 상공부 마지막 보직이 통상무역실장이었다. 고향이 어딘지 뻔히 아는 기자들이 넌저시 '전주'를 언급해도 그는 눈하나 꿈쩍 않고 아니라고 부인했다. 답을 안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주가 고향임을 부인했다.
* 장면 3.
김대중 정부 출발점이던 1998년 3월 그는 통상산업부 차관에서 일약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언론사는 1년 여 전의 경험이 있어 그의 본적을 '서울'로 썼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본부장이 각 언론사에 팩스를 보냈다. <전주가 고향이며, 초등학교 일부도 전주에서 다닌 전북 출신>이라는 요지였다. 김대중 정부이니 호남 출신임을 밝히는 것이라 이해하고 싶어도, 그 팩스를 보는 순간 동향 후배로서 참담한 심정이 됐다. '가명인'(假明人)이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를 보는 전북 출신 기자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 장면 4.
2002년 6월2일. 한일 공동주최 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 폴란드 전이 부산에서 열렸다. 대통령님 부부, 청와대 비서진, 출입기자 등 약 80명의 대부대가 내려갔다. 2대 0. 월드컵 역사상 한국이 첫 승리를 거두었다(사진 참조).
숙소인 인터불고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감동 그 자체였다. 시민들은 "대한민국", "김대중"을 연호했다. 대통령님은 1호차를 애워싸는 시민들과 악수하고 포옹하기 위해 수십번을 연도에 내리셨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울음이 났다. 사실 집권 직후부터 '동진(東進)정책'을 추진하며 '동서(東西)화합'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왔지만 대구, 부산을 갈 때마다 대통령님에 대한 시민들의 냉대 때문에 참모진은 좌불안석이었다.
집권 초 대통령님이
대구를 방문했을 때, TK 세력은 신현확(전 총리), 김준성(전 경제부총리)을 내세워 수뢰죄로 수감중이던 김만제 전 포철(浦鐵)
회장(전 경제부총리) 석방과 섬유산업 대폭 지원 등을 요청했다.다 들어주었다. 김만제를 풀어주었고, '밀라노 프로젝트'라고 명명해 대구 섬유산업을 적극 지원했다. 대통령님 유럽 순방 때 문희갑 대구시장이 수행해 밀라노를 같이 방문토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 뿐. 대구, 부산 민심은 집권 말기에 이를 때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판에 부산에서 연도 시민들의 "대한민국" "김대중" 연호를 들으니 대통령님이 상기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시민들이 갑자기 대통령님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2202년 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에서 거둔 월드컵 사상 첫 승리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던 얼음을 녹여버린 터였다.
숙소로 돌아오신 대통령님은 청와대 출입기자를 관장하는 춘추관장인 필자를 불러 "오늘 저녁에 출입기자단, 청와대 비서진 모두 맘놓고 한번 마셔라"라며 "비용은 경제수석에게 말해놨다"고 하셨다. 경제수석은 바로 한덕수였다.
잠시 후 경제수석 방에 갔다. 익히 아는 사이이고, 대통령님 말씀이 있었다 하니 그냥 좀 서있었다. 한 수석은 봉투 하나를 건냈다. 세어보니 200만원이었다. 아니? 100명 가까운 인원에, 대통령님이 맘놓고 마시라고 했는데,
200만원?ᆢ
필자는 봉투를 책상 위에 그대로 놔두고 나오면서 한마디 했다. "늘공은 영혼이 없다더니. 수석님이나 잘 드세요. 기자단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 뒤 여러번 봤지만 봉투사건에 관해서는 말한번 섞지 않았다.
* 장면 5.
한덕수는 노무현 정부에서 최전성기를 맞는다. 첫번 째로 2003년 3월 산업연구원장을 맡더니 1년 만에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에 임명됐다. 또 1년 후에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되었고, 2006년 3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3.1절 골프사건'으로 퇴임하자 '총리 권한대행'을 맡았다. 벼슬복은 타고났다.
