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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콥(스티븐 연 분)이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금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이콥이 한국에서 모니카와 살았을 때는 한국인 전체 누구나가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어요.
젊고 똑똑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제이콥은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지만, 미국에서 절반의 실패를 겪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보다 절망적이고 무섭고 책임감은 더 무거워졌고 심지어 그걸 드러낼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제이콥이 남은 돈을 톨톨 털어서 산 곳이 아칸소 시골의 버려진 땅이었어요.
아칸소라고 하면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주지사를 했었던 걸로 처음 들어본 곳이니 어떤 땅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검색해보니 목화가 주 생산품이었던 깡 농촌이고 인종차별로도 제법 유명한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농사라 하면 비행기로 농약 살포하고 몇시간씩 운전해가도 밀밭, 옥수수밭만 나온다는 어마어마한 규모가 대부분입니다.
근데 제이콥이 가진 돈으로 그런 대농은 꿈도 꿀 수 없을테고 50 에이커의 작은(얼마나 작은지 저는 모릅니다만, 비행기로 농약 뿌리지 않으니 미국 수준에선 소농이겠지요) 땅에서 돈이 될만한 농사를 해보려고 합니다
제이콥이 산 땅은 전 주인이 쫄딱 망해서 자살한, 우리로 치자면 흉한 땅입니다
아마 그래서 제이콥이 가진 작은 돈으로도 겨우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이 됐을 거예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흉한 땅에 들어가는 걸 꺼려하지만 제이콥은 그런걸 따질 상황이 아니고 자기가 가진 돈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도 했을테고요
절박하기도 하지만 제이콥은 미신 따위 믿지 않는 도시남자(?)라서 그런 건 문제조차 되지 않았을텐데, 표현되지 않았지만, 온 동네 사람들이 다들 그런 눈으로 자길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무시하고 열심히 농사를 짓지요
근데 거의 유일한 일꾼인 폴은 거의 주술사같은 크리스찬이라 이 땅에 축복을 내려주겠다고 요상한 짓거리를 해요.
이 영화에 인종차별에 대한 뉘앙스가 거의 없다고 하는데, 아칸소는 옛날 주 산업이 목화였다면 흑인 노예제가 공고히 있었을 동네였는데 전체 한국인이 15명 밖에 안되서 한인교회조차 꾸리지 않는 깡촌에서 현실적으로는 인종차별이 없을 리가 없을텐데, 이 톤은 뭘까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이 영화 전체가 5살(? 4살?) 데이빗의 이해수준에서 그려져서 그런가 싶었는데, 제이콥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캘리포니아에서 한인 커뮤니티에서의 어떤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그래서 10년이나 정착하려고 애쓰고 살았던 그 땅을 떠나올 정도의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인종차별 따위가 더 힘들지는 않았겠구나 싶었습니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생판 남이 하는 욕보다 더 슬프고 아픈, 그런 것과 비슷한 심정일까 싶습니다.
제이콥에게 인종차별을 감당할만한 아픔이 있었지 않았나 한번 더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더더욱 한인과 걸쳐지지 않고 어떻게든 정착하고픈 욕구가 강하지만, 현실적으로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심장병을 가진 아픈 아이까지 키우면서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고 무서워졌겠죠
그런데 나라도 억지로 힘센 척, 강한 척하지 않으면 가족이 모두 무너질 거라 생각하면...
그런데 당연히 겪어야 하는 초보 농부의 실수, 도시민적 세계관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농촌의 경험 때문에 실패에 가까와가는 현실이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두번째 실수는 하지 않아야 앤과 데이빗, 그리고 모니카와 반신불수 장모남까지 잘 살 수 있는데, 자기 어깨에 얹혀있는 이 무서운 현실이 어찌 두렵지 않았을까요...
스티븐 연의 제이콥 연기는 이런 젊은 아빠의 두려움과 긴장이 처음부터 느껴집니다.
그런데 전 처음 봤을 때는 스티븐 연의 연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만, 두번째 볼 때는 스티븐 연만 눈에 들어오더군요
아닌 척, 강한 척하면서 스스로에게 다독이지만 농사에 경험없는 젊은 아빠의 두려움과 긴장감이 영화 전체에 녹아있다 싶었어요.
그나마 유일한 갈등 폭발 장면, 오클라호마 한인 슈퍼 주차장에서 모니카와 싸울 때...
전 이 장면이 미나리의 최애 두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예리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단호하지만, 그 흔들리는 억양에 분노, 절망, 원망, 지침 등등의 감정이 몽땅 들어있어요.
처음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두번째 보니까 이 대목에서 한예리 연기는 너무나 대단했습니다
근데, 스티븐 연의 목소리도 똑같이 떨리는 억양에 서러움, 억울함, 미안함 등등이 들어있더라구요
작년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결혼 이야기'에서 자막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숨막히는 부부싸움 장면도 매우 인상적이었지만, 미나리의 스티븐 연과 한예리의 부부싸움 장면은 표현은 정 반대지만, 결혼 이야기 부부싸움에 필적할만한 놀라운 장면이었습니다
전 이 장면이 눈물 없이, 아니 아주 최소량의 눈물만으로 가슴속에서 폭포수처럼 흘리고 있는 피눈물의 싸움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빠 제이콥의 이 두려움과 긴장감은 장모님의 미나리밭을 보고 나서야 풀립니다.
드디어 본인이 언뜻 논리적이지 못하고 비과학적이라 무시했던 시골 농부의 사고체계를 가져야 여기서 정착할 수 있다는 아주 간단한 진실, 현실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편안해집니다.
뭐랄까 자연스럽게 제자리에 있어야 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는, 자연에 순응해서 살아야한다는 농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지만 도시남 초보 농부 제이콥은 상상도 못한 진리였기 때문에 장모님의 미나리와 미나리밭을 보고서 자신이 놓친 큰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후에 거부했던 우물 장인도 불러서 우물을 파게 되죠
저는 그래서 미나리가 제이콥에게 큰 깨달음과 안정을 가져다 준 큰 계기였기 때문에 제목이 되었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아마도....
똑똑한 제이콥은 영화 이후에 성공해서 잘 살았을 것 같습니다
한번만 봤으면 스티븐 연의 남우 주연상 지명을 이해하지 못했을텐데, 두번째에 스티븐 연의 연기를 다시 보게 되어 매우 즐겁게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스티븐 연이 수상까지는 못할 거라 생각하지만 미나리에서의 그의 연기는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