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책으로 펴내도 될 이야기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요.
엄마는, 그야말로 남자 잘못만난 댓가로 평생을 쿵덕대는 가슴 움켜쥐면서 살며 밤낮없이 머리채 휘둘려 동네밖에 나가 조리질을 당하며 살았거든요.
언제나 술만 퍼먹으면서 들개처럼 온동네를 휩쓸고 다니고
혼자 가족들을 먹여살리는게 억울하다는 생각때문에 제대로 직장생활을 한번도 해본적이 없고.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는 일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같은 짓으로 여기고 자식의 모든 일에 전부 무관심하고
월세로 들어간 단칸방마다 제대로 월세를 주지못해서 늘 쫒겨나기 일쑤고
가족들에게 늘 알콜중독에 찌든 황달걸린 노란 눈동자에 핏대 잔뜩 올리고 주먹휘들러대고
입에 담지도 못할 음담패설, 술먹었다는 핑계로 거리낌없이 찍찍 내뱉고
옆집여자들 정작 건들지도 못하면서 술먹은 정신으로 방에 누어 말로는 마구 희롱해대고
옆집 누구엄마, 바람피고 다닌다는 유언비어 술에 취해서 길거리 한복판을 누비며 떠들다가
그집젊은 남편한테 주먹으로 콧잔등 얻어맞아 코피 줄줄흘리면서 집에 들어오고
자식들 얼굴에 버짐피고 굶기를 밥먹듯하는 모습이 불쌍하다고
누가 알선해준 회사에 들어가서 열흘도 안가 술마시고 낮에 발뻗고 자고
코가 벌겋게 술먹어놓고 공장 마당을 도끼들고 다니면서 죽여버린다고 을러대기나 하고
자식들에겐 천원한장 주는것도 아까워서 미친듯이 벌벌 떨면서
승차권 주는것도 큰 분노를 표출했던 사람.
엄마가 밤늦게까지 가구를 등에 지고 운반하거나 벽돌지고 중노동 하고 먼지를 뒤집어 쓰고
집에 들어오면 그걸 핏발이 선 눈으로 기다렸다가, 문을 발로 박차면서 그 길로 가난한 엄마머리채 잡고
대문밖으로 끌고 나가 못살게 굴던 사람.
누구 만났냐고. 그 놈 보러가자고.
엄마나이 18살때, 아빠는 21살때 서로 배운것도 없이 가진것도 없이 오직 젊음 하나만으로 만나 살았으면서
그 시기에 군대도 갔다가 탈영해선 기껏 도망온게 그당시 엄마가 아빠를 기다리면서 혼자 살던 좁은 단칸방이었대요.
그곳에서 숨어 누워지내다가 어느날 헌병들이 잡으러오고 그길로 아빠는 지프차에 짐짝처럼 화물칸에 던져진채
엄마가 혼비백산해서 어쩔줄 모르고 우왕좌왕할때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더니 그길로 7년을 더 복무하고 나왔대요.
그런 것을 우리들 어릴때에도
"나는 헌병대 출신이야, 헌병대! 이 *같은 것들아!!! 세월의 워카!!!"
걸핏하면 그 세월의 워카!는 자주 부르짖더군요.
그 말은 영어가 섞여있어서 어릴때의 우리들에겐 뭔가 저 먼 세상의 무엇처럼 들릴수도 있었겠지만
양치질 한번을 제대로 한적없는 아빠의 튼튼하고 육덕진 누런 이빨들사이로 뿜어져나오는 그런 문장들이
무섭기까지 했어요.
엄마는, 그런 아빠와 잠시 식당도 했지만 곧 육개월도 못가 문을 닫게 되었고
많은 빚덩이를 남긴채 경매로 넘어가게 되고 퇴락해버린 우리 식당은 창문이고 출입문이던간에 전부 못질이 되어 버리고
갈곳 없는 우리들은 각각 친척집에 한명씩 넘어가 살게 되었어요.
한명은 철도가 놓여진 함열로.
한명은 지리산 자락 첩첩산중 구례로
한명은 논산으로.
엄마는, 그길로 아빠와 헤어져 충남 공주 부근 식당에서 먹고자며 주방에서 나물을 만들고 서빙도 하게되었지만
곧 엄마를 찾으러 눈에 불을 켜고 수소문하러 다닌 아빠에게 발견되어서 곧 허구헌날 돈을 뜯기게 되었어요.