그는 2006년 8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지원위원장으로 한숨 고르는가 싶더니, 2007년 4월 드디어 제 38대 국무총리에 오른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였다.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그를 보며 "도대체 어떤 점이 특별히 뛰어나서 그렇게 까다로운 DJ, 노무현 대통령님으로부터 저렇게 신임을 받을까" 하는 경탄과 의구심이 오갔다.
* 장면 6.
필자가 한덕수의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다>고 하는 이력에서 가장 놀라는 순간이 이것이다. 2009년 2월, 외교 경험이라면 2000년 12월부터 1년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가 전부인 그를 MB가 주미 대사에 기용한 것이다.
미국정치에 'ABC'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클린턴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아들 부시는 클린턴이 했던 정책은 다 폐기하고 무조건 거꾸로 갔다. 그래서 <클린턴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좋다>라는 뜻의 'ABC'(Anything But Clinton)가 유행했다. 후임자가 전임자의 그림자를 지우려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특히 MB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는 결 자체가 완전히 다른 보수우익 정권이었다. 그래서 'ABN(Anything But Noh) 정책'으로 가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MB는 TV 드라마에서 자신을 연기했던 배우 유인촌에게 문화부장관을 맡겼고, 그는 전 정권의 요직들을 몰아내는 칼잡이 역을 조자룡 헌칼 쓰듯 수행했다. 그야말로 우악스럽게 주요 기관장들을 쫓아냈다.
정연주 KBS 사장, 황지우 한예종 총장(장관급), 김정헌 문화예술위원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이 유인촌의 협박, 공갈, 유치한 감사(監査)에 몰려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옷을 벗었다. 당시 초대 게임위원장(차관급)으로 봉직하던 필자도 예산 배정을 안해주는 등 '고사(枯死)작전'까지 동원하는 유인촌과 싸우다 임기를 남기고 강제 퇴임해야 했다.
심지어 MB 정부는 장차관, 공기업 대표, 언론사 임원, 대사 출신 등에게 주어지는 '정부 초빙교수'까지도 철저히 통제, 관리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낸 J, K씨 등이 정부 초빙교수에 응모했다 탈락하자 그 뒤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차관 이상을 했던 분들은 아예 정부 초빙교수 응모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덕수는 누가 봐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 가장 영달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MB의 눈을 사로잡고 그것도 주미 대사라는 요직을 거머쥘 수 있었을까?
둘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뭔가 신출귀몰(神出鬼沒)한 비법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노무현이라면 이를 갈던 MB가 어떤 경로로 한덕수를 알게 되고, 정통 외교관도 아닌 그에게 주미 대사를 줄 수 있었을까? 훗날 MB가 회고록을 쓰면 언급하겠지만, 경탄하고 놀랄만한 생존능력, 변신력이다.
* 장면 7.
2009년 5월23일 노무현 대통령님이 돌연 목숨을 끊었다.
수많은 얘깃거리가 나돌았다. 그러나 당시 필자의 관심을 끈 건 따로 있었다. 주미 대사에 부임한 지 석달인 한덕수가 장례식에 나타나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오리라는 데 걸었다.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요직을 여섯번이나 맡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총리였다. 23일 서거 후 29일 국민장이 끝날 때까지 한덕수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사를 두 차례 한 친구에게 물었다. "주미 대사 취임 후 석달인지라 자리 뜨기가 어려운 거냐"?
답은"NO"였다. 본인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녀갈 수 있으며, 고 노대통령님의 마지막 총리였기 때문에 아무리 MB 정부였다고 해도 건의하면 주미 한국대사의 문상 참여는 100%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얼음덩이처럼 냉정, 냉혹해야 온갖 정권을 이어가며 실력발휘를 할 수 있나보다. '연작 안지 홍곡지지'(燕雀安知 鴻鵠之志)리요.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큰 뜻을 알리요!"
* 장면 8.
만 3년의 주미 대사를 마치고 돌아온 한덕수는 며칠 쉬지도 않고 2012년 2월 한국무역협회장에 취임한다.
