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의 잠자는 아이들 그 독특한 아름다움변진경 기자 입력 2019.11.07 10:21
교실에서 학생들이 잠을 잔다. 팔을 베고 자고, 턱을 괴고 자고, 교과서에 뺨을 대고 자고, 체육복을 둘둘 말아 목에 끼우고 자고, 팔짱을 낀 채 허리를 세워 자고, 이어폰을 끼고 엎드려 잔다. 이 개별적인 수면 자세와 나지막한 숨소리들이 모여 하나의 교실 풍경으로 묶이면 그것은 종종 교육 문제가 된다. 누구나 교실에서 침 한 번쯤은 흘려가며 학창 시절을 보냈건만 교실 수면을 바라보는 바깥세상 시선은 결코 따스하지 않다. 학생들의 자는 풍경은 대개 ‘교권 상실’ 혹은 ‘공교육 붕괴’ 같은 무시무시한 사회문제의 증거 자료로 활용된다.
18년간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살아온 정지은씨도 처음엔 자는 아이들을 보면 화가 났다. 엎드린 아이는 무조건 흔들어 깨웠다. 자는 아이는 딱 두 부류라고 생각했다. 나를 무시하거나, 게으르거나. 여러 학교에서 여러 아이들과 여러 시간들을 보내면서 그 완고함이 조금씩 흔들렸다. 묘하게 공감되기까지 했다. 그래, 그 많은 수업 시간을 버텼으니 자습 시간에는 졸릴 법하지. 창체(창의적 체험활동) 시간 텔레비전에서 잘 들리지도 않는 단체 방송이 흘러나올 땐, 그래, 잠이 올 수밖에 없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야 하는 노동자 겸 학생들은 그래, 교실에서 지쳐 쓰러져 자는 게 당연할지도. “모범생들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자는 학생은 저마다 다양한 사연이 있다.” 불편하고 골치 아팠던 ‘교실 수면’ 집단 속에서 아이들 각각의 개별성이 정씨의 눈에 들어왔다. 자는 학생들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종종 그런 시간이 있다. 아이들이 자도 깨울 필요가 없거나 깨울 수도 없는 시간들. 정씨는 국어 교사니까 처음에는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간혹 잘 아이 중에 안 자는 아이가 생기기도 하니 뭐가 되었든 아이들을 보고는 있어야겠다 싶어서” 책을 덮었다. 자는 아이들을 바라보니 일단 그 모양이 너무 재미있고, 웃겼다. ‘야 이게 너야’ 하고 보여줄 장난스러운 마음으로 그린 낙서가 처음이었다. 시험지 뒷면에, 가정통신문에, OMR 카드에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려니 자세히 봐야 했다. 오랫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을 만한 아이를 골라 한참 들여다봤다. 들여다보니 아름다웠다. 짠했다. 고요하고 순수하며, 곱고 연했다. 그 그림들과 짧은 글들을 <교실 수면 탐구 생활>(우리학교 펴냄)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정씨가 발견한 “어린이나 아기가 자는 모습과는 또 다른 종류의, 자고 있는 청소년만이 주는 특유의 미감”은 어쩌면 “자라느라 악다구니를 쓰는 나이”여서 피어올랐을지도 모른다. 깨어 있을 때 극성스럽고 어둡고 드세고 거칠고 독기 어린 ‘요즘 무서운 10대’ 아이일수록 그 미감이 진해진다. 어떤 남학생은 중년 같은 아우라를 풍기는데 노란색 곰돌이 푸 필통을 갖고 다닌다. 어둠의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한 ‘요주의’ 학생이 사실은 귀여운 캐릭터 양말을 신고 있다. 깨어 있을 때에는 다른 강한 특성에 가려 쉽게 보이지 않던 이 “말랑한 마음, 폭신한 상태”가 자고 있을 때에는 무방비 상태로 들통나버린다. 밉던 학생도 자는 모습을 그리고 나면 신기하리만큼 애틋해졌다. ‘아이들을 사랑하기 위해’ 정씨는 점점 더 많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여전히 요즘 학생들은 이해하기 어렵고 생경하다. 시커먼 롱패딩을 입고 우르르 몰려다니고 예쁜 민낯에 ‘갸루상’ 화장을 떡칠하는 아이들의 심리를 정씨도 잘 모르겠다. 톤그로(‘톤’과 ‘어그로’의 합성어), 롬곡 (‘폭풍눈물’을 뒤집어놓은 말) 따위의 ‘급식체’로 대화하고 시험 문제를 푸는 대신 OMR 카드에 타투를 그려 팔에 대보는 학생들을 보고 웃어줄 순 있지만 완전히 이해할 순 없다. 그럴 때 정씨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이안 감독, 2013)에 나오는 두 주인공,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인도 소년 파이를 떠올린다. 본능에 의해 언제든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는 파이가 온전히 이해하거나 길들일 수 없는 존재다. 두렵고도 애틋한 호랑이와 우정을 나누는 건 환상이다. ‘공존’할 수 있으면 그것이 최선이다. 정씨는 그 둘의 관계가 교사와 학생 사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자는 학생을 그리는 과정이 아마 그 공존의 작업일 것이다. 정씨는 “사실, 여전히 아이들이 교실에서 안 잤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아무리 교사 연차가 쌓여도 아이들이 자는 걸 보고 있기란 영 힘들고 불편한 일이다. 교사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아도, 노력한 만큼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조바심이 난다. 교사의 역할, 한계, 영향력, 직업적 소명에 대해서 늘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씨는 꼼짝 않고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을 계속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고, 기다리고, 그려줄 생각이다.
“건축업에서 쓰는 ‘양생’이라는 개념이 있다.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해주고 충격받거나 얼지 않도록 보호하는 작업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일정 기간 그냥 내버려두기’인 것이다. 가만 보니 양생이 청소년을 대할 때에도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자기만의 양생을 하는 중인지도 모른다. 양생의 황금 비율을 찾고 싶은 마음으로 그 모습을 그려본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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