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때의 저는 엄마아빠에게 많이 혼나면서 유년시절을 보냈어요.
알콜중독자로 65세까지 살던 아빠는 제게 머리에 두부만 들었다고 매일 욕을 했어요.
심지어는 *만 들어있다, 마이나스 저질이라고 욕을 했고 사람들이 간혹 컴컴하고 불기없는 우리집에 올때면 더 그 사람들앞에서 더 활개를 쳐서 사람들이 배를 쥐고 웃게 만들었어요.
엄마는, 그런 아빠를 대신해서 늘 직접 돈을 벌어야 했어요.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했고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시절을 친척집에서 허드렛일하다가 19살에 아빠를 만나 결혼했었는데 그때에도 아빠는 술을 마시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대문을 발길질하고 들어왔대요.
아빠의 술버릇은 밤에 잠을 절대 자지않고 식구들 머리맡에서 큰소리로 떠드는거에요.
대신 가족들이 학교로, 직장으로 다 떠난 고요한 빈집에서 코를 드르렁대면서 실컷 자다가 오후 6시가 되면 또 나가서 술을 먹고 오는 일정한 패턴이 있어요.
그리고 저녁 7시쯤 되어서 이미 골목 어귀쯤에 육두문자가 실린 욕을 하면서 아빠가 길바닥을 거의 휩쓸다시피 바지를 질질 끌면서 나타나요.
그런 아빠라서 평생동안 명패가 달린 우리집을 가져보지 못하고 월세집만 전전했어요.
그런 환경이 싫어서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전에 3학년 가을무렵, 이력서를 냈던 회사에 붙었을때(기숙사가 있던 먼곳)
그길로 집을 떠나와 일찍 회사생활을 하게 되었어요.
기차를 타면 1시간 30분정도 걸리는 곳인데 원래 집이외의 더 먼 세상을 구경해본적이 없어서 그 곳도 꽤 먼곳인줄 알았죠.
처음 기숙사에 들어왔을때 창가를 빽빽하게 막아둔 철로 만든 쇠창살이랑 낡고 빛바랜 이층침대가 놓여진 방이 무척 삭막했는데도 너무 조용해서, 방이란 공간이 이렇게도 조용할수 있구나 라는것을 처음 느꼈어요.
처음으로 두 귀가 조용할수 있다는게 신기해서 전 그방이 금새 편해졌어요.
나중에 , 엄마랑 전화통화할때 집의 근황을 물으니
"너에게 했던 그욕들을 이젠 나한테 한다. 네가 없으니까"
라고 하네요.
아빠가 8살때부터 그욕을 하곤했는데 왜 그때 한번도 나를 지켜주지 않았냐고 하니까
피곤해서 그랬다고, 나한테만 하지않으면 상관없어서 그랬다고.
여름이 끝나갈 무렵, 가을초입무렵에 집을 떠나왔을 무렵이니, 그 회사에서 5년가량 일했는데도 저는 수중에 돈이 없었어요.
그동안 목돈이 될수도 있었는데 몇번씩 다 쓰다보니 저는 5년전과 똑같은 처지였어요.
그런데도 엄마는
가족을 위해 다 살자고 하는 행동이고
너를 키워낸 댓가이니 생각하면 그리 큰돈이 아니라고 하는데
어릴때부터 궂은 집안일에, 두 분의 구박에,
밖에 나가면 놀림감의 대상이 되곤했는데
그런 모든일들은 기억을 전혀 못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날, 드라마를 보고있는 도중에
미국은 애들이 18살만 되면 다 독립시킨다더라, 어매~~
엄마가 놀란 얼굴빛을 하며 저를 바라보는데 그 눈빛마저 화가 나더라구요.
젊은날, 대학가려고 마련해둔 돈도 다 쓰고
저를 위해선 아무 기반도 마련해두지 않았으면서
저도 19살에 독립한것과 같지 않나요?
게다가 지금은 암을 포함해 여러 병을 앓고 있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데
어릴때 말을 못말아듣는다고 구박을 해대고
학교 가기전 돈달랬다가 싸대귀를 엄청 야무지게 때리는지
착착 뺨이 저절로 다음 싸대귈 맞기위해 엄마의손바닥으로 돌아오고
안경이 수돗가난간까지 날아가고,
그러고도 멈추지 않고, 겨울아침 공기중을 가르는 날선 따귀소리가
전 지금도 생각나거든요.
20대는 넘게 맞았을걸요? 수돗가로 안경이 풀쩍 날아가니까
마당에 함께 살던 옆집 아줌마둘이 아이쿠!하는 외마디소리가 들렸어요.
그 아줌마들앞에서 손찌검 당하던 일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아픔도 몰랐어요.
나중에 엄마가 대문간으로 사라지고 나서 안경이 온전한가 가봤더니
한쪽 다리가 찌그러졌던데, 그대로 쓰고 다녔어요.
그러고도, 엄마가 밉지않았는데
나중에 커서 빈몸으로 결혼해 아기를 낳고 키워보니,
그 세월속에서도 달라지지않은 엄마의 천연(덕)스러움이
얄미워지기시작하더군요.
한번도 온화한 말을 해주지 않았던 사람.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깜짝 놀란채로 흠칫 돌아보면
늘 혼내거나, 심부름을 시켰던 사람.
그런 엄마가
나는 배아프면 까스명수
열나면, 아스피린
이정도만 알고 살았다
라고 할때는 그 단순한 논리로만 세상을 살아왔던 엄마가
부러웠었어요.
그런 엄마는 미국애들은 18살만 되면 독립한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도 설명하기가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아예 입다물고 있었어요.
"거기에 비하면, 너는 얼마나 행복했니?너도 18살에 독립하지 않게 해준
부모 만났으니"
엄마는 늘 매사가 그런 식이었어요.
나이가 올해 73세인데, 전 우리 엄마만큼 답답한 분을 만나본적이 없어요.
엄마가 불쌍한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오래전에 세상을 뜬 아빠때문에 젊고 행복해야 했던 날들이 너무 힘들었으니까요.
술아니면 하루도 살수 없던 아빠는,
우리가 11살때 압력밥솥의 추를 만드는 공장에도 취직한적 있었어요.
그렇지만, 이틀도 못가고, 근로자로 일하기로 한 조건대신 방한칸을 빌려 살기로 한
그 공장안을 큰 도끼를 메고 다녔어요.
날이 시퍼렇게 빛나는 큰 도끼자루를 메고 다니니, 그 누구도 아빠를 제지할수가 없었어요.
결국 그해 눈발 날리는 초겨울날, 우리는 다시 짐을 꾸려 떠났죠.
그런 일들은 늘 계속되던 일상이라 어느 한군데 정착해본적이 없어요.
화가나면 머리채를 잡아끌고 혼냈던 엄마가
지금은 저랑 같이 살아요.
살면서 화해하지 못하고 지내왔던 일들이
과거로 묻히지못하고, 현재와 뒤엉켜 나타날때가 있더라구요.
가끔 우리는 언성을 높여 싸울때가 있어요.
그러나 제게 남는건 진한 죄책감뿐.
엄마는 제게 말로 설명하지 못할 애증인것같아요. 누군가 엄마를 많이 닮았다고 하면
그렇게 그 하루가 우울하기까지 해요.