무역협회장은 무역인들을 대표하는 자리이지만, 역대 정권에서 한결같이 정부가 OK 사인을 줘야 회장이 결정되는 구조였다. 한덕수 회장 앞의 무역협회장이 사공일(전 재경부장관), 이희범 (전 산자부장관)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MB정권 말기에 무역협회장에 취임한 그는 2013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로도 끄덕없이 임기 3년을 다 채운 뒤 2015년 2월 퇴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은 2015년 12월 한덕수에게 제 3대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자리를 준다.
2년을 더 봉직하고 그는 화려찬란했던 공직에 마침표를 찍는다.
* 장면 9.
시간이 훌쩍 흘러 2022년 3월말. 인수위가 총리 인선작업에 들어갔음을 밝힌 가운데, 언론에서는 유력 총리 후보를 연일 소개한다. 그런데, 엇! 한덕수라는 이름이 선두에 나선다. 아니 그가 또 거명된다고? 이제 아예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든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미 착실하게 정지(整地)작업을 해왔다. 최근 그가 언론 회견 등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대통령 당선자에게 "나 여기 있소"라고 자신의 '존재이유'(Raison d'être)를 밝히는 '손짓"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대통령은 포퓰리즘 정책을 최대한 억제하도록 국민과 정치권을 설득하는 임무를 가진 '최후의 보루'이다. 표를 얻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정책들이 선거기간 쏟아져 나온 만큼 이 문제를 잘 정리하는게 필요하다>.
<언론을 통해 포퓰리즘 문제 해결 등 당선인에게 바라는 점을 밝힌 것은 전체적인 나의 생각이다. 한국경제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려면 재정상황을 고려하는 지속가능한 정책을 펼쳐가야 한다>.
<불러주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공부해왔다. 건강에는 문제 없다>.
이 정도면 '출사표'(出師表) 아닌가? 총리 지명자의 정책기조 설명같기도 하다. 영어 단어에 'beckon'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를 향해 손짓한다'는 뜻이다. 천하의 한덕수는 지금 당선자를 향해 beckon하고 있다.
과연 한덕수의 이 "자신만만한 손짓하기'가 또 통하면서 해방 후 다섯 번째(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에 이어)로 총리 2관왕이 탄생할 것인가?
한덕수는 전주초등을 다니다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서울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테크노크랏이지만 친화력이 좋다거나, 지인이 많다거나, 통이 크거나 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기자들에게 좀 알려진 그의 가까운 지인 중 H씨(81)가 있다. 나이는 한덕수보다 8살 많지만 행시 7회로 1기 차이이며, 고향이 같이 전북이다.
1970년(21살)에 행시에 붙은(8회) 한덕수는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1979년 경제기획원 사무관(남덕우 부총리 수행비서)으로 갔을 때 고향선배 H씨는 같은 EPB에 법무과장으로 있었다.
둘은 몇해 후인 1982년 서석준 상공부장관(1983년 버마 아웅산 테러로 사망)이 "상공부를 혁신하겠다"며 인재를 불러모을 때 같이 상공부에 발탁됐다. 이어 관료로서 성장해간 둘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한덕수였다.
김대중 정부 때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을 한덕수가 맡았고, 그 후임을 선배인 H씨가 어어받으면서 두 고향 선후배의 사귐은 좀 더 깊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H씨의 주목할 증언을 보자. 1979년 EPB에서 처음 만난 후 40년 이상을 사귀었는데, 한덕수 입에서 고향, 전주에 관한 얘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말을 안꺼내니 묻기도 그래서 동향끼리 전주 얘기 한번 섞지 않고 지내왔다나! 참으로 지독하지 않은가?
한덕수 일가가 서울로 이사할 때 실은 부모가 하던 사업이 망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회사의 비서실장이 돈을 횡령하고 일가족을 배신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가가 그 뒤로 고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간접적 이유로 유추해 볼 수는 있겠다.
한덕수 위에 형이 셋 있는데, 포스코 임원까지 한 열살 터울의 큰 형은 필자의 전주북중 선배이다. 전주 뿌리는 이처럼 확실하다. 그의 부친의 원 고향은 전북 부안으로 알려져 있다.
