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아이 한창 기말고사 치르고 있겠네요.
어릴때부터 센 한방은 없어도 순순히 시키는대로 잘 따라와 늘 우수한 성과를 보였던 아이입니다.
늘 열심히고 성실한 큰애와는 좀 다르다는 건 애기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공부를 놓은것 같습니다. 그동안 동생이고 둘째라 어느집이나 좀 그러하듯 그냥 두고 여유있게 지켜봤던 것도 사실입니다.
공부는 딱 학원 숙제만 합니다. 그것도 선생님한테 소리 안들을 만큼만 정확히 별표치고 제껴서 해갑니다. 이 기술은 얼마나 정교하고 정확한지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애기때도 수학학습지를 시켜보면 반복되는 연산문제는 정오답에 관계없이 앞에 푼대로 베껴쓰고 있어 우직한 큰애와는 달리 잔머리와 회피기술이 잘 발달되어 있었음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남의 눈은 매우 의식하고 잘보이고자 노력하는 아이라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도 심지어 독서실 사장님도 우리애는 중학생이라도 예외적으로 받아주실 만큼 좋은 평을 받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안합니다. 독서실에 앉아서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늘 저도 비몽사몽하다 새벽두시에 데리러 가고 아침 6시에 일어나 큰애 보내고 출근합니다. 애들 학업 마치기 전에 제가 먼저 죽을것 같습니다. 작년에는 마지막에 암기과목 몇개를 그냥 놔버리고 시험치는 사태까지 보이니 어르고 타일러 겨우겨우 올해는 그러지 마라 안그러마 약속하고 중간고사까지 치렀는데 오늘아침 출근 전 온통 널부러진 참고서 몇권들 들춰보니_오늘따라 일찍 등교해서 가능한 일이지 평소에는 제가 먼저 출근하고 자기방에는 절대 못들어가게 합니다._ 단 한장도 풀지 않았네요. 필요하다해서 본인이 직접 산 책들입니다.
시험 시작일에도 느지막히 집에 와서 집에 먹을거 없다고 전화해서 온갖 성질을 부리길래 냉장고에 밥 볶아놨고 아니면 이따 독서실앞으로 내가 가서 저녁 사줄게 하고 달랬습니다. 그런데 1시간이나 지나 다시 전화가 오더군요. 자기 가방이 무거워서 독서실에 못가겠으니 퇴근하고 자기를 태워 독서실로 가랍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안좋은 소리를 하면 그 후폭풍이 너무 크고 역효과가 나길래 좀처럼 화를 내거나 나무라지 않는데 정말 화가 나더군요. 퇴근까지는 1시간도 더 남았고 내일 시험인데 지금 뭐하고 있냐 했더니 화를 내고 전화를 끊더군요. 그리고 또 1시간 뒤 퇴근무렵 독서실로 입실했습니다. 그리고 30분 뒤 문자가 옵니다. "나 저녁 사줘.독서실로 와"
이보다 더한 에피소드도 많지만 대략 이런식입니다. 학원도 자기가 끊고 왔다 다음달에 다시 간적도 많습니다.이때마다 그 과정에서의 성과없는 소모전을 어찌다 말할까요?
이곳에 사춘기로 힘든 부모님들 글 읽으며 이 정도는 막내 애교로 봐줘야 하나 생각도 들지만 우리집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애들아빠가 몇년전 저세상으로 갔습니다.
저는 늦은 나이에 겨우 취업하여 급여는 적습니다.겨우 먹고 살만큼만 법니다. 그래도 나중에 애들 공부때문에 후회하게 될까봐 남편이 남기고 간 퇴직금과 보험금을 헐어 애들 사교육비를 대고 있습니다. 근데 큰애는 자기주도학습이 잘되어 일주일에 영어 수학 한번씩만 점검 받으러 가는 정도의 사교육만 하고 있고 내년 과탐2 생각해서 수업을 넣으려 해도 오히려 인강이 훨씬 낫다면 본인이 손사레칩니다. 모든 공부가 자율학습 인강입니다.
그런데 오직 학원 숙제만 조금 해가는 이 둘째에게 대부분의 학원비가 들어가고 있는데도 정작 본인은 이 학원들을 줄이려고도 않네요.
조심스레 마이스터고 같은 특수고 얘길 했더니 펄펄 뛰고 난리가 나서 다시는 그 얘기는 꺼내지 않는걸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공부머리가 없거나 아예 안하면 맘을 딱 접겠는데 그것도 아니고, 공부도 때가 있다는데 지금 잘 지원해주지 않음을 후회할까 싶다가 큰애 공부시켜보고 주위를 봐도 결국은 지 그릇만큼 가고 그만큼 찾아 먹는것 같아 그냥 눈 질끈 감고 독서실 학원비 빼고 니가 알아서 해봐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지 아빠가 유난히 이뻐하던 아이라 더 괴롭습니다. 애들 어릴때 가계가 잠깐 힘들어졌을때 작은애를 병설유치원으로 옮기려고 한적이 있었는데 남편이 결사반대하여 그냥 다니던 곳에서 수료시킨적도 있습니다.
목숨같은 우리집 쌈짓돈이 이렇게 허무하게 줄어드는것도 피눈물 나지만 그래도 그나마 돈으로라도 유지시켜 아빠 그늘도 없는 아이 어느정도 지 밥벌이 할만큼이라도 만들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야 남편에게도 면이 설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아침에 그 새 참고서들 보고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온것 같아 정말이지 마음이 지옥입니다.
편지도 대화도 이제는 지칩니다. 더이상 해줄말도 쓸말도 없습니다.
화를 내야할까요? 그냥 덮을까요? 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