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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번호 찾기 질문 -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스승의날 조회수 : 1,017
작성일 : 2018-05-15 15:26:58
웹사이트 회원가입을 하다 보면 비밀번호 찾기 질문이 있다.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 성함은?"이라는 질문을 나는 종종 선택하곤 했다. 30년 동안 이 질문을 마주할 때마다 내 마음에 늘 떠오르는 이름은 박두식 선생님이다. 그리고 선생님 등에 업혀 계단을 내려가던 어느 오후 교정의 풍경이 떠오른다.

나는 시골 초등학교의 2학년생이었다. 원래 젊은 여선생님이 담임이었는데, 열정적이고 카리스마있는 분으로 학생들에게도 잘 해주셨다. 그런데 임신과 유산, 시아버지 상 등 어려운 개인사가 겹쳐 결근을 반복하시다가 결국 2학기 시작하자마자 돌연 휴직을 하시게 되었다.

이별의 슬픔을 삭일 새도 없이 바로 낯선 남자분이 우리의 새로운 선생님이라며 들어오셨다. 그 분을 봤을 때 내 첫 반응은 옅은 실망감이었다. 에이.. 아저씨잖아....ㅋ 까무잡잡하고 둥글넓적한 얼굴에 작은 눈. 웃으면 눈이 없어지는 푸근한 쌀집 아저씨같은 인상의 선생님은 그렇게 눈물로 얼룩진 우리 반 아이들에게 본인 이름 석자를 소개하셨다.

이 선생님 역시 함께 한 시간은 길지 못했다. 한 학기라 해봐야 3~4개월 정도니까...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토록 사람의 마음에 깊숙히 각인될 수 있는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 나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기억나는 추억은 많지 않다.
늘 서글서글 웃는 눈, 때론 진지한 표정으로 교탁에 손을 짚거나 아이들 책상 앞으로 와서 약간 허리를 숙인 채 눈을 맞추며 수업을 하셨던 모습. 저학년이라 주번이 없었는데, 일종의 주번 개념을 시범적으로 도입해 운영하기로 했던 모양이다. '정화'라고 써있는 그 파란색 주번 완장이 갖고 싶어 아이들은 매주 서로서로 손을 들고 난리였는데, 드디어 나에게도 당첨의 순간이 왔다.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으며 내게 '정화' 완장을 내밀던 선생님의 얼굴.

한번은 가을 소풍 때 풀밭에 앉아있는 선생님께 다가가 느닷없이 질문했다.
"선생님 몇 살이예요?"
"나? 34살."
"에이~ 아닌 거 같은데! 한 사십...."
말을 하다가 눈치를 보니 선생님은 조금 당황스런 기색이셨고 하늘색 셔츠를 입고 계셨던 기억이 난다.
뭔가 미안시러웠지만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었다. 암만 봐도 그리 젊어 보이지 않는디....

그 날 선생님은 처음 본 우리 엄마에게(지금 생각해보니 임원 엄마라서 학교 행사 때 선생님들 도시락을 챙겨야 했던 것 같다.) 내가 체육 때문에 'all수'를 받지 못했다며 그냥 실력대로 점수를 줬다고 말씀하셨다 한다.(공부 잘하면 으레 관례처럼 예체능도 점수를 올려주는데 본인은 그냥 공정하게 했다는 의미로) 내가 얼마나 운동치인지 알고 있는 엄마는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선생님 칭찬을 했다. 나의 견해와 달리 엄마는 선생님이 제 나이로 보인다고 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스타일의 문제였던 듯..ㅋ

그 때 나는 우리 선생님은 농담(초딩개그?)이 통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일기장에 그걸 암시하는 내용과 엄마가 버릇없게 굴까봐 주의를 준 것, 그리고 자꾸 잊어버리고 또 선생님께 까불거리는 나 자신에 대한 약간의 반성이 나와있다. 그걸 보고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ㅋ 그렇게 2학기가 지나고 이듬해 나는 3학년이 되어 다른 반이 되었다.

어쩌다 복도에서 선생님을 만나면 어찌나 반갑던지. 한달음에 달려가면 선생님도 함박웃음으로 반겨주시곤 했다.