H씨는 지금 하반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부인을 잃었다. 한때 그리 막역했으며, 통상교섭본부장 자리를 주고받았던
고향 선후배는 지금 교유(交遊)가 없다. H씨의 근황을 한덕수가 모를리 없지만 그는 국가 대사(大事)나 걱정하지 그런 사사로운 일에 신경쓸 소인배가 아니다.
그가 다시 총리에 오르면 한국 관료 중 처음으로 박정희 때 사무관으로 시작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를 거쳐
尹 정부에 이르기까지 국록을 받는 유일무이하고, 앞으로도 나올 수 없는 대기록자가 될 것이다.
그는 이미 나라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심지어는 하버드대 석박사도 경제기획원 사무관, 상공부 과장 신분을 유지한 채 휴직을 이용해 따냈다.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웬지 참 씁쓸하다. 유일하게 문재인 정부에서만 벼슬 못한 것을 尹당선자 측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한 건가?
카멜레온(Chameleon)은 나무 위에서 순식간에 체색(體色) 변화를 잘 하기로 유명한 도마뱀류이다. '시대의 카멜레온'을 연상케 하는 초고위 관료가 마지막 용틀임을 하고 있다. 尹 당선자가 그리 강조하는 '공정과 상식'에 맞는 인사(人事)일까? 엔딩(ending)이 궁금해진다.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정치부차장, 노조위원장. 청와대 춘추관장(김대중 정부). 국회의장 공보수석, 초대 게임위원장(노무현정부). 한국방송광진흥공사 사장(문재인 정부) 씀.
너무 길어서 2편은 링크로 보세요. 3편
[한덕수 총리 불가론(不可論), 제 3편. '후보 자진사퇴'가 정답이다].
"올 것이 왔다".
5일 도하 언론이 '한덕수 지명자가 김&장 로펌에서 4년 여간 18억원을 받았다'는 기사를 대서특필 하는 걸 보고 제가 지른 비명이었습니다.
한 지명자가 '광화문 플래티넘 빌딩'(종로구 새문안로 5가길 28)에 2017년 말부터 매일 출근하는 사실을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사무실 호수까지 정확히 알고 있지요.
김&장 건이 밝혀지자 김은혜, 배현진 인수위 전, 현 대변인은 "일부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면서도 "그는 난국을 타개할 적임자"라거나 "연륜과 지혜로 국정을 새롭게 이끌 총리책임자"라며 사과 한 마디 없이 견강부회(牽强附會)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그렇게 우스워 보입니까?
후보도, 당선자도 다를 바 없습니다. 뭐가 문제냐는 식입니다. 한 후보자는 "연간 5억원의 고액 연봉을 두고 논란이 있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건 기자님 생각"이라거나 "청문회 자료를 내면 국회에서 논의하고 기자들이 판단하면 될 일"이라고 시큰둥하게 답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걸 왜 나한테 묻느냐"는 오만한 답을 하기도 했다
지요.
국민감정이 어떠한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 방자한 태도. 당선자 또한 5일 기자들에게 "잘 판단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서도 소통 의지나 노력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염치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게 정말 그렇게 간단한 사안일까요?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법률가가 아닌 한덕수 후보자가 로펌에서 어떤 역할을 했겠는가. 국가의 경제, 무역을 총괄했던 공직자가 김&장에서 국가이익을 위해 복무했겠는가"라고 반문하며 "尹 당선자가 강조해온 공정, 상식에 반하는 인사"라고 규정했습니다.
서복경 더가능연구소 대표는 "한 후보자가 고액 고문료에 상응하는 대정부 업무를 했을 텐데, 전 부처를 관장할 국무총리를 하게 되면 그간 로펌에서 했던 활동과 이해충돌 소지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곧 뚝이 무너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엄중한 상황입니다. 그런데다 초기 대응을 엉망진창으로 해놓는 바람에 이제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을 수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대희 전 대법관(67)은 2014년 5월 정홍 원 총리(42대) 후임으로 지명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 시절 16억원의 수임료를 받은 사실 때문에 '전관예우 논란'이 일면서 6일 만에 자진 사퇴했습니다.
