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Lee로부터 날아온 편지
1. 요새 한국TV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주한미국대사를 얼마 전엔가 역임했고, 현재는 주 필리핀대사로 있다는 한국계미국인 <성김>이라는 분이 판문점의 북-미 협상대표로 와서 한국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모든 말(TV뉴스)을 영어로 하자 아내가 “저 사람 원래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사람 아니야?”하고 물어왔다.
그래서 필자가 “왜 그러느냐?” 고 물었더니 아내가 “어떻게 조국이 한국인 사람이 미국에서 공무원을 하고 있더라도 한국에 와서 모든 말을 영어로만 할 수가 있어요?”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시사(時事)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필자이지만 성김대사의 개인 신상문제까지는 깊이 알 수가 없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줄 수가 없었다.
2. 필자가 한전에 근무하던 1980년대 중반
그저 틈만 나면 그때 한참 붐을 탔던 고스톱을 치거나 당구 또는 다른 잡기로 동료직원들의 용돈을 싹쓸이 해 가다시피 하는 남자직원 이-아무개가 있었다.
그러니 직원들 사이에서 그렇게 평은 좋지 못 했다.
그러다가 그 직원이 갑자기 한전을 때려치우고 미국이민을 떠났다.
이역만리 미국 이민을 가기 위해 그만 두니 그가 흡족하리만치 송별회식을 베풀어 주었다.
그리고 그는 떠났고 잊혀 져 가고 있었다.
3. 위 2의 얘기에서 20여년 거슬러 올라가서
필자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1960년대 초) 역사(국사)선생님은 역사를 아주 재미있게 가르치시는 분이었다.
무슨 역사적 사건을 설명할 때면 두 눈을 지그시 감으시고 선생님이 그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이나 되시는 양 큰 몸동작을 하시며 그 역사적 사건의 전말과 역사적 의미를 꼭 배우가 연기나 변사가 변설을 하듯 설명을 하셨다.
그러니 공부를 게을리 하거나 역사과목에 대하여는 관심이 통 없는 학생들도 그 선생님의 강의에는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두 눈을 도리도리 뜨고 한마디 한 동작 놓치지 않고 눈과 귀에 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여름 선생님의 임진왜란에 대한 열강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진행되었다.
마지막으로 중국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 살면서도 몇 백 년이 지나도 자기나라(중국)의 풍습과 복장과 언어와 혈통을 대를 이어 유지하면서 산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로든 것이 현재 시청 앞의 프라자호텔과 그 뒤쪽 소공동일대가 서울에서 중국인이 몰려 사는 조그만 차이나타운인데, 그 중국인들 대부분이 임진왜란이 끝나면서(1599년) 전공(戰功)을 세웠거나 조선을 좋아해서 조선에 눌러 살기를 바라는 중국군에게 선조대왕이 그 지역을 중국인들에게 무상(은혜갚음)으로 나누어 줬는데 그 사람들이 300년 이상 중국말과 옷 그리고 풍습과 혈통을 고대로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고 하며,한국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이름도 성도 갈고 이민 간 나라에 동화되어 완전한 그 나라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며, “너희들도 혹시 이민을 가게 되면 중국 사람들의 그런 점은 본 받아야 된다.”고 말씀하시곤 쓴 입맛을 다시며 긴 강의를 마치셨다.
실제로 그 시절 가끔가다 소공동이나 시청 앞에 나가보면 정통 중국의상에 전족을 한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었으니 선생님의 말씀이 증명이 되고도 남았다.
그 뒤로 박정희 정권이 돈 많은 화교(중국인)들의 재산을 반 강제적으로 몰수하고자 프라자호텔 부지를 헐값으로 빼앗다 시피하고 화교들에게 눈에 띄도록 박해를 가해 화교 대부분이 대만으로 떠났다는 애기가 시중에 나돌았으나 필자에게 사실여부를 확인하여 줄만한 지식과 객관적인 증거나 자료는 없다.
4. 남자직원 이-아무개가 한전을 그만두고 미국이민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전 사무실로 웬 낯선 영문이름의 편지한통이 특정인이 아닌 부서(과) 앞으로 배달되어 왔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보내는(미국의 어디?) 주소와 한전의 주소는 모두다 한글과 영어로 써 보낸 것 같은데, 유독 보내는 사람 이름은 영어로만 “James Lee”라고 쓴 편지였다.
모두다 누가 보낸 편지인가? 하고 호기심을 갖고 편지를 개봉하여 봤더니 한글로 빼곡히 쓴 끝에 자신의 한글이름(이 아무개)이 쓰여 있었고, 미국도착 즉시 자신의 이름을James Lee로 바꾸었다는 간단한 설명이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확인되는 순간 모두다 합창이나 하듯 “에이- C8놈, 에이 개??.”라는 합창이 뒤따랐다.
미국이민을 가서 그곳 생활에 빨리 안착하려면 미국이름도 하나 갖고 있어야 편리할 것임은 이해가 가지만, 얼마 전 까지도 함께 근무했던 한국의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름만 유독 영어로 써 보냈으니 이구동성으로 욕설이 튀어 나왔던 것이다.
5. 필자의 손아래 두 동서도 1998년 엔가에 IMF날벼락을 맞아 한창 나이에 실업자가 되어 바로 아랫동서는 뉴질랜드로, 그 아랫동서는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나는 이민을 극구반대하며 3형제가 오순도순 같이 살 것을 바랐지만 잘 나가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아 실업자가 된 두 동서의 앞날을 내가 책임질 수도 없으니 온 몸으로 이민을 막고 나설 수도 없었다.
그때 이민을 떠날 때 두 동서와 처제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한국의 국어책과 역사책은 반드시 가지고 가서 아이들에게 한국말과 한국역사는 부모가 꼭 가르치라고 신신당부 겸 공갈을 쳤지만 그렇게 한 동서는 없는 것 같다.
물론 아이들이 초등학교 졸업 이상의 연령대였음으로 한국말을 잊을 리야 없겠지만 내 말을 흘려듣는 두 동서와 처제가 영 못 마땅했다.
가끔가다 전회통화를 할 때면 내가 “아이들 한국말 잊지 않고 있느냐? 고 물으면 한국의 연속극과 뉴스를 다 보고 있는데 한국말을 잊을 리가 있느냐? 고 오히려 반문을 한다.
그 전화통화를 하면서 속으로 또 괘심한 생각이 든다.
TV를 보아서 한국말을 잊지 않는 것 하고 부모가 책을 펴 놓고 가르쳐 주는 것 하고는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이해와 감정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내의 급작스런 성김대사의 출생내력을 묻는 질문을 받을 때 불현듯 떠오른 것이 중학교 때 참 재미있게 역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의 모습과 제임스-리의 편지를 받았을 때의 떫고 씁쓸한 기분이었다.
아마 그 역사선생님 지금쯤은 하늘에서 당신의 조국을 내려다보시며 “내 조국이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야 할 터인데!”하고 걱정을 하고 계실 것이다.
선생님!
아무 걱정 마십시오! 지금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로 잘 되어서 선생님과 이 땅을 살다 가신 모든 조상님들이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주무실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할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