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꾸역꾸역 시간이 되어서 퇴근 후에 과감하게 두편을 질렀습니다.
한편은 문화의 날 혜택가로, 한편은 해당시간이 넘어서 포인트 반값으로 봤으니, 시간은 투자했으되, 돈은 별로 안들었습니다.
1. 더 길티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기 힘든 귀한 덴마크 영화입니다.
국내 흥행이 힘들 것이 분명해서 홍보사에서 '개봉 미정'이라는 타이틀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전략으로 사전 홍보를 했으나, 무슨 이유인지, 1개 멀티플렉스에서 단독 개봉하고 있습니다.
덴마크 영화인만큼, 감독, 배우 누구하나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였으나, 보는 내내 강한 흡입력으로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런닝타임은 짧지만, 주인공 1인이 화면 지분의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우리로 치자면 112 상황실로 대응되는 코펜하겐 긴급구조센터 콜센터에 근무하는 경찰관의 하룻저녁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사건과 심리는 전화통화 상의 대화로만 알게 됩니다.
이런 단조로운 세팅에서도 이렇게 쫀쫀하고 긴장감있게 극을 끌고 가는 감독의 솜씨가 대단합니다.
그 짧은 러닝타임 동안 사건은 엎치락 뒤치락 뭐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짐작하기 어렵게 영화는 관객을 훅훅 끌고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대 반전...
마지막 장면에서 왜 이 영화의 제목이 '더 길티'인지 도장을 꽝 찍습니다.
인간의 실수, 회피, 고뇌, 죄책감, 선의, 정의, 후회, 책임감 이 모든 것이 '보통'의 양심을 가진 소시민에게 한꺼번에 어떻게 작용하고 움직이는지 간결하고 충격적으로 그립니다.
더구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리가 눈으로 보는 화면보다 훨씬 큰 세계를 긴장감있게 그려내는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합니다.
작년 선댄스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하고 세상에 이런 데뷰작은 없었다는 칭찬을 받고 있는 작품임을 유감없이 느끼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꼬맹이 때부터, 가수, 운동선수, 배우 등등 연예인 그 누구도 좋아해보거나 빠질 해본 적 없는 제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배우가 덴마크 배우 입니다. 심지어 이성에게 섹시미를 잘 느끼지 못하는 저조차도 그 배우는 볼 때마다 50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참 섹시하다 생각하곤 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배우는 그처럼 섹시하다고까지는 아니지만,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덴마크 이름은 너무 어려워 도저히 기억하기 힘들지만, 뇌리에 꽂혔습니다.
아마도 제 이성 취향은 덴마크 남자인가 봅니다 ㅠㅠ
2. 어스
기대작이자 문제작인 어스.
전작인 '겟 아웃'을 너무나 흥미진진하게 봤기 때문에 무척 기대를 했는데 보는 내내 알쏭달쏭했습니다.
어느 한장면도 쉽게 만들지 않는 감독이기 때문에 별볼일 없어 보이는 장면에서도 의심과 호기심을 놓치지 않았지만, 보는 동안은 실마리를 잡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다 끝나고 나니 내가 뭘 많이 놓쳤구나 하는 생각에 허무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한번 봐야겠다 생각에 바로 주말에 예약을 넣었습니다.
관람 이후로 미루었던 후기들이나 분석글을 하나하나 다 읽고 나서 가장 제 마음을 대변했던 후기는 '미국 버지니아주 시골 사람이 한식대첩 심사보는 느낌'이라는 문장이었습니다.
'겟 아웃'은 흑백 인종 문제의 큰 그림만 알아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보편적인 인식의 토대위에 설계된 작품이었다면 '어스'는 좀 더 깊고, 디테일하고 섬세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설계했습니다. 한순간, 한장면, 말 한마디, 얼굴표정 하나, 눈물 한방울, 손끝 하나, 입은 옷까지 계산하고 의미를 심어 놓은 복잡한 작품입니다. 심지어 그 의미도 한가지가 아니고 중의적인, 혹은 훨씬 많은 의미를 함축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장치들을 빡빡하게 넣어 놓은 작품이더라구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찬 작품이면서 감정과 스토리의 겹이 켜켜이 너무나 촘촘하고 두터워서 오히려 투박하게 뭉툭하게 그 겹겹이가 한통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이 작품의 평이 극과 극으로 완벽하게 갈리는 이유가 이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디테일하게 설계했기 때문에 보편감상을 넘어서 미국인, 그리고 그 시절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도 그 뉘앙스를 정확하게 알기 힘든 것들이 많다는 점 입니다.
한국사람이라면 전국 노래 자랑 오프닝 송만 들어도, 그 무대 한장면만 봐도 전국 노래 자랑이라는 프로그램이 갖는 의미를 설명없이 직관적으로 느끼지만 한국이라는 나라조차 생소한 외국인에게는 설명을 해봐야 그런가 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미국 버지니아 시골 사람이 한식대첩 심사를 보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무릎을 치게 하던지요.
북미에서의 폭발적인 반응이 한국에서 재현될 수 없는 극명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아무튼 저는 빵빵하게 부풀어진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해서 감상글과 자료들을 열심히 읽어본 후에 다시 한번 볼 생각입니다만,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권하기는 주저하게 되네요.
저 스스로도 저 영화의 제 맛을 다 알수 없다는 한계를 긋고 들어가는지라...
아무튼 조던 필이라는 감독이 천재는 천재인갑다, 게다가, 심지어, 천재가 진화하기도 하는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