정동기 전 법무차관은 2010년 12월 감사원장에 내정되었으나 법무법인 바른에 근무할 때 7개월간 7억원을 받은 사실이 '전관예우'로 불거지면서 역시 스스로 물러났지요.
2015년 6월 44
대 총리에 지명된 황교안(65)은 검사 퇴직 후 변호사로 16억원을 번 것이 문제가 됐습니다. 그는 "수임료를 기부하겠다"고 수습하고 나서야 겨우 사상 최저 동의율로 인준되었습니다.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尹 당선자와 국힘당은 지도자의 도덕성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경륜 갖춘 책임자'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흑묘백묘(黑猫白描)론'을 펼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향 속이고, 주인도 배신하고, 거기에 기회주의적으로 돈까지 따복따복 챙기는 '속이 시커먼 고양이'는 안되겠다는 주장입니다. 국민 대다수 시민, 서민은 18억원에 대해 대체 어떤 감정을 갖고 있으리라고 봅니까? 일만 잘 하면 된다고요? 박정희 시대부터 관료로 일한 70대 중반 어르신에게 경제에 신바람을 일으켜줄 에너지와 참신함을 기대하는 국민이 많으리라고 보나요?
특히 '실용주의'를 매우 좋아하는 분들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지도자에게 능력보다 도덕성이 훨씬 중요한 덕목(德目)임을 논어(論語)를 빌려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2. ['파렴치'(破廉恥)한 지도자는 안된다. 도덕성이 능력보다 중요!]
자공(子貢)이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선비라고 할 수 있습니까?"(何如斯可謂之士矣).
"행동함에 부끄러움을 알고, 사방에 외교사절로 가서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선비라 할 수 있다"(行己有恥 使於四方 不辱君命 可謂士矣).
"그럼 오늘의 정치를 맡고있는 자들은 어떤지요?"(今之從政者何如).
"아, "한말'들이 기량(器量)밖에 안되는 사람들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斗宵之人何足算也).
그렇습니다. 대저 선비는 '염치 없으면'(shameless) 안된다는 겁니다. 역대 총리 43명 중에서 명예직이 아닌 정식 하위직을 맡은 경우는 한덕수가 유일합니다(장관급인 주미대사와 경제단체인 무역협회장 직무) .
총리를 끝내고는 대권에 도전하지 않으면 은퇴합니다. 총리 이후 주미대사, 무협(貿協) 회장 이런 식으로 자리를 계속하는 사람은 아예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역대 총리 중 총리를 두 차례 한 경우는 장면, 백두진, 김종필, 고건 넷입니다. 장면은 퇴임 후 종교생활에 전념했고, 백두진은 퇴임 후 국토통일원 고문을 했을 뿐입니다. JP조차 퇴임 후 "서산을 붉게 물들이겠다"며 국내 첫 10선 의원을 노렸으나 실패하자 조용히 은퇴했습니다.
66세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두번 째 총리를 퇴임한 고건도 2009년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명예직)을 맡았을 뿐입니다.
국회의장은 퇴임하면 국회의원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정계 은퇴가 관행이죠. 총리도 그만두면 하위직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황새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뱁새들 틈에 끼지 않는 법입니다. 왜 혼자 그리 특이한 거죠? 말도 안되지만 주미대사, 무협 회장까지는 봐준다 칩시다. 총리까지 한 분이 김&장에 가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아야 할 만큼 생활이 곤궁했습니까?
2017년 공직재산 신고를 보니 예금이 25억원이고, 최근 재산총액은 80억원 대라고 들었습니다. 돈이 궁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박기후인'(薄己厚人. 나에겐 박하게, 남에겐 후하게) 해야지 후기박인(厚己薄人)하면 큰 선비라 할 수 없습니다. 한덕수는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총리까지 한 선비치고는 면목과 염치가 너무 없는 한낱 '관직의 포로'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부끄러움과 지족(知足)을 알아야 어른입니다. 어찌 또 재상(宰相)을 또 탐하십니까.
