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세만 되어도 등뒤에 귀신이 와있는걸 안다고 서정주시인이 말한 나이.
이 세상의 그 어떤것도 거칠것이 없다고 말한 나이, 불혹.
이 나이쯤 와보니, 팔 걷어부치고 문밖으로 성큼성큼 나설 일도 있었던게 생각나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심약한 큰애가 늘 아이들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오면 일부러 엄마의 힘을 보여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하면서 다음날 학교를 찾아간일이 수두룩했었음.)
그러기전의 저는 태어난지 한달도 안된 아기가 밤에 잠을 안자고 울면 달래다가 같이 울고,
현관문에 달린 렌즈구멍이 시뻘건 색깔로 물든것을 무서워하면서 못열다가 정신차려 열어보니
붉은 글씨로 크게 쓴 피자집 신장개업광고지였던것에 아연실색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 제가 불혹을 넘기고 등뒤에 귀신이 온것도 알아차리는 나이보다 조금 더 먹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음 약하고 여전히 가시돋친 소리는 못하는건 똑같아요.
그런 제가 집안일들을 하면서 은근히 좋아하는 게 몇개 정도 되요.
깨끗하게 정리가 다 되고, 마무리가 다 되어갈 무렵에, 베란다에서 바삭바삭하게 마른
식구들의 빨래를 거둬들일때 풍기는 그 햇볕과 바람냄새가 좋아요.
그렇게 거둬들인 빨래들을 개킬때 청결해진 소맷부리나 무늬를 보면서 그 옷의 주인인
가족들의 얼굴이 떠오르는동안, 마음이 누그러지고 온화해지는게 좋아요.
그다음은, 그릇이 아닌, 컵을 닦을때 기분이 좋아져요.
이상하게 싱크대에서 컵을 닦는 일쯤은 오히려, 누군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웠던
고양이같은 시간을 떠올리게 해요.
그리고, 말끔하게 닦여진 식기들이 티끌도 없이 가지런히 놓여져 부엌한켠에 정돈되어있을때.
방금 막치운 식탁이 반들반들 빛날때.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다가, 칫솔걸이에 나란히 걸린 식구들의 칫솔을 볼때면
또 맘속에 비가오기전의 물묻은 바람냄새처럼 코끝이 시큰해지는 순간이 좋아요.
그렇게 가족들이 각자의 취향대로, 컵에 물을 따라 마시고,
좋아하는 색깔의 칫솔로 이빨을 닦고,
간혹 칫솔모가 너무 벌어지면 새것으로 교체해놓는 그 소소한 일에도
또 그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애정이 맘속에서 피어나요.
욕실의 수건이 젖으면 늘 새수건으로 걸어놓고, 양말을 늘 빨아 걸어놓고,
지저분해진 운동화는 빨아 햇볕아래 널어놓으면서
그렇게 저는 매순간, 집안일에 손을 대면서 가족들의 얼굴을 떠올려요.
그냥 저절로 떠오르는 얼굴들, 돌아보면 그 얼마나 많은 추억을 실고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를 걸어가는 걸까요.
냄새나는 양말과, 젖은 수건을 늘 습관처럼 세탁하고 거둬들이며
살면서 엄마인 저는 그렇게 우리 가족들의 얼굴을 하루에도 몇번을
되새김질하고 사는거였군요.
우리아이들아, 그러고보니, 너희가 엄마가 있어서 좋을때가
늘 새수건으로 얼굴닦을때가 좋았다고 할때가 이제 생각난다~
엄만, 너희들이 하기싫어하는 그 집안일들이 어쩌면 보고싶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들이 자동 소환되어서 즐거웠나보다.
그리고, 이런 집안일을 하면서 조금은, 매섭고 정없기만 했던 우리 엄마가
조금씩 이해되더라구요.
그 화마와 같던 무서운 세월을 지나왔던 엄마도, 매일 먹는것만 안다고 어릴때는
그토록 미워하던 이 늙은 둘째의 등짝 어루만져주는데도, 그마저도 흠칫
기분나빠하던 모습에서 늙은 엄마,행여나 마음 다치지 않았나 걱정은 되면서도,
왜 또 슬쩍 눈치를 보는 나, 드디어 엄마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먼곳으로
떠나버릴때,
평생을 가난하게 살다 떠난사람
그 빈자리가 차가움을 얼마나 마음아파할지.
미리 예감하게 하는 엄마가
이렇게 손에 익은 집안일을 할때면 홀연히 생각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