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 슬픔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되려나?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첫가을의 눈부신 햇살이 떨어질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건너뛰고
달리는 기차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은 황혼의 밤이 되려 하는 즈음에, 불을 밝힌 창들이 유령의 무리같이 시끄럽게 지나가고, 어떤 예쁜 여자의 얼굴이 창가에서 은은히 웃고 있을 때. 찬란하고도 은성(殷盛)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때.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건너뛰고
오뉴월의 장의 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보랏빛과 흑색과 회색의 빛깔들.
둔한 종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털.
자동차에 앉은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흘러 다니는 가극단의 여배우들.
줄에서 세 번째 덜어진 광대.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처녀의 가는 손가락이 때 묻은 서류 속에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
만월의 밤 개 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이삼절.
어린아이의 배고픈 모양.
철창 안에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무 위에 떨어지는 백설(白雪)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끝>
중학교 때 국어책인지 고등학교 국어책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필자는 1948년생)
하지만 안톤슈낙의 가슴을 애잔하게 적시던 윗글을 읽었을 때의 추억은 지금도 어제일 같이 선연하다.
안톤슈낙이시어!
당신은 행복한 나라, 행복한 시절을 살다 가셨습니다.
이 죄 많은 인생이 태어난 한반도의 반쪽 남녘땅에서 오늘을 사는 저는 슬픔을 느낄 만큼 한가하지 못합니다.
지난 9년 동안 불볕더위 찬바람 찬이슬 살을 에는 추위에 떨면서 도끼눈깔을 부라리는 사냥개들에게 쫒기면서도, 숫한 날밤을 새우며 촛불을 켜 들어 죽었던 민주주의를 되살려 냈건만 그 민주주의가 지금 앞길이 위태위태합니다.
그저 보고 듣는 모든 것이 슬픔을 넘어 분노를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게 하고, 나도 모르게 날선 칼이나 쇠몽둥이를 생각하며 살기를 북돋우는 뉴스뿐입니다.
다시 촛불이 살려내기 전의 죽음의 세월로 되돌아가자고 아가리를 놀려대는 것들을 보면 오직 생각나느니 그것들을 발기발기 찢어 죽이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오늘은 황교안이가 나를 얼마나 분통 떠지게 하고, 내 살기를 북돋우려나?
오늘은 나경원이가 나를 얼마나 분통 터지게 하고, 그 주둥이를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게 만들려나?
아- 언제쯤이나 죽은 새의 깃털 위에 찬 이슬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슬픔을 느끼고, 밤기차를 타고가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의 창에 비추는 희미한 불빛을 보며 슬픔을 느낄 수가 있는 세월이 오려나?
국민들이며!
아니, 촛불들이여!
정신 똑바로 차립시다.
잘못하다가는 다시 이명박-박근혜 시절로 되돌아갑니다!
죽으면 죽었지 어찌 그런 세월을 다시 살 수가 있단 말입니까?
허리띠 불끈 조이고 운동화 끈 질끈 동여매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