총리교섭을 받았다고 73세에 덥석 받다니요. 이번에 총리가 되면 만 73세 9개월이었던 현승종 총리(24대)에 이어 두번 째 고령 총리입니다.
'안분지족'(安分之足)은 아예 생각해본 적도 없으신가요?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아니함과 같다)은 삶의 기본 이치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1970년, 21살의 청운(靑雲)에 관세청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52년인데, '관직욕의 폭주기관차'는 그리 멈춰지지 않습디까? 궁금합니다.
3. [장관, 총리의 피난처 김&장을 이대로 두어야 하나?]
유일하게 경제 3부처 장관(경제기획원, 재무부, 상공부)과 심지어는 부총리 겸 통일부장관까지 했던 나웅배(羅雄培)님은 제게 경제 3부처 장관의 차이를 영어 단어로 설명해준 바 있습니다. 그럴듯 합니다.
경제기획원 장관은 graceful(우아하다), 재무부장관은 powerful(힘이 있다), 상공부장관은 colorful(화려하다).
제가 한덕수의 관료 이력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할만큼 화려함의 극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관료 뿐만 아니고 종합 분야로 눈을 넓히면 화려함에 있어서 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도 비슷한 한승수(韓昇洙.86)입니다.
한덕수가 모노컬러(단일색)라면, 한승수는 멀티컬러(복합색)입니다. 그는 경제학자, 정치인, 경제관료, 외교관입니다. 연세대 출신 최최의 서울대 상대 교수요, 한덕수 다음의 국무총리(40대), 재정경제부 장관, 3선 국회의원, 주미대사와 유엔총회 의장, 외교통상부 장관.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물론 그에게는 굴욕의 기록도 있습니다. 1980년 전두환의 "국보위 입법위원'을 했고, 민정당 국회의원도 했으니까요.
하여튼 화려함에서는 한덕수도 족탈불급입니다. 그가 한덕수와 다른 점은 2009년 9월 총리를 끝내고는 다른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지금도 현역입니다. 유한재단 이사장이고, 시그니스 세계총회 조직위원장입니다. 모두 명예직입니다. 시그니스 총회는 카톨릭 언론인과 커뮤니케이터들이 오는 8월 서울에 모여 총회를 하는 교황청 공인 행사입니다.
이 두 분이 기막히게 똑같은 점이 하나 있습니다. 관직이든 다른 공직이든 하다가 쉬게 되면, 그 기간이 길든 짧든 김&장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예외 없이 100%입니다.
한승수가 심해서 2004, 2009, 2013년 세 번을 김&장에 의탁합니다. 한덕수도 DJ 경제수석을 하다 중국과의 마늘협상이 문제가 돼 물러나고 다음 해 산업연구원장으로 갈 때까지의 8개월간 김&장 고문이 됩니다. 이 때 8개월간 1억 5천만원을 받았고, 외환은행을 인수한 론스타그룹을 도와주었느냐 아니냐로 시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그 이유는 뒤에 나옵니다) 문재인 정부 내내 기용이 안될 동안 지난달 말까지 4년 여를 한덕수는 김&장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겁니다.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한승수는 좀 더 심했지요. 국무총리를 그만둔 게 정확히 2009년 9월 28일인데, 잉크도 마르기 전인 10월1일부터 김&장으로 출근했습니다. 해도 너무했지요? 명색 총리까지 한 사람의 처신이 면서기보다 못하디는 생각에 혀를 차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박근혜 정권 때 4년 3개월의 최장수 외무장관인 윤병세(별명 오병세)는 박근혜 당선자 인수위에 참여하기 전까지 김&장 고문이었고, 장관을 그만두자 마자 김&장 고문으로 복귀했습니다.