그런 아빠가 무서워서 서울 필동이란 곳에도 무작정 올라가 또 식당에서 일했다고 하는데
또 그곳도 기를 쓰고 찾아온 아빠에게 잡혀서 또 호구처럼 살았다고.
훗날 아빠는 자신에게 말도 없이 몰래 그 필동에 잠시 지냈던 때를 우리가 장성한 뒤에도 자주 울분을 터뜨렸어요.
가장이면서도 가족들을 위해 직장생활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당연히 돈이 든다는 것을 못내 억울해하고 그 멍에를 몸에 걸친적이 없었으면서도
행여나 그러기라도 할까봐 더 미치광이처럼 술마시고 길가를 쏘다녔던 사람.
나중에 우리들이 여상졸업후, 회사를 다니면서 모은 돈도 다 쓸어가고
결혼할때 받은 축의금도 전부 쓸어가고
우리들 통장에서 돈을 전부 인출하고 의자에 앉아 만면에 웃음띤 얼굴로 느긋하게 기분좋아하던 그 사람.
집에 돈 50원도 없을 때이니 그런 돈뭉치들이 손아귀에 단단하게 잡힌 그 감촉을
아빠는 무척 좋아했던 것같아요.
그런 아빠가 평생을 술만 먹고 살더니,, 결국은 암에 걸려 그 고통을 못이기고 스스로 갔어요.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너무 고생하고 살아서 눈이 현재 안보이고요.
심장병, 암, 고혈압, 속이 타버릴듯한 위염,관절염등등으로 74세를 맞이했어요.
가끔, 젊은 시절의 앳된 얼굴이던 엄마를 그 오래된 흑백사진속에서 보면,
사람을 잘 만났으면, 이리 힘들진 않았을텐데.
아빠도 젊은 시절은 참 잘생겼지요.
그런 잘생긴 얼굴로 좀 잘살아주지.
죽는 날까지 자식들에게 아빠라는 호칭 듣는날이 드물고
창자가 잘리는 고통을 안으로 숨기며 살았던 사람.
언젠가 늦은 밤에 레바논 선인장인지 기억이 잘 안나는 b급 영화를 본적있는데
어떤 남자가 한때 애인이었던 여자를 줄곧 찾아다니는 영화를 본적있었어요.
그 소름끼치던 언행, 번들거리는 기름같은 눈동자. 입술사이로 보이는 이빨들사이로 마구잡이로 흘러나오는
천한 말들.
걸핏하면 화내기 일쑤고.
여자 등골빨아먹으면서도 폭력을 마구 휘둘렀던 그 영화속의 그남자.
우리아빠같은 사람,
이혼이란 거 통하지도 않았던 사람이지요.
이혼이란 단어는 앞으로 어떤 걸 해야 하고 참아야 하는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짐승같은 누렇고 튼튼했던 들개같이 날카로운 이빨도 나중엔 한개도 남지않고 다 빠져버리고
머리칼마저 희끗해져 그마나도 없어지고 점차 몸이 종이처럼 마르더니, 나중엔 의자에 앉아 바짝 마른 두 다리를
벌벌 떨며 앉아있는 모습이 아기처럼 작고 여리게 보일때 뭉클하고 뭔가 가슴속에 올라오면서 내눈가득 눈물로 잔뜩
일렁이게 만들어 놓던 사람,
그 사람이 혼자 가족들모르게 가고 소방대원이 왔을땐 이미 서너시간은 지난듯하다고.
어찌 그렇게 온몸이 하얄까
수의로 입을때 언뜻보이는 어깨나 목둘레가 참 하앴어요. 눈처럼.
천사가 되어서 간걸까 싶을정도로.
나중에 알고보니, 온몸의 혈액이 마르면서 피부가 그리 보이는 거라네요.
엄마는 나중에 병원에 말기암으로 입원했을때 같이 있던 병실 사람들이 다들 우리 남편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해주는지
떠들때 엄마혼자 구름이 떠가는 봄날의 창문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고 맞은편 인공관절 수술마친 할머니가
나중에 저에게 몰래 말해주었어요.
8인용 병실이 다들 남편자랑으로 시장터같이 시끄러울때 엄마는 그저 말없이 눈물 고인 눈으로 창문밖만 보았다고요.
우리 엄마, 그 말기암을 이기고 그게 벌써 8년전이고 또 봄을 맞이했는데
남은건 보이지않는 두눈과 병든 육신뿐이고
엄마는 그저 지나간 많은 세월들앞에 언제나 입만 무겁게 닫을 뿐이지요.
남편 잘못만나 누구보다 많이 고생한 무서운 시절을 겪은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