그러던 봄날의 어느 오후. 아마도 토요일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청소당번이라 늦게 나왔던 것 같다. 천성이 느긋한 데다가 7살에 학교를 들어가 늦되기까지 했던 나는, 지금도 행동이 느리지만 그땐 정말정말 느렸다. 친구들, 선생님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로...
그 날도 아마 다른 애들이 다 가고 뒤늦게 혼자 나왔던 것 같다. 운동장이 인적없이 고요했던 걸 보면.
스탠드 위를 걸어가는데, 계단 앞에서 박두식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왠지 장난이 치고 싶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선생님~ 저 업어주세요!"
내 맹랑한 요청에 선생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업어주면 뭐 줄건데?"
"빵 사드릴게요!" 나는 나오는대로 주워섬겼다.
그러자 선생님이 진짜 등을 내주며 업히라고 하시는 거 아닌가?
설마 정말 업어주실 줄이야..! 나는 약간 신기한 마음 반 장난 반으로 업혔고 선생님은 나를 업고 긴 계단을 쭉 내려가셨다. 그리고는 내려주며 예의 그 웃는 얼굴로 "자, 업어줬으니까 다음에 빵 사줘." 하고 가셨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좀 웃긴데, 그 후로 내가 빵을 사가지 못해서 한동안 선생님을 피해다녔다는 것이다. 그 일을 기억하고 엄마에게 용돈을 타서 빵을 준비할 준비성이나, 선생님을 언제 만날지 모르니 교무실 자리를 알아내서 찾아가면 되겠다 하는 주변머리가 내게 있을리 만무했다. 그저 덜렁거리고 돌아다니다 며칠에 한 번 선생님을 마주치면, 앗 빵..! 하고 민망해서 인사만 하고 쌩 도망가거나, 나중엔 복도 끝에서 선생님이 보이면 얼른 숨어버리기나 하는, 그 때마다 '오늘 엄마한테 얘기해서 꼭 약속 지켜야지' 다짐하면서도, 이미 집에 갈 때 쯤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철부지 꼬맹이였다.

그 해 여름에 서울로 전학을 왔고, 에덴과 같았던 나의 유년시절도 끝이 났다. 박두식 선생님과의 1년도 안 되는 인연 역시 그렇게 끝이었다. 전학올 때 내가 인사를 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울로 와서도 한동안 결국 빵을 못 사드린 걸 마음에 걸려하며...ㅋ 고학년이 되고 중학교에 가고 그분은 그렇게 그리운 분으로 남았다.

나는 정말 감사하게도, 학창시절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났다. 진짜 이상한 담임도 있었지만, 지금도 생생하게기억나는 가르침을 주신 분도 있었고, 저 분은 진짜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극도의 인내심과 자제력을 보여주신, 정말 인격적으로 훌륭한 선생님들도 계셨다. 고등학교를 거치며 교사라는 집단에 대한 불신도 많이 생겼지만, 인생 전반적으로 존경할만한 선생님들을 적잖이 만난 것이 사실이다.
이런 나에게 엄마는 늘 "선생복이 많다"고 하셨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 뒤늦게 진로를 바꾸었을 때도, 아무 댓가 없이 인생의 멘토가 되어주신 선생님이 계시고 지금도 꾸준히 찾아뵙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선생님들 중 내 마음속 부동의 일순위는 항상 박두식 선생님이었다. 왜일까?
이제는 잘 기억도 안 나는, 몇 개의 반짝이는 편린이 전부인데, 그 희미한 기억 너머에 어떤 것이 이토록 나의 마음을 붙잡고 있는 것일까?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은?"이라는 질문은 왜 다른 분으로 대체가 안 되는 것일까?
때로 의아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깊이 생각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열쇠는 선생님이 아닌 나에게 있었다.

나는 사실 어른을 앞에 두고 그렇게 당돌한 아이가 아니었다. 초중고 12년을 통틀어 나는 대체로 얌전하고 예의바른 아이였다. 임원을 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과 가깝게 지내긴 했지만, 늘 공손하게 일정 거리를 두고 있었다. 어른에게 깍듯할 것을 무척 강조했던 가정교육의 영향도 컸고, 낯가림도 있는 성격이고, 학교는 그냥 그런 곳이었다. 어른들이 보고자 하는 나를 보여주는...
초중고 12년을 통틀어 선생님한테 가서 허물없이 장난치고, 농담하고, 집에서 하듯 까불거리는 건 내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박두식 선생님한테 그랬던 것처럼...