17대 국회의원이며 2008년 '법률사무소 김앤장'을 출간한 임종인 변호사는 "김앤장은 엄청난 권력 그 자체"라며 "김앤장의 힘에 깜짝 놀랐다"고 밝혔습니다. 공직자 출신들의 로펌 참여를 제한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그는 "론스타의 외환은행 매입은 전적으로 김&장 고문들 작품"이라고 강조합니다.
전직 총리, 장관들이 고액 연봉을 보고 대형 로펌으로 갑니다. 특히 민원 소지가 많은 금융감독원, 공정거래위, 감사원, 국세청, 식약청 간부들이 환영받습니다. 국민의 혈세로 키워낸 인재들이 로비스트가 되어가는 김&장의 오늘을 이대로 방치해도 좋은지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더욱이 한덕수가 그대로 총리가 되면 김&장과 정부 요직의 회전문 인사가 또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저는 국가적 치욕이요, '허가받은 부패행위"라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태범 방통대 교수는 "김&장이 '전관 저수지'가 된 상황"이라며 "민간에서 공직으로 갈 때 이해충돌을 해소하기 위해 주식 백지신탁을 하는 것처럼 '회전문 인사'를 막을 제도를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4. [한덕수의 8할은 아내 최아영이 키웠다?]
한덕수 뒤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부인 최아영(74)의 로비력이 유난히 많이 회자(膾炙)됩니다.
그리고 이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을 의심합니다. 최 여사는 장안에서, 특히 언론계에서 꽤 유명한 치맛바람입니다. 일찍이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의 8할은 바람"이라고 했는데, 이를 빗대어 "한덕수를 키운 8할의 힘은 최씨"라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녀가 대기업 오너급을 비롯해 잘 나가는 여성계 원로 인사들을 이끌고 다니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했던 C씨는 최근 자신의 SNS에 이렇게 썼습니다.
<국장 시절 최씨 그룹에게 초대되어 두어 차례 호텔 등 비싼 음식점에서 밥 먹으며 담소한 일이 있다. 단아한 체구의 그녀는 조용조용하게 말하는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명리학에 밝고 남편 출세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바람잡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는 말도 나중에 들었다>.
尹 당선자의 대학 선배인 C씨는 이어 尹당선자에게 이런 고언을 합니다.
<박정희 때인 1970년 사무관으로 출발해 52년이 지난 '흘러간 물'로 뭘 하겠다는 건가?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는 것쯤은 알 거라고 본다.
재고하기를 당부한다. 첫 단추에 해당하는 총리 후보자 인사에 실패하면 끝장이다.
'윤당'은 사주에 물(水)이 많아 마음이 자상한 편이라 사람 쓰는 데 잼병일 수 있다고 한다.
명리니 사주니 크게 신봉할 건 아니지만 미신이니 하며 역병이나 보듯 할 이유도 없다.
인재의 품평을 깊고 넓게 찾아서 들어보고, 운동장도 왼쪽 오른쪽을 가리지 말고 넓게 쓰길 바란다>.
필자는 제발 사실이 아니기를 빕니다. 그러나 이미 이걸 알고 파고드는 취재진이 있고, 대강의 그림도 거의 그려지고 있습니다. 한덕수가 어떻게 정권의 결도 완전히 다르고, 김대중 노무현 사람들을 도륙(屠戮)하려던 시절에
'배신자'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MB의 부름을 받아 주미대사로 갔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한 지명자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답해야 할 것입니다. MB가 감옥에 있어 취재진이 MB 얘기를 들어보고자 하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MB가 구태여 한덕수를 보호해 줄 이유도 없을 거고요.
의혹은 간단합니다. 최여사가 MB가 장로로 사역했던 소망교회(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K 목사를 통해 남편을 MB와 연결했다는 소문의 진실 여부만 밝히면 됩니다.
한덕수의 경기중고 동기동창으로 절친인 유명인사 L씨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한덕수는 물론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다. 좋게 보면 일벌레이고 자기관리도 철저하다. 그러나 실력 있다고 세상 일이 다 되는가? 최여사가 거의 다 만들어 주었다. '똑똑한 기술자'인 그를 최씨가 각본 쓰고 연출해서 한 작품으로 만들어낸 게 한덕수라고 보면 된다>.
최 여사의 놀라운 로비력이 총리 지명 과정에서도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에 대해 필자는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그저 이런저런 그림을 추상화처럼 그려보고 있을 뿐입니다. 웬지 추리가 틀릴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긴 합니다. 기자 시작한지 41년인데, 어렵고 꽉 막힐 때는 상식으로 판단하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體得)했기 때문입니다.
5. [그 유능한 한덕수를 문재인은 왜 내쳤나?]
'한덕수 총리 불가론' 1, 2편을 쓰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저리 유능한 한덕수를 문재인 정부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느냐고?ㆍ
필자는 그냥 "모른다"고 말합니다만, 도저히 답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에게는 "문재인 저 '운명'을 읽어보면 안다"고 답해줍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자가 언론특보로(2012 대선), 대변인 겸 언론멘토단장으로(2015 당권도전), 언론멘토로(2017 대선) 가까이 모셨던 현직 대통령께서 한덕수를 거들떠보지 않는 이유를 어떻게 추측해서 함부로 말한단 말입니까?
다행히도 2011년 펴낸 이 책의 368-373 쪽을 읽어보면 답이 상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를 요약합니다.
<2007년 3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과 통화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 국내상황을 정확히 알린 뒤, 노대통령은 관련 장관과 참모들에게도 당신의 의지와 전략을 주지시켰다.
OIE(국제수역사무국) 기준으로 쇠고기 시장을 개방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사정을 종합해서 개방 폭과 시기를 결정한다는 매우 자주적인 입장 정리였다. 일본, 대만 등은 개방확대를 위한 협상조차 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덕수 총리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등 '개방파 관료'들은 끊임없이 참여정부 임기 내에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개방 폭을 확대해 보려고 추진했다. 물론 청와대 내 정무분야 참모들은 반대했다. (중략)
정부의 공식입장이 정리된 후에도 한덕수 총리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개방 확대문제를 다시 한번 재검토할 것을 나와 정책실장에게 요청해 왔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이명박 정부에서 있었던 쇠고기 파동은 이미 참여정부 말부터 개방파 관료들이 추진하려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추진에 앞장섰던 한덕수 전 총리와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이명박 정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이 우연한 일로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 문재인이 마지막 총리였던 한덕수와 이렇게 정면 격돌하며 그를 '친미 푸들"로 생각했다는 생생한 증언입니다. 집권 후 그를 쓸 생각을 눈꼽 만큼이라도 했다면 그게 비정상 아닐까요?
이런 속사정을 尹 당선자는 백분의 일이라도 알고 있을지ᆢ.
하버드대에서 석박사를 하고, 평생 통상업무를 가까이 하면서 실체적인 미국의 힘을 절감한 그가 자연스럽게 친미적 성향을 가질 수는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한덕수는 지나치다고 지적할 수밖에 없을만큼 너무 친미적입니다. 주미 대사 때의 언행(言行)을 분석해 보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것도 그가 총리로서 부적합하다고 보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가뜩이나 尹당선자의 친미 성향은 대선 기간의 연설과 공약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 총리까지 뚜렷한 친미라고 할 때, '승수(乘數)효과'가 아니라 미국 일방적인 몰빵정책의 역효과만 커질 것 같은 우려가 드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된 절친 L씨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자신이 친미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한미관계가 악화되면 우리는 생존이 어렵다고 말한다. 그의 소신인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 한덕수에 관해 쓸 게 많습니다. 그러나 그가 국회에서 인준 부결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총리 지명을 속히 철회해 필자가 '불가론'(不可論)을 더 쓸 필요가 없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 멈추고 버릴 줄 안다면 현인(賢人)입니다. 큰 용기입니다.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노조위원장/청와대 춘추관장(김대중 정부)/국회의장 공보수석, 초대 게임위원장(차관급, 노무현 정부)/한국방송광진흥공사 사장(문재인 정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