문득 그 생각에 미치자 돌연 눈물이 흘렀다. 바보같이 이제야 비로소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흐린 기억 속 선생님의 눈은 왜 늘 웃고 있었는지, 왜 선생님을 생각하면 따스한 공기가 온 몸을 감싸는지...
한번 30년 전으로 내달린 기억은 멈출 줄을 몰랐다. 새삼 기억속의 선생님은 늘 약간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내밀고 계셨던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느라 그랬을 것이다.

희미한 기억 너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사랑받고 사랑했던 기억이었다. 아이들을 존재 자체로 기뻐해주고, 늘 눈높이를 맞춰 존중해주었던 그 분께만은 나도 예외적으로 마음을 활짝 열었나보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선생님한테 업혀서 계단을 내려가는 건 내 성격상 절대 탄생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내가 그 분을 그토록 마음에 간직했던 것은 존경할만한 수많은 선생님들 가운데 '사랑했던' 선생님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생님이 보여준 사랑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생각보다 젊으셨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계산해보니 지금도 연세가 그리 많지 않으시다. 65세...올해로 딱 30년 되었다.

선생님, 그 때 그 일 기억하시나요?
아니, 저란 아이를 기억하실까요?
아들만 둘이셨던 선생님은 저같은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죠.. 그러니 조금은 기억해주시지 않을까 욕심도 나지만, 기억 못하셔도 괜찮습니다. 제 기억만으로 이미 충분하기에...

좀더 일찍 용기냈어야 했는데...
언젠가 빵 사들고 한 번 찾아뵐게요.
생각같아선 업어드리고 싶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아요.ㅋ 선생님은 아직도 건장하실 것 같거든요.^^
감사합니다. 평생토록 잊지 못할
그리운 내 선생님...










IP : 175.198.xxx.115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ㅇㅇ
    '18.5.15 4:02 PM (183.100.xxx.81) - 삭제된댓글

    좋네요.^^
    저도 생각나는 선생님이 몇분 계셔요.
    지금쯤은 아주아주 늙으셨거나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참 따뜻한 기억을 갖고 계시네요.
    저도 아이디나 비번찾기 질문을 가장 기억나는 선생님으로
    할때 많은데 막상 그런 질문에 대답할 일은 생기지 않던데요
    비번을 다시 설정하라고만 나오지 답을 쓸 기회가 한번도
    없었어요. 가입한 곳이 여기저기 있으니 잊어버리기도
    숱하게 잊어버리건만...

  • 2. 푸르른
    '18.5.15 4:03 PM (219.249.xxx.196)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이네요
    저도 찾고 싶은 선생님 계신데, 연세 높으셔서...
    교육청 게시판 검색하니 안나오네요

  • 3. 스승의날
    '18.5.15 4:04 PM (175.198.xxx.115)

    선생님 찾고 싶어 경기교육청에 전화했는데 퇴직한 교사는 찾기 힘들다네요..ㅠㅠ 페이스북을 뒤져보아도 힘들고...
    퇴직하시기 전에 찾을 걸 후회가 돼요..
    그러고보니 비번 질문 저도 설정하기만 하고 실제로 써먹어본 적은 없네요.ㅋ

  • 4. 어쩜 ~~
    '18.5.15 5:46 PM (223.33.xxx.167)

    이리도 글이 재미있는지요
    처음엔 너무 빼곡해서 읽을까 말까했는데 ㅋ
    원글님 혹시 글쓰시는 분이신가요?
    가슴 찡하고 아련한 동화같습니다

    저는 왠지 선생님들 대하는 걸
    어려워했던 학생이었어요
    왜 그랬는지 선생님 앞에서는 당당하지 못했어요
    친구들은 안그랬는데.
    따뜻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5. 스승의날
    '18.5.15 8:26 PM (175.198.xxx.115)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쓰는 사람이긴요~ 과찬이셔요~~ㅋ

    저 역시 선생님들을 좀 어려워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저같은 아이를 그렇게 무장해제시켰을까 생각해보니 존경스럽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풀어주기만 하는 선생님은 아니었고, 엄하실 땐 엄하셨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이 글을 쓰면서 제가 제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되더라구요. 나는 아이의 눈높이에서 대하고 있는가.. 어른이라고 함부로 애를 대하는 때가 많은 것 같